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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합평회

합평회 <차이나타운>참석자: 박우성, 양경미, 윤성은, 박태식, 성진수

 

영화평론가협회 합평회 <차이나타운> / 2015년 5월 5일

※ 참석자: 박우성, 양경미, 윤성은, 박태식, 성진수

 

성진수: 오늘은 <차이나타운>에 대한 합평회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박우성: 저는 언론시사를 통해 <차이나타운>을 봤어요. 시사회 직후 쏟아진 반응은 대개 긍정적이었고 심지어 뜨거웠어요. 한국영화가 전반적으로 수직계열화된 산업적 고려로 하향평준화 되어 있다 보니 많은 전문가들이 여배우가 주인공인 비일상적이고 강렬한 설정의 외양과 감독의 자의식이 제약 없이 투영된 것 같은 겉표지를 다소 과하게 반겨주는 분위기였어요. 영화의 외적 환경 탓에 <차이나타운> 자체에 대한 객관적인 담론이 형성되기에 앞서 호의적은 방어막이 암묵적으로 전제되는 상황 말이에요. 이런 상황은, 물론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영화비평이라는 지평에서는 사리에 맞지 않는 게 분명하죠. 저 역시 언론에 공개된 후 며칠간은 그런 심정적 편들기로 <차이나타운>을 대했던 것도 사실이고요.

  <차이나타운>이 생각거리를 많이 던지는 영화인 것은 분명해요. 이 영화를 본 후 일주일 내내 잔상이 가시질 않았는데, 사실 이런 한국영화를 만난 것도 오랜만이에요. 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저는 세 개의 감정선을 그려봤어요. 한 명은 감정 자체가 없고, 한 명은 감정이 지나치게 과해요. 그 두 개의 감정선 사이에서 지하철 보관함에 버려진 ‘일영’이라는 캐릭터가 끼어 있는 형국이에요. 저는 <차이나타운>의 핵심 서사는 무감정과 과잉 감정 사이에 끼어 있는 ‘일영’의 성장 아닌 성장 혹은 변화와 파국 사이의 망설임에 있다고 봐요. 무감정의 캐릭터 ‘엄마’의 내면은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생략되거나 공백으로 존재해요. 과잉 감정의 ‘석현’은 아버지의 경제적 궁핍 때문에 끊임없이 절벽으로 떠밀리지만 그것에 상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지나친 친절함으로, 그러니까 오히려 거꾸로 응대하는 캐릭터에요.‘엄마’와 ‘석현’에게 주어진 삶이란 척박한 외부의 환경에 떠밀려 주체적인 삶의 의미를 갈망할 수 없는 삶, 그리하여 오로지 생존만이 의미의 전부인 삶, 의미 자체가 텅 비어 있는 삶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그 삶의 허무를 가리기 위해,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철저히 가면을 써야만 해요. 두 인물이 갈리는 것은 이 대목인데, 이미 말했다시피 무감정의 가면과 과잉 친절의 가면 말이에요. 그리고 여기에 삶의 의미라는 측면에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일영’이 끼어들어 두 가면 사이에서 흔들려요. 하지만 그 흔들림 역시 겉 표식에 불과하죠. 그녀의 방황은 생존 자체가 삶의 의미인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고려에서가 아니라 두 극단의 가면 사이니까요. 때문에 세 감정선의 특수하면서도 신화적인 이야기는 지금 여기 한국사회,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보편적 성찰 지점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어요. 필요, 즉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파국, 즉 해고되어야 하는 현실의 시스템과 비판적으로 공명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앞서 말한 세 개의 큰 감정선이 세밀하게 극화되었는지는 의문이라는 점이에요.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단서들의 유효적절한 배치가 시나리오 작법의 대표적인 원칙이죠. 하지만 이 말이 단서들의 무작정 생략을 의미하지는 않아요. 생산적인 헐거움은 그것만큼의 생산적 환기로 이어지지만 <차이나타운>의 헐거움이 과연 생산적이었는지 의문이에요. 반드시 필요한 단서들마저 무책임하게 생략되고 있어요. 설정 자체가 강력하니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으나 캐릭터나 사건들 각각은 입체감 있게 다가오지 못해요.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할 때는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근거들에 유효하게 제시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요. 주요 감정선 자체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어서 이목을 끌지만 따지고 들면 디테일하지 못해요. 저 사람이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원래 그렇기 때문이다라는 말만큼 허탈한 것은 없어요. 

  좀 더 심각한 것은 주변인물들이에요. 정신 지체아 ‘홍주’의 경우 말 잘 듣는 동생에서 배신에 못 견뎌하는 살인마로 돌변하죠. 그 돌변은 느닷없어 보여요.‘일영’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는 ‘치도’의 행동 뜬금없어 보이고요. ‘엄마’ 밑에서 ‘일영’과 단짝 친구로 살아온 ‘쏭’의 약물 중독과 자살 역시 무책임한 처리 같아요. 어느 트위터리언이 이렇게 적어놨더라고요.“엄마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뭔가? 왜 그녀의 부하들은 그녀를 해하지 못하나? 어째서 저렇게 어린애들만 ‘엄마’ 주변에 있나? 남자들이 그녀 앞에서 벌벌 떠는 이유는 뭔가? 왜 애들은 연애하면 안 되는가? 나이트, 마약은 되는데 연애는 안 됨?”저는 <차이나타운> 안에서 저 상식적인 질문에 대한 그럴 듯한 답을 찾을 수 없었어요.

  <차이나타운>에서 제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냉정한 성찰 혹은 주제와 그것을 담는 카메라 혹은 형식이 엇갈린다는 점이에요. 말하려는 바는 비정한 세계인데 그 비정한 세계를 담는 카메라는 멜로드라마 같다고나 할까요? 진중하면서도 심각한 피사체들의 악전고투를 유치하면서도 뻔한 카메라 시선으로 포착했다고나 할까요? 서사나 쇼트의 빈약한 논리를 감추기 위한 과시적 카메라,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는 대의 외에는 딱히 별 것 없음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젠체하는 시선들로 가득했다고나 할까요? 가만히 관찰했으면 하는 장면에 카메라가 과하게 다가가거나 빠져나온다거나, 클로즈업을 남발한다든가, 격정적인 상황의 논리를 오히려 뭉개버리는 과도한 음악이라든가…. 일례로 ‘엄마’의 거친 피부, 무덤범한 표정, 싸늘한 시선, 그러니까 무감정의 표식을 강조하기 위해 클로즈업을 사용하는 것이야 이해하지만 그것이 매 시퀀스에서 반복되다 보니까 오히려 관성화 돼서 이미지 자체가 주는 활기 혹은 신선함이 떨어져버리고요.‘엄마’를 칼로 찌른 ‘일영’이 ‘엄마’를 제사지내는 영화의 엔딩에 가면만 바뀔 뿐 그 운명적 삶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처절한 실존을 드러내는 맥락에서 카메라가 그저 무덤덤하게 비정하게 관찰만 하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감상적인 음악과 함께 카메라는 굳이 ‘일영’이 앉은 자리로 스스로의 움직임을 과하게 드러내며 다가가 기어이 ‘일영’을 클로즈업으로 잡죠. 그러고는 카메라의 눈과 ‘일영’의 눈이 마주치죠. 이런 과도한 시각적 극화는 인물 내면의 입체감을 넓히기보다는 오히려 과도한 스펙터클에 내면의 원근감을 평면으로 압축시켜버린다는 생각이에요.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유치한 구경거리가 되어버리는 셈이죠. 

  <차이나타운>은 분명 간만에 나온 생각거리를 던지는 한국영화에요. 하지만 곱씹을수록 포장지만 그럴 듯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요. 선물을 받았는데 포장지가 화려해서 잔뜩 기대를 하고 열어봤더니 정작 그 선물은 기대 이하였다고나 할까요? 아, 이 비유는 적절하지 않아요. 영화감독이 선물 주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한준희 감독의 가능성만큼은 충분히 확인했어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힘껏 밀어붙이는 능력이 기본적으로 있는 감독이니까요. 서사적 차원에서는 조금 더 덧붙이고 시각적 차원에서는 조금 더 덜어내는 방식을 고민하면 <차이나타운>보다 훨씬 더 발전된 차기작을 기대하기에 충분하고요. 제 의견의 얼개는 대충 이러하고요, 다른 비평가분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남은 의견은 맥락에 맞게 덧붙여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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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미: <차이나타운>이 장단점을 모두를 가지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평가도 두 가지 견해로 나뉘는 것 같아요, 먼저, 영화에 대한 비평에 앞서, 저도 시사회를 통해서 봤는데요, 극장을 나오면서 만나게 된 지인께서 너무 많이 칭찬을 하는 거예요, 잘 만들었네, 좋네! 계속 말을 하기에 당황했어요. 근데 이 분이, 이 영화와 관계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망각을 했네요, 당연히 좋다고 이야기하겠죠? (웃음)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주변에 호평 일색이어서 나와 같은 생각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없나? 싶었는데(웃음) 앞서, 말씀하신 박우성 선생님의 지적에 많은 부분 동의하기 때문에 반가웠습니다. 저도 영화는 재미있게 봤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이는 영화라고 생각했거든요.

먼저 장점을 이야기 한다면, 김고은과 김혜수, 여배우가 주인공을 맡았다는 점, 그런데 새롭게도 여배우를 필름느와르의 주인공으로 기용했다는 점, 김혜수의 파격 연기변신 등등 이런 것만으로도 할 얘기가 충분히 많죠, 뿐만 아니라, 신인 감독임에도 문제적(?) 영화를 뚝심 있게 찍었다는 것, 그 점은 무척 대단하죠!(웃음) 영화를 보면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초록빛과 보랏빛이 어우러져진 영상의 색감, 거기에서 느껴지는 시각적인 정서가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영화 잘 만들었다, 재밌다’라고 느껴졌어요.

그런데 영화가 끝난 후, 뭐지, 감독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어요. 마침,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 곳, 차이나타운이라는 문구가 보였는데, 생각해보니, 쓸모라는 말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더라고요, 쓸모 있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이말 자체로는 공감을 합니다만, 영화에서도 그렇게 표현됐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없어요, 제게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야기로서의 영화가 갖는 기본요소인 구성의 논리라든지, 개연성이라든지 인과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저는 충분히 설득을 당하지 못했거든요. 감독의 의도는 알겠으나 그것을 풀어가는 데 있어서는 부족한 부분이 많았고 그것을 어떤 다른 외적인 것들로 커버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영화의 단점일 수 도 있겠네요.

설득력이 없다고 박우성 선생님도 지적했지만 여러 군데 있죠, 저는 첫째 엄마의 캐릭터가 이해가 안됐어요, 일영은 석현에게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어쨌든 자기 일을 충실히 잘하죠? 오히려 쏭이라 애는 문제를 일으키는 실수투성이라 일영이가 뒷수습을 해야 해요, 정신지체아 홍주는 일영이 약을 일일이 챙겨줘야 하는 인물이고요, 그런데 엄마는 일영에게 대하는 잣대와 다른 아이들에게 들이대는 잣대가 왜 다른 거죠? 엄마의 논리대로라면 쓸모없으면 없애야 하는데 말이죠. 그리고 본인은 아직 쓸모가 있어 보는데도 “내가 쓸모없는 건가”라면서 죽겠대요. 그리고 입양문제도 그래요. 

캐릭터를 설정에 있어서도, 쏭과 홍주라는 캐릭터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설정해 놓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요. 그리고 주인공들은 아마도 남자의 역할을 여자로 바꾸다 보니 발생한 문제라고 생각되는데요, 20대의 왜소한 여성이 살벌한 도박판에서 돈을 받아낸다? 40대 여자 두목이 가진 권력? 아무리 영화라지만, 밑바닥 인생에서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사회인데, 이러한 설정은 비현실적인지 않나요? 앵벌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잡범들 사이에서라면 마두목 같은 여자들이 있을 법도 할 텐데, 장기밀매하고 살인하는 등 흉악스럽기엔 설정하기엔 너무 과하지 않나요? 아예, 캐릭터 연령대를 높였더라면 어땠을까 싶었어요. 두목에 김해숙을, 김고은의 역을 김혜수가 했더라면(웃음)

김고은과 김혜수의 연기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40대인 여자 그리고 20대인 여자에게 주어진 캐릭터의 설정(두목, 장기밀매, 살인 등)이 그렇다보니, 마치 남의 옷을 입은 거처럼 버거워 보였어요. 설정 자체가 그러니 아마, 누가해도 버거워 보였을 거예요, 그나마 김혜수라는 배우가 했으니 이 정도로 뽑아낼 수 있었겠죠, 그래서인지 두목이라는 캐릭터보다는 김혜수라는 배우가 많이 보였던 것 같고요.

셋째, 일영과 석현인데요, 석현의 튀는 연기는 차치하고, 감독의 의도는 알겠어요, 석현을 왜 심어놨는지, 그의 등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그런데 이건, 감독으로서 너무 미숙하지 않나요? 일영이란 캐릭터는 어떤 사람인가요? 친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죠, 지금의 생활도, 정서적으로 안정된 것도 아니고.. 일영 같은 캐릭터는 적대심과 상대방에 대한 불신이 강한 인간이죠, 그런데 짧은 만남, 순간의 호기심과 친절에 자신이 가족이라고 부르며 살고 있는 사람을 배신한다? 만약, 일영의 행동이 정당해지려면 석현에게 강렬한 끌림이 표현됐다거나, 그럴만한 어떠한 사건이 뒷받침 되어야 이런 일영의 행동을 받아들 일수 있겠죠! 차라리 우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게 더 설득력이 있겠네요.

영화 속 공간, 제목도 차이나타운으로 했는데 왜 굳이 차이나타운인지, 마두목이 자장면 먹고 고량주 마시려고 차이나타운인건가요?(웃음) 영화 속에서 자장면과 고량주가 계속 나오던데(웃음) 인천 차이나타운이 불법 체류자와 범죄가 많은 공간인가요?

 

박우성: 상징적 공간으로 이해해야 하겠죠?

 

양경미: 전혀 상징적이지 않았거든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차이나타운>도 있죠, 그 영화에는 그곳이 안 나오더라도 미국에서 차이나타운이라고 하면 그 공간이 주는 상징이 있단 말이죠. 그곳에서는 끊임없이 범죄가 일어나는 무서운 곳이고, 그래서 범죄 영화로서 필름 느와르 장르로 만들면서 <차이나타운>을 썼죠,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 않아요. 인천의 차이나타운은 인천항에 옆에 있는데 그곳은 불법 밀입국도 쉽지 않고 그래서 불법체류자, 그와 연관된 범죄도 많지 않아요. 오히려 상업지구로 알려졌죠. 자장면 타운도 중국으로 왔다 갔다 했던 선원들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면서 상권이 형성된 거예요. 실제로는 평택(항), 안산(항) 이런 곳에서 불법체류자, 밀입국자가 더 많을 거예요, 그래서 불법 체류자, 이민자들이 많은 평택, 특히 안산이 우범지역이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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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은: 조심하세요. (웃음)

 

박태식: 안산 시장이 들으면 큰일 나요.

 

양경미: (웃음) 평택, 안산이라는 제목을 썼더라면 오히려 상징적 공간일 수 있었겠죠, 마두목이 불법 체류자들을 상대로 신분증을 조작해 주고, 그 지역 범죄 집단의 최고 두목이다. 그런데 이건 폴란스키의 <차이나타운>가 필름느와르 영화니까, 제목까지 카피해서 느와르로 묻어가려는 의도인가요? 곳곳에 감독의 허세가 느껴지네요.(웃음)

 

박우성: 원래는 <코인 로커걸>이었는데 개봉 얼마 안 남아서 제목이 바뀐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양경미: 그렇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사 하나만 짚고 넘어갈게요. 시작부분에서 어린 일영에서 성장한 일영으로 장면이 바뀌면서, 골목에 죽어가는 개를 보고 김혜수(엄마)가 “너는 왜 얘를 안도와주니?”라고 하죠, 엄마는 삽으로 개를 죽인 후, “쓸모없으면 너도 죽인다.”고 말합니다. 감독이 주제를 어필하려고 한거 같은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이런 대사를 치죠? 헐떡이며 죽어가는 동물이든 사람이든, 이런 상황에서 도와준다는 의미는 상식적으로 살려내거나, 그럴 수 없다면 고통 없이 죽기를 도와주는 건데, 감독의 비약이 심한 게 아닌가요? 감독은 아마도, 두 문장 간의 있어야 할 내용들을 생략하고 전달할 메시지만을  대사만을 표현한 것 같은데 그러기에는 너무 작위적이에요, 도대체 감독이 어떤 사람인지 의아스러워요. 경력이든 나이든.

 

박우성: 서른 둘이라고 알고 있어요.

 

양경미: 역시 아직 내공이 부족하기 때문인가요?(웃음) 신인감독으로서 참신한 시도는 좋았지만 여러 가지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요, 이상입니다.

 

박우성: 박찬욱 키드 안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윤성은: 저는 앞의 두 분이 말씀하신 것들에 대부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웃음) 대부분 동의할 수 없는데, 너무 많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제가 다 기억해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하나 반론을 펴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 같고, 그냥 제 얘기를 할게요. 저도 좀 정리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저는 사실 한 번 보고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좋아서, 좋은 측면에서. 모르겠어요, 저도 두 분의 말씀을 들으면서 굉장히 주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도 당연히 주관적인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는 첫 번째 보면서 너무 내 얘기 같아가지고. 나한테 던지는 대사들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중간부터는 약간 거의 좀 울먹울먹하면서 봤거든요. 그래서 사실 한 번 더 본 것도 내가 그때 너무 내 감정에 빠져서 봤기 때문에 제대로 못 본 부분을 찾으려고 다시 한 번 봤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뭐... 모르겠어요. 두 분의 말씀에 동의할 수 없다고 했을 때 그거는 두 분이 논리적으로 말하지 못해서 라기 보다는 아마도 개인적인 차이가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여하튼 그렇게 시작을 하겠습니다. 저는 일단은 이 영화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맨 첫 문장부터가 ‘너 왜 태어났니?’로 시작해서, 계속해서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된다는 그런 부분이 강조가 되고 있는데 그게 되게 생각보다도, 제가 한 번 더 본 사람으로서, 메모를 하면서 봤는데요, 생각보다 훨씬 더 여러 번 반복되면서 일관성 있게 가고 있는 그런 부분이 있어요. 그런 대사를 들을 때마다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봤을 때 그 아까 말씀하신 부분 중에서 이것이 여성 캐릭터가 남성 캐릭터를 대신한 이 느와르의 특성과도 잘 맞닿아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서 아, 좀 너무 두서없이 가는데... (웃음) 이게 여성 느와르라고 했을 때 어떤 혹자들은 캐릭터가 남성 주인공들을 그냥 여성 주인공들로 대체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다 장르적인 관습을 따르고 있지 않냐, 너무 똑같다, 이렇게 보시는 분들도 있는 것 같고... 그런데 저는 그런 게 아니고 이 두 명의 여성 캐릭터가 형제가 서로 배신하고 복수하는 그런 형식이 아닌, 엄마와 딸이라는, 형제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애정관계? 로 이루어진 관계가 서로 둘 중의 한명이 살아남아야 할 수밖에 없는, 둘 중에 한 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관계로 대체시킨 것이 이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좌우했고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불어넣은 하나의 특성이라고 생각을 하고요. 그리고 그것과 더불어서 남성들이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권력관계지만, 권력을 쟁취하고 일인자가 되기 위한 싸움이었지만 이들이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살인과 범죄 그리고 서로를 향한 칼날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이 저는 너무나 특별한 지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에 있어서. 그래서 존재 가치 증명에 대한 부분이 아무리 영화에서 그게 어떤 사람들한테는 와 닿지 않고 그냥 대사만 반복되고 이 영화가 이야기하는 다른 측면이랑 연결되지 않는 것 같다고 느껴진다면 할 말은 없는데 저로써는 관객 중의 한 명이고, 또 평론가로서의 저는 그 부분이 이 영화가 가지고 간, 이 시대에 던지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가 그 어느 때 보다도 존재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면 살 필요도 없는 정점에 살고 있는 것 같아요. 한순간 한순간을 정말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계속해서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살지 않으면 생존의 가치조차도, 생존조차도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 부분들이 좋았는데, 여기서 부딪히는 건 뭐냐 면요, 여기서 정말 부딪히는 건 생존 본능이 너무도 강하다는 거예요. 그게 어디서부터 시작됐냐면 이 일영이가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열심히 햄버거를 먹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정말 계속 배고프다는 말, 이런 말 반복되잖아요. 끝에도, 김혜수를 다시 만나는 그 장면에서도 짜장면부터 먹으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중요한 장면에서도 갑자기 배고프다 말한 다음 뛰어내리고. 그런 것들이 대사를 어느 지점에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도 섬세하게 생각을 하고 만든 작품이고, 대사의 연결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저로서는 굉장히 좋았던 부분인데. 이런 것뿐만이 아니고 캐릭터의 부족한 점들도 말씀하셨지만 그 정신지체 장애인이 어떤 병에 어느 정도의 지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는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이게 영화적인 캐릭터라고 봤을 때 이 장애인에 대한 캐릭터의 특성이나 존재가치는 충분하다고 봤고요. 왜냐하면 저는 아까 말씀하셨을 때 동의할 수 없었던 부분이 쏭이나 정신지체아도 열심히 일을 했죠. 일을 안 한 게 아니고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니까. 일영이도 그랬고, 얘네 들도 열심히 일을 했는데 다만 주어지는 일이 어느 정도의 분량이냐, 이런 차이였던 것 같고. 정신지체 장애인 같은 경우에도 생존에 대한 본능이 너무나 강한 캐릭터잖아요? 그런 것들을 보여주면서 자기를 위협했던 누나에 대해서 굉장한 배신감을 느끼고 자기가 먼저 죽이겠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 줍니다.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되는데 또 그렇지 못하다면 죽어야 되는 이 상황에서의 그 살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 그게 그 트렁크 안에서의 어린 일영과 대면하는 그 장면에서도 사실 ‘죽는 게 낫지 않았어?’라고 물어보지만 일영은 다시 한 번 살아남기 위해서 혈투를 벌이게 되죠. 이런 부분들도 일관성 있게 잘 그려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스타일적인 측면에 있어서, 오히려 저는 앞의 두 분이 말씀 하신 부분은 스타일이 너무 내용을 압도한다고 보셨는데. 저는 오히려 별로 그렇게 스타일적인 측면에 집중해서 보진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영화에 있어서. 그리고 어떻게 보면 김고은이나 김혜수라는 두 여배우의 열연이라든가, 뭐 이런 것에도 그렇게 크게 의미를 두고 보지 않았던 것 같고, 그냥 이 영화가 다른 느와르 장르와 차별화되려고 했던 그런 지점들이 더 많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에 저는 이 작품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고요.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저도 단점을 말하자면은 진짜 박보검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 옥에 티 수준이 아니라 정말 너무나 튀어서 너무 다른 사람들의 모든 연기와 이 영화의 분위기와 맞지 않는 그런... 캐릭터가 아니라 연기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참 저도 보면서 이 영화의 엉성한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나중에 또 얘기를 하겠지만, 그의 연기는 좀 그냥 눈감아 주기에는 힘든, 참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라고 보여 지는데, 한 가지 더 말씀 드리면 연기는 그렇지만 일영이가 그에게 넘어간 점은 저에게는 설득력이 있었어요. 왜냐하면, 양경미 선생님과는 정 반대의 의견인데요, 저는 얘가 그 험한 세상에 살았기 때문에 짜장면에서 파스타로 넘어가는 그 맛이에요. 자극성 강하고, 검은색의 그 거무티티한 짜장면을 맨날 먹던 아이가 이 파스타를 처음 먹어본 그런 것이죠. 그랬을 때의 거기에 대해 느끼는 그 감정이라는 것은, 비록 박보검의 연기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친절함,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맛보는 맛, 거기에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몰입이 안 되지 않았고, 오히려 이게 여성 느와르에 멜로가 많이 상당부분 가미된 그런 측면에서 저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고. 하드보일드 이런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고요,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순화시킨, 여성을 타겟으로 해서 만든 영화라고 생각을 해요. 여성이 많이 보고 싶어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느와르. 이것은 남성들이 보기보다는 여성들이 저처럼, 중간 이후부터는 약간 울먹하면서 봐야 되는 그런 감정선이 아주 깊게 깔려 있는 작품이지 어떤 종류에서 저는 사실은 그런 냉정함이나 냉철함이나 비정함, 뭐 이런 것들은 그렇게까지 세게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이 영화가 특별하다, 그렇게 보는 지점 중에 그것도 역시 들어갑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까 과도한 클로즈업을 말씀하셨는데, 너무 자주 등장하는 클로즈업이 있을 거고, 아니면 너무 타이트하게 잡은 클로즈업도 있을 텐데, 이런 클로즈업 중에서도 옆모습을 9보여주는 장면이 되게 많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어떤 양면성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마치 일영이가 입고 있는 말도 안 되는 꽃무늬 원피스 점퍼처럼, 그녀가 그 옷을 입은 뒷모습처럼 그리고 또 부패한 경찰의 한쪽 뺨은 멀쩡하고 한쪽 뺨은 흉터로 엉망이 된 그런 모습처럼, 어떤 우리 사회의 두 가지 모습을 이 영화가 계속해서 집요하게 따라가고 있고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엄마와 딸의 관계가 결국에는 서로에 대해서 칼을... 일영 엄마는 사실 처음부터 그것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자기 존재가치가 이미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낀 것 같고요, 대신에 그 존재 가치를, 자신의 딸에게 그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가치를 증명을 했다고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보였고. 나머지 부분에서의 옆모습만 집요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뭐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어떤 화려한 도시 내지는 지금 굉장히 빠르고 논리적으로 돌아가고 있는 이런 사회의 이면에 깔려 있는 부조리함이나 이런 것들을 같이 함께 끄집어내서 보여주고 있는 그런 장면이라고 생각해서 그것도 필요한 만큼 사용됐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 너무 말을 많이 한 것 같아요. 또 얘기할게요,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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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식: 박태식입니다. 앞에서 얘기를 듣고 나면 들으면서 또 정리되는 게 있어요. 뒤에 하는 게 약간 유리한 점이 있는 것 같은데... (웃음) 앞에서 말씀하신 것들은 생략 할 수 있는 건 생략을 하고 제가 봤던 중요한 두 가지 정도가 있어요. 첫 번째는 여성을 조합을 한 하드보일드로 내가 뭘 봤냐면 옛날에 이혜영하고 전도연하고 나온 <피도 눈물도 없이>. 그때 그 영화보고 굉장히 좋았거든? 처음에 둘이 만날 때 걸어가는 데 팍 하고 옆에서 박잖아요, 택시운전사가? 난 그 영화 참 재밌게 봤는데 오랜만에 여성 캐릭터 둘을 그렇게 조합시켰어요. 그 조합이라는 것만 해도 나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영화가 앞에서 긍정적인 면, 부정적인 면이 있었는데, 물론 필름느와르를 지향해 보려고 했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죠. 그러다보니까 굉장히 어디서 많이 봤어, 이 사람이. 그래서 그 봤던 것을 이리저리 짜깁기해서 집어넣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아까 겉멋이 들었다고  그랬잖아요? 겉멋이 들었다는 부분에는 상당히 동의할 수가 있겠어요. 그런데 난 영화를 볼 때마다 내 입장도 중요하지만, 내가 한 번 감독이 돼보는 노력을 가끔 해요. 내가 감독이라면 이걸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하고 나면 여태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좀 보이더라고요. 나는 엄마와 딸 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게 옛날에 봤던 영화중에 <조이 럭 클럽>이라는 아주 훌륭한 영화가 있었어요, 웨인 왕이 만들었죠. 그런데 그 <조이 럭 클럽>에 보면 4명의 딸과 4명의 엄마가 나오잖아요? 원래 소설인데. 얘가 자기처럼 살지 않게 하려고 무지하게 노력을 하는데 나중에 가면 꼭 자기처럼 되는 겁니다. 엄마와 그렇게 충돌을 해도 자기처럼 꼭 되는 것을 엄마들이 절망을 겪으면서 딸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뭘 물려주느냐하면 희망이라는 거예요. 처음에 보면 거기 깃털이 하나 나온다고. 백조 깃털이 희망을 물려주는데 나는 (<차이나타운>의)이 엄마는 어떤 면에서는 정말 같은 걸 물려준 게 아닌가. 그 자기가 이 아이를 떼어 놓으려고 하는 장면이 세 번 나와요. 처음에는 일영이를 코인 락커에 집어넣는 거. 두 번째는 얘가 올 때 얘를 길에 버리고 오라고 그랬잖아요.

 

박우성: 버린 거죠.

 

박태식: 버리려고 했는데 일영이 찾아왔고. 그리고 막판에는 일영을 일본에 보내요. 치도인가에게 부탁을 하지요 아마?

 

성진수: 고경표가 연기하는...

 

박태식: 예. 털끝하나 건들이지 말라고 했어요, 일영한테요. 그러니까 자기가 갖고 있었던 세 번에 걸쳐서 이 아이를 밀어내려고 했는데 밀어내면 또 와 있고 밀어내면 또 와있고. 그래서 나는 내가 감독이라면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이게 엄마하고 딸의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한 번 보여주는 시도가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희망을 전달하고 딸이 개과천선해서 엄마를 이해하고 그런 것도 있지만 밀어내고 싶은 거 있잖아요? 그래서 딸을 아주 강력히 밀어내지만 어쩔 수 없이 똑같이 자기의 길을 걸어야 하는 그런 건데. 나는 그것을 어디서 눈치 챘냐 하면 처음에 한 20분 지나니까 얘가 딸이라는 걸 알겠더라고요. 처음에 보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런 면에서는 감독이 너무 빨리 들킨 거지. 자기 의도를. 그래서 끝까지 둘 사이의 관계를 그려내려고 한다. 자꾸 버리지만 다가오는. 실제 엄마하고 딸이 그렇잖아요. 안 그런가? (웃음) 어머니는 ‘얘는 절대 나처럼 되선 안 돼’, 그래서 자꾸 밀어내고 ‘너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많이 충고를 하는데 어느 날 보니, 거울을 보니 엄마하고 딸이 똑같은 거예요. 난 그런 것들을 감독이 좀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가, 그런 생각이 들고요. 그리고 아까 그 트렁크 뒤에서. 근데 난 그거는... 트렁크 뒤의 어린 시절의 자기와 대화를 나누잖아요. 트렁크 뒤에서. 그게 엄마의 뱃속에 있는 자궁 같은 느낌을 주더라고요, 저는. 자궁이 탁 열리면서 얘는 다시 들어오는 겁니다. 그냥 자궁에서 죽을 수도 있는 처지였는데 그것을 뚫고 나와서 다시 엄마한테 갔다 하는 거. 그래서 약간은 비극적이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모녀관계가 갖고 있는 어떤 그런 내면? 그런 걸 표현하는 거죠. 신화에도 그런 것 많이 나와요.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이런 관계도 그렇고. 항상 엄마는 ‘얘는 정말 나처럼 살면 안 돼’, 똑같이 사는 그런 모습을 보여 줬다고 해서. 전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체성의 재설정? 그렇게 한 번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처음에는 얘가 자기의 정체를 모르고 방황하다가 어느 날 보니까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가 여기다! 그래서 자기가 엄마의 딸로써의, 물론 거기서는 아주 험악한 조폭세계, 폭력의 세계이긴 하지만 그 안에서라도 어쨌든 간에 엄마와 딸의 교통정리? 정체성의 재설정? 뭐 이런 것들이 좀 이루어졌다는 걸 보고. 젊은 감독 치고는 굉장히 뭔가 열심히 표현해 보고 싶구나 라는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제가 단점으로 보는 건 뭐냐 하면 너무 빨리 들켰어요. 제가 보기엔 애를 버리고 오는데 벌써 알겠더라고요. 버리는 게 두 번이나 나오잖아요. 락커에도 버리고, 길에 버리고,

 

모두: 그 애가 아니에요.

 

박태식: 아니, 나중에 보니까 저거 아니야? 자기 딸로 입적이 됐잖아요

 

박우성: 입적을 시켜 준거죠, 나중에 가면은.

 

박태식: 그걸 누가 시켜줬어요?

 

모두: 김혜수가요.

 

박우성: 걔를 버리고 가는 거는 김혜수가 아니고요,

 

박태식: 아, 내 말은 뭐냐 하면 김혜수가 그것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엄마라는 거죠, 그게.

 

성진수: 그 부분은 열려있는 거죠.

 

박태식: 그러니까 실제 엄마일 수도 있어요. 실제 엄마가 아닐 수도 있고. 어쨌든 간에 마지막에, 죽기 직전에, 마지막 장면에 열고나서 자기가 입양원서를 집어넣잖아요? (그게)굉장히 암시하는 게 많다고. 그리고 김고은이 중간에 주민등록증 사진을 찍는데 걔가 웃는 게 있어요. 그걸 가지고 주민등록증을 만들려고 주잖아요. 그게 이 감독이 영화를 굉장히 많이 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까지. 영화를 많이 보다보니까 어떻게 표현해야지 이게 좋겠다 하는 그런 노하우 같은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래서 이것을 엄마하고 딸 이야기로 볼 수 있지 않겠나 그런 생각을 좀 했었고. 그리고 다음으로 느와르 적인 것은 굉장히 노력을 많이 했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올드 보이>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예전의 <미저리> 같기도 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감정 이입 없이 폭력하고 이런 것은 <볼사리노> 같기도 하고, 뭐 등등. 이게 굉장히 느와르 적인 특징을 많이 살리려고 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두 분이 얘기한 것처럼 좀 미숙한 것 같아요. 그게 전문가의 경지에는 아직 못 다다른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튼, 그러니까 한 세 가지 정도를 이야기 했네요? 그렇지요? 우리나라에서 하드보일드에서 여성 배우들을 조합했다고 하는 것 괜찮았고, 그리고 거기에서 느와르적인 거를 한 번 잘 만들어보려고 했다 그건 높이 사지만 좀 미숙했다. 그리고 엄마와 딸의 관계를 이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는 것, 이 세 가지 정도를 한 번 이야기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진수: 잠깐 앞서 얘기했지만, 이 영화를 본 첫 감상을 한 마디로 하면 도통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입니다. 여 캐릭터를 그리는 방식이라든지 그런 측면에서 장념이나 가능성들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런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떤 평가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가장 큰 이유가 있는데요. 소위 말해서 관객과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 영화가 시각적인 것, 그 다음에 사운드적인 것을 통해서 정보를 주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전달을 하고, 관객들이 그 안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고 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이 되어 가야 하잖아요. 물론 영화를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수단이라고 보는 것은 영화를 예술로서 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배척당하는 일이지만, 저는 그것이 기본이 되는 지점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예술로 영화를 볼 때도요. 그런데 그 지점에 있어서 이 영화는 너무 미숙하다고 보여요. 기본적으로 내레이션, 즉 스토리텔링을 하는데 필요한 정보들을 전달해주지 못한다고 저는 봤어요. 어쩌면 그렇게 전달할 내용이 애초에 없는 영화일 수도 있는데.... 여하튼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서 저에게는 너무 많은 물음표들만 생겼어요.

예를 들자면,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김혜수와 김고은은 진짜 친자의 관계인가 아닌가. 이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우리가 따져볼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것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열려 있는 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예슬 들자면 그런 것이죠. 김혜수가 그 많은 자식들을 이렇게 거느리면서 살아왔는데 그 중에 가장 자신의 자식이고 싶은 사람이어도 되는 거고, 정말 핏줄에 의한 자식이 되도 상관없기 때문에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일단 인물들의 관계가 정교하게 그려지고 있지 않다고 봐요. 그러니까 처음에 일영하고 몇 명의 아이들이 길거리에 버려졌잖아요? 그러다가 두 명이 다시 돌아왔죠. 두 명 중에 한 명은 빨간머리 인 것 같고 한 명은 일영 같아요. 그 외의 애들은 어디 갔는지, 만약 그들이 그냥 버려진 채로 사라진 것이라면, 성인이 되어 가족으로 남아 있는 인물들은 어떻게 그 가족이 된 것인지, 예를 들어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그 아이, 그 아이는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그런 것들이 궁금해지는 거죠. 홍주는 갑자기 어떻게 합류했고 어떤 병이 있는 것인지 그런 정보가 있었나요?

 

윤성은: 아니 그거는, 그때 버린 애가 아닌 거죠. 그거는 그렇게 굳이...

 

성진수: 이 영화는 그게 굳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이 영화는 일영이라는 인물이 처음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리 거칠고 필요 없으면 버리겠다고 하더라도, 자기에게 처음생긴 가족들의 이야기기도 하거든요. 그런 가족들 간에서, 감정이 있건 없건, 살아오다가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 갈등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일영이라는 인물의 이야기이잖아요. 일영이가 삼촌이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죠, 삼촌이 2~3명 등장하죠, 수술하는 사람, 오뎅 파는 사람, 어쨌든 나쁜 사람이지만 한쪽 얼굴이 일그러진, 삼촌들이라고 부르죠. 나머진 다 오빠라고 부르잖아요. 나중에 자기를 부두에서 엄마가 고이 보내주려는데 괜히 린치를 가해서 눈을 베게 만드는 그 오빠라는 사람. 그 다음에 자기가 매일 약 먹으라고 챙겨주는 데 어쩔 수 없이 자기가 호감이 생긴 남자 때문에 칼을 들이대야 하는 동생 같은 애. 또 자기의 친 자매이자 분신 같은, 쏭이라고 불리는 여자, 또 자기를 묵묵히 지켜주는 또 다른 오빠 같은 존재. 모두를 가족으로 부르고 있고 일영에게는 하나의 가족인데 이 인물과 그 가족들 간의 관계를 알려주려면 가족들과 일영 간에 이어져 있는 끈들이 있어야 되고, 그것들이 영화에서 우리가 감정적으로 서로 느껴지게 잘 전달이 됐어야 하는 게 영화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그런 것이 너무나 생략되고 그냥 갑자기 어느 날 일영이가 트렁크에 실려서 김혜수 엄마한테 왔다가 또 봉고차에 실려서 어디 길거리에 내던져졌다가 집에 오고 갑자기 한 10년 점프하더니 그 인물들이 다 영화 속에 심어져 있는 거에요. 그렇게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나서 이 일영이 어떻게 감정적으로 갈등을 겪고, 그 갈등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 선택은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깨달으라고 한다는 건 무리라고 봐요. 또한 이 인물들은 일영이와 영화가 펼쳐지는 배경이기도 해요. ‘차이나타운’이라는 배경을 대표하는 것이 이 인물들이니까요.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에 대한 정교함이, 제 기준에서는, 기분 이하로 떨어지다 보니까 이 영화를 계속 봐야하나 싶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나 영화를 본 대부분의 관객들이 이야기를 끝까지 다 쫓아가면서 제 나름대로 스토리를 구성해 낼 수 있기는 하죠. 근데 그것은 상투성과 클리셰에 기대서 가능한 것이지, 감독이 이 영화만의 세계를 잘 구축해서 가능했던 것이 아니라고 봐요. 그렇다면 이 감독이 이 영화만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세계, 메시지, 어떤 그런 것들을 전달되었다고 볼 수 있는가? 저는 전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아주 피상적으로밖에 전달될 수 없는 거죠. 간단히 말해서 ‘쓸모 있는 자 만이 산다’는 그 대사와 관계된 영화를 만들려고 의도 했다는 건 알겠지만 영화가 그것을 피부로 와 닿게 느껴지도록 만들어지진 않은 거에요. 마치 아포리즘을 묶어 놓은 책 같은 거죠, 영화가. 제가 볼 때는 그게 가장 영화가 실패한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아까 박우성 평론가가 캐릭터가 이해가 안 간다고 했을 때, 그것이 격하게 동의했었어요, 캐릭터가 잘 이해가 안 갔거든요. 캐릭터들에 대한 어떤 연결고리가 없고 그 캐릭터들이 어떤 역사를 살아왔는지에 대한 어떤 단서도 없고, 또 몇몇 캐릭터는 왜 등장했는지 모르겠고. 박보검이 연기한 인물이 하나의 상징적 은유 내지는 소품처럼 등장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사건을 촉발시키기 위한 그러한 쓰임새로 투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인물 하나 뿐 아니라 모든 인물들이 그런 수단으로 밖에 존재한 게 문제인 거죠. 영화 중간에  경찰 간부 둘이 등장하죠. 그들에 김혜수한테 이번에 부두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얘기를 하잖아요? ‘저 두 경찰은 갑자기 왜 등장시킨 거야? 뭔가 이 영화를 좀 사회성 있는 이야기로 격상시키고 싶은 건가?’이런 생각 밖에 안 드는 거에요.

 

박우성: 단순히 파워겠죠, 파워. 그만큼 센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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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 맞아요. 그렇겠죠. 근데 너무 단순하고 순진한 하수의 방식이죠. 그런데 저는 그 경찰들의 등장하는 지점에서 ‘이 영화는 지금까지 김혜수라는 캐릭터의 구축에도 굉장히 미흡했구나’라는 걸 깨달았어요. 김혜수는 소위 말해서 그 영화가 배경으로 하는 차이나타운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게 생각해보니까 그 경찰 간부 둘이 등장하기 전까진 어느 정도 막강한 힘인지에 대해서 우리한테 그냥 피상적으로 ‘어, 막강해’라고만 했지 아무것도 보여준 게 없더라고요, 아무것도. 그가 그 상권을 얼마나 쥐고 있는지, 혹은 그의 비즈니스 범위가 어디까지 펼쳐져 있는지, 그는 재산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 비즈니스가 얼마나 험악하고 위법적인 것인지 등등. 이런 정보들을 그냥 이 영화는, 다시 말해서 디테일하게 있어야 할 정보들을 이 영화는 그냥 ‘알지?’이러면서 넘어갔더라구요. 마치 동화처럼 ‘옛날 옛적에 이런 사람이 있었대.’ 라고 시작하는 영화밖에 안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영화가 결과적으로 붕 떠 있고 현실에 발을 디디지 못하는 지점이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결국 이 영화는 이야기를 펼쳐 나가기 위한 장치들은 있으나 그것을 어느 밭을 기반으로 뿌리를 내리고 키워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영화인 거죠.

또 한 가지는 <차이나타운>이란 영화에서 대해 말할 때, 여기서 꼭 깊이 이야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이 영화를 둘러싼 담론적인 것인데요. 이 영화에 대해 설명할 때 ‘느와르’ 라는 말이 나오고 ‘하드보일드’ 라는 말이 나오고, <대부>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저는 도대체 한국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언론이나 혹은 평론가 들이 ‘느와르’라고 할 때, 그 ‘느와르’는 뭔가?  느와르라고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화를 느와르라고 하는 건가? 하드보일드는 도대체 무슨 영화를 하드보일드라고 하는 건가? 왜 이 영화를 <대부>와 비교를 하는 거지? 그런 담론에서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쓰는 용어들이, 물론 이것이 학술적인 접근은 아니더라도, 뭔가 공통적으로 공유되는 게 있으니까 쓰일 것 같은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싶더라구요.

 

박우성: <위플래쉬>와도 비교하더군요.

 

성진수: 아, 그래요?

 

박우성: 그런 식으로 쓰면 홍보자료 문구에 올라가는 경우가 많죠.

 

성진수: 만약 그런 느와르나 하드보일드 같은 단어들이 단순히 홍보성의 하나의 카피로, 트위터나 SNS에서 빨리 읽히기 위해서 쓰인다면......

 

박우성: 모든 경우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요. 어떤 경우 이왕 감상을 적을 거라면 홍보자료에도 올라가도록 적는 어떤 법칙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왕 좋게 쓸 거면 감정적 언사를 덧붙여 아주 좋게 써주는 느낌이 있다는 뜻이에요.

 

성진수: 여하 그래서 사용되는 것이라면, 글쎄요 우리, 평론가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봐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박우성: 그럼 그만 얘기하실 건가요?

 

성진수: 네.

 

박우성: 여기저기서 다들 하드보일드라는 개념을 호명해서, <차이나타운>을 하드보일드 계보 안에 넣을 수 있는지의 여부, 혹은 그간 제가 알고 있는 개념이 틀렸던가라는 의문을 확인하기 위해 제가 한번 조사해봤어요. 물론 영화장르의 상식적인 수준에서요. 하드보일드는 비정, 냉혹, 이런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폭력적인 주제나 사건을 무감정과 냉혹의 관점으로 형상화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선 처리, 즉 시점의 문제인데요. 카메라의 시점은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 자체를 무화시켜야 하기 때문에 대개 무정물의 시점이라 부를 수 있는 시선으로 꾸며집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물의 주관을 반영하는 시점쇼트는 억제되고요, 클로즈업 쇼트는 자제되고요, 구구절절한 사연은 생략되며, 의도적인 점프 컷이 빈번하고, 일체의 수식을 제거하고 음악은 최대한 자제하는 등등. 사실 이것이 하드보일드의 상식이에요. 그런데 <차이나타운>의 시선은 멜로드라마의 그것에 가깝잖아요. 극단적인 생존의 쟁투현장으로 인물을 밀어 넣으니까 내용은 하드보일드라 할 수 있겠지만요. 

 

성진수: 나 거기에 이의가 있어요.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가 될 수가 없다고 봐요.

 

박우성: 굳이 얘기를 하자면... 맞아요. 왜냐하면 하드보일드가 될 수 없는데 굳이 얘기하자면 그러그러한 설정이라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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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진수: 설정 차원에서도 될 수가 없다고 봐요. 왜냐하면 하드보일드가 가치판단을 멈춘 인물이 등장해야 되는데, 그래서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하드보일드에 탐정이 자주 등장한다고 보거든요. 탐정은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이기 때문에 가치판단을 유보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영화는 모든 인물들이 그 사건에 연류 된 인물이지 제3자의 인물이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드보일드의 비열한 거리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이 영화 같은 일물 설정에서는 그 자체가 하드보일드가 될 수 없다고 봐요. 불가능하지 않나요?

 

박우성: 굳이 얘기를 하자면... 맞아요. 왜냐하면 하드보일드가 될 수 없는데 굳이 얘기하자면 그러그러한 설정이라는 차원에서 그렇다는 거죠.

 

성진수: 그런 셈이죠.

 

박우성: 그러니까 하드보일드라고 얘기할 수 없고. 또 <대부>라는 사람이 있던데 <대부>는 일단 진짜가족이지 않습니까?

 

윤성은: 같은 <대부> 아닌 거 아니예요? (웃음)

 

박우성: 같은 <대부>가 아닌가?

 

윤성은: 대부업자?

 

모두(웃음)

 

박우성: 아, 대부업자라서 대부로구나... 저는 용어를 쓸 때 스스로를 전문가라고 생각한다면 엄중하고 정밀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용어를 잘못 사용하면 그것이 일으키는 오해에 대한 책임도 져야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래서 시사회 직후 쏟아진 반응들에서 개념을 잘못 사용한 전문가들은 비판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 그리고 윤성은 선생님께서는 취향의 존중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저는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이상적으로 말하자면, 훌륭한 영화는 취향으로 엇갈리기 이전에 모든 취향을 섭렵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좀 전에 다른 분들 말씀 듣고 저도 반성했어요. 윤성은 선생님이 하신 계약이 비틀어지면 냉혹하게 버려지는 세상이라는 지적 말이에요. 그 지점에 대한 막연한 제 생각이 그 표현을 듣고 보다 명확해졌어요. 그 다음에 박태식 선생님의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한 지적. 저는 그런 부분을 읽지 못했어요. 충분히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지점인 것 같아요.

그 다음 여기저기에서 비판받고 이 자리에서도 비판받는 ‘석현’이라는 캐릭터 말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친절할 수 있느냐는 질문들 말이에요. 그런데 저는 그 캐릭터가 이해됐어요. 서두에도 말씀드렸지만, 절대 계약관계가 아니면 죽어야 하는 세상에서 ‘엄마’는 아예 표정을 없애버렸다면 ‘석현’은 살기 위해서 그런 식의 지나친 가짜 표정을 체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생존만이 삶의 모든 의미인 사람이 거짓으로 친절함을 과하게 연기하다가 그 가짜 연기가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체득되는 경우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고 봐요. 그러니까 그 과한 친절은 생의 발버둥인 셈이죠.

 

윤성은: 전 연기가... 연기가 너무 어색해서.

 

박우성: 아, 연기력 말씀이셨군요. 감독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한발 더 나아가 의도적으로 어설픈 연기를 지도한 것은 아닐까요? 그런 어설픔이 철저히 계산된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웃음)

 

박태식: 아, 원래 좀 미흡한 것 같습니다.

 

박우성: (웃음) 그저 저는 세간에 떠도는 ‘석현’과 그를 연기한 배우 박보검에 대한 비판이 좀 부당하다고 생각해서요. 생존을 위해서는 무엇인들 못하겠냐는...

 

윤성은: 저도 그 캐릭터는 괜찮아요, 그런데 연기는... (웃음) 그리고 취향의 문제. 아까 취향의 문제를 말씀하셨는데, 잘 만든 영화는 당연히 모든 사람의 취향을 섭렵해야 되죠. 그러니까 이 영화는 그만큼 훌륭한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에요. 아니라는 얘긴데, 저의 차원에서 얘기를 한 거니까 뭐. 그렇지만 그런 논리로 가다보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영화는, 만약 예를 들어 한 70%의 사람이 공감한 영화는 그만큼, 70%만큼 훌륭한 영화냐? 또 이것도 아니기 때문에...

 

박우성: 그렇죠. <국제시장> 같은 영화...

 

윤성은: 네, 아니기 때문에 뭐 그것은 그냥 사실 평론가로 할 말은 아닌데 그냥 제가 먼저 다른 분들과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말씀을 드린 거고요. 아까 전에 양경미 선생님이 이야기하신 부분 중에, 그리고 성진수 선생님도 지적하신 부분 중에 하나가 김혜수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부분 있잖아요? 저는 이 영화가 여성 느와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여성이 주인공으로 대체되었다는 그런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남성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의 이야기라고 생각을 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저는 멋있었다고, 여자들이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박우성: 그런 근거들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좋았다는 거죠.

 

윤성은: 그러니까 그 장면에서 김고은을 강한 여성 캐릭터로 만들어 줬던 건데 전 많이 순화되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가. 그것도 조금 더 강하게 갔어야 되고 사실. 조금 더 강하게 가고, 비정하게 갔더라면 하드보일드, 카메라 워크가 어땠던지 간에 더 이어붙일 수 있는 측면이 있었을 텐데, 그런 면에서는 좀 약했는데, 어쨌든 남성들과의 대결에서 살아남은 여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것이 여성들에게 더 어필할 수 있는 측면이 많이 있고. 뭐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요, 저는 사실 여자이기 때문에 잘 못 느꼈는데 여태까지의 여성 캐릭터가 영화 속에 등장하면서, 여성 캐릭터가 킬러든지 뭐든지 간에 남성 감독이 만들었을 때 여성들을 그려내는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잖아요. 어떻게 보면 김혜수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이때까지 알고 있었던 그런 이미지의 모습을 단 한 장면도 보여주지 않고. 김고은은 뭐 그렇게 글래머러스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과감한 노출 씬을 이미 선보였던 여성 배우인데도, 전혀 일말의 여지를 두지 않는... 그냥 단순히 여자, 그야말로 그냥 염색체.. XX의 여성으로보여지지, 이들이 그 어떤 남성의 시선으로 보여 지는 여성이라고 보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측면들이 있어서 그것도 저는 좀 신기하면서도 궁금한 점 중의 하나에요. 그래서 한준희 감독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은, 어떻게 이렇게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지, 그런 것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했고.

그 다음에 저는 지금 우리가 이야기 한 것 중에서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이 뭐냐 하면 사진 찍는 장면 있잖아요? 다 같이 있는 장면. 거기서도 ‘이 카메라 고물이야’, 또 여기서도 쓸모에 대해서 카메라와 인간의 쓸모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대사도 나오지만, 그것보다는 사실 이것은 일반적인 다른 영화들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에필로그로 많이 사용되는 그런 장면이잖아요? 가족이 다 죽고 한 명의 일인자가 남았을 때 플래쉬백으로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장면인데, 보통은. 이것을 중간에 끌어들이면서 얻게 되는 효과가 무엇인가? 저도 많이 생각해야 하는 부분이었어요, 궁금하기도 했고. 그게 언제 들어 가냐면, 트렁크 안에서 어린 일영과 마주하기 전에 먼저 들어가거든요. 끝나는 구나, 약간 그런 느낌이었는데... 대결 전에 이걸 먼저 보여 준 거예요. 그래서 나는 그 포인트가 진짜 이것을 왜 여기로 옮겼을까를 생각을 해봤을 때 이 사람이 맨 마지막에 이것을, 다른 영화에서 했던 것처럼 에필로그로 넣었더라면 이것이 또 하나의 클리셰처럼 느껴졌거나 아니면 더 심한 겉멋, (웃음) 겉멋으로 느껴졌거나, 뭐 이렇게 생각이 되었을 텐데 그런 발상도 조금은 참신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고요. 왜냐하면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지금 먼저 즐거웠던 한 때는 거기서 끝난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가족들이 하나씩 죽어나가고 엄마와 둘이 남은 이런 상황에서... 그런 부분도 지적을 하고 싶었고요.

그 다음에 제가 대사를 중요하게 생각을 하는 편이기 때문에, 아까 양경미 선생님이 지적하신 개를 죽이는 장면 있잖아요? ‘왜 도와주지 않고 보고만 있냐, 쓸모없어지면 너도 죽일 거야’ 이게 두 문장이 이어지지 않는다, 논리성이 없다고 말씀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비약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저는 이 문장은 좀 따로따로 이해를 했거든요? 우리가 매일 말하는 두 문장이, 물론 이것은 영화이기 때문에 연결 되어야 맞는 거지만, 이것은 따로따로의 의미가 분명해요. 왜냐면 ‘왜 도와주지 않고 보고만 있냐’는 이 말은 나중에 엄마가 죽을 때 사용이 되고요 그리고 죽어가는 애를 갖다가 왜 고통 속에 나두고 있냐, 우곤이 죽을 때도 이거 뽑으면 나 편해질 것 같은데 도와달라고 하잖아요, 그랬을 때 어떻게 보면 어린 시절에 엄마가 했던 얘기가 생각이 나면서 곤이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되는 것이고, 엄마를 죽일 때도 마찬가지로 더 깊게 찌르게... 이런 식으로 다 연결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게 그렇게 이상하지는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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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미: 조금 전에 윤성은 선생님이 말한 대로 자장면만 먹던 애가 파스타를 보고 반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죠! 그런데 파스타 맛을 봐야, 자장면보다 좋다는 걸 알지 않나요? 이건 마치 파스타를 먹어보지도 않고서 파스타가 좋다는 격이니, 제 말씀은 일영이 모두를 배신할 정도로 행동의 변화가 있다면 그렇게 할 만한 동기 및 사건이 보여 져야 한다는 거죠. 즉 자장면 맛보다 더 좋은 파스타의 맛을 보여줬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야 일영의 행동이 이해되고 설득력을 갖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대사는 한 문장 한 문장 하나 곱씹으면 주옥같은데 왜 저에겐 겉돈다는 느낌이 들죠.

 

성진수: 이 영화는 클리셰 덩어리 같은 영화죠. 그래서 익숙하다, 많이 본 것 같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고.

여성 캐릭터에 관해서는 윤성은 평론가의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은 있어요. 여성 캐릭터를 그릴 때 소위 말해서 쉽게 팜므파탈이라고 해서 여성의 성적인 부분을 강하게 나타내면서 강한 여성을 표현을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측면에서 분명히 우리나라 영화에서 여성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새로운 외적인 모습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조금 더 다양하고, 더 큰 상상력이 여성 인물에게 들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죠. 물론 배우를 캐스팅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영화 제작비를 구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현실적인 부분은 알지만, 만약에 조금 더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김고은 같이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진 그런 캐릭터 이지만 그렇게 소녀티가 묻어나는 것과는 다른, 좀 더 거친 이미지를 갖는 그러한 여성도 우리가 생각해 볼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까지 좀 더 확장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영화의 인물들이라는 게 아직까지도 고정관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캐릭터, 그런 외형이기도 하니까요. 이런 영화를 계기로 더 많은 여자 배우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여성 인물에 대한 상상력이 더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다른 이야기인데, 왜 목에 볼펜 꽂아서 죽이는 장면 있잖아요. 그런데 그 장면이 그런 느낌 안 드셨어요?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나왔던 영화인데, <배리 배드 씽> 인가요?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총각 파티를 하다가 스트리퍼가 우연한 사고로 죽고, 그 시체를 숨기려다 사건에 휘말리고, 우발적인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인물들이 허망하게 죽어나가는 영화로 기억하는데, <차이나타운>에서 인물들의 죽음이 저에게는 비슷해 보였어요. 영화에서 많은 사람이 죽는데, 그 죽음의 개연성과 필연성이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았거든요. 일영에게는 가장 가슴 아픈 죽음이 되어야 하는, 약간 모자란 동생과 자기를 그림자처럼 돌봐주던 오빠의 죽음이 그려지는 그 장면도 너무 허망하더라구요.

 

양경미: 감독이 죽음의 허망함을 보여주려고?... (웃음)

 

성진수: 그걸 노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뭘 의미하는지 궁금해지더라구요.

 

윤성은: 무협 영화가 다 죽잖아요.

 

성진수: 그런데 소위 말해서 하드보일드 느와르 라는 장르에서 꼭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의미 없이 죽어나갈 필요는 없거든요. 홍콩 느와르 영화에서는 진짜 많은 사람들이 총알에 쏘여 후르르 낙엽 지듯이 그냥 쓰러지만요.

박우성: 죽음 그 자체가 시각적인 구경거리죠.

 

성진수: 그런데 홍콩 느와르 류의 그런 죽음하고 이 영화의 죽음하고는 또 다르단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과연 이 영화의 주제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싶은 거죠.

 

박우성: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면 영화라는 매체가 시각적 매체이고 어쩔 수 없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로 돈을 버는 스펙터클 엔터테인먼트 이미지이기 때문에 폭력을 다룰 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련의 대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영화들을 보면 하나같이 폭력을 정말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자의식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고요. 물론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이 잔인한 이미지를 거리낌 없이 보여주는 대가의 영화도 있겠지만요. 단순하게 말하자면 누군가의 훼손된 신체 이미지를 단순한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외화면 영역을 활용한다든가 롱쇼트로 빠진다든가 등의 방식 말이에요. <차이나타운>은 그런 세련된 시각성이 없어요.

 

박태식: 스콜세지 얘기하는 거 아닌가요?

 

박우성: 스티븐 스필버그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는 확실히 누군가의 불행을 오락 혹은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죠. 하지만 우리가 대가라 부르는 감독들의 영화에는 폭력을 어떻게 구경거리로 추락시키지 않고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와 관련된 진지한 고민들이 있어요. 하지만 <차이나타운>에는 폭력적인 이미지를 특별한 고려 없이 찍어서 선정적 시각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많고, 심지어 그 폭력 이미지가 서사의 빈곤한 논리를 눙치는 전략으로 동원된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윤성은: 저는 장르적으로 봤을 때는...

 

박우성: B급 무비는 아니잖아요.

 

윤성은: 전혀 아니죠. 저는 오히려 많이 순화시켰다고 봤는데, 이 영화가. 이 영화가 세련되게 다뤘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잔인하고 더 폭력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장면들을 많이 배제하고, 딱 몇 장면의 포인트를 줬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지금 말씀하신 그 두 장면. 왜냐 하면 장르적으로 봤을 때 훨씬 더, 예를 들면 미국 느와르 같은 경우 총을 쏘잖아요, 걔네들은. 총을 쏘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이 칼을 들이대가지고 피가 막 흥건하고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건 굉장히 청각적으로도 그렇고 굉장히 폭력적인 수위가 있는 거고.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약간 하드보일드의 비열함, 그런 것들이 느껴지면서 되는 건데 우리나라는 그런 종류의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칼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실... 뭐 예를 들면 이때까지 나왔던 영화들, 이 영화를 보고 <아저씨>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뭐 그런 종류의 영화들보다는 저는 훨씬, 횟수로 봤을 때도 그렇고 덜 사용... 오히려 저는 볼펜 같은 경우 볼펜이 무기로 사용되어가지고 그렇게 죽게 되는 이런 것은 쫌 뻔한 방식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성진수: 그 장면 전까지 약 먹어야 되는 그 모자란 친구가 그렇게 뛰어난 무공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어요. (웃음) 그제야 ‘저 친구가 저렇게까지 그 가족에게 필요한 이유가... 아, 그래서 쟤가 하는 일이 그거였구나...’ 그런 것들을 알게 되는데, 이게 또 피식 웃음이 나오는 지점이죠. 영화는 그 인물에 대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 준 게 없었던 거에요, 영화가 거의 끝날 때 까지.

 

박태식: 영화에서 하드보일드로 보기가 좀 힘들었던 부분이뭐냐면 하드보일드의 공식 같은 게 있잖아요, 우리한테는, 이래야 된다는 것. 그게 우리는 많이 익숙해져 있는데 그게 약간 빗나갔어요. 이게 아직 감독이 아직 내공이 그쪽에는 덜 쌓였는데 애들이 죽을 때 꼭 한 마디씩 하고 죽어요. 그거 혹시 아셨어요? ‘야, 엄마한테 잘해줘야 돼’, 그리고 야구방망이로 죽는 애가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겠니?’, 또 얘 죽을 때도 목을 따니까 그 처참한 눈빛으로 막 쳐다보고. 그래서 말하자면 분명한 건 이 감독이 하드보일드를 좋아한 건 사실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사람이 아직 대가는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아직 높은 경지에는 오르지 못했고 뭔가를 하고 싶고 그리고 거기서 목을 따는 거 있잖아요? 김혜수 목 따는 거. 요새는 영화마다 나와요, 그게. 목을 딱 날카로운 걸로 갑자기 휙 하고...

 

박우성: <써니>에서도 나와요. <써니>에서 천우희가 연기하는 인물이... 

 

박태식: 저기서도 나왔어. <풍성>인가? 왜 그 중국영화 있잖아요. <바람의 소리> 안 봤어요? 그 스파이 영화. <바람의 소리>라는 거 안 봤어요? <풍성>(같은 영화). <바람의 소리> 그거 꼭 보세요. 공산당 정권을 합리화하는 그런 영화에요. 그런데 거기도 목 자르는 게 나와요. 등등. 그래서 이 사람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생각은 나이가 좀 어려서 그런... 나이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박우성: 나이의 문제는 아니죠.

 

박태식: 뭘 하나를 하더라도 깊이 있게 집중해서 하는 능력이 아직 좀 떨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는 하드보일드로 보기도 좀 약하고,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하는 그런 내면적인 논리 구조나 이야기 구조를 찾아내는 것도 썩 그렇게 멋있진 않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괜찮게 봤어요. 왜? 우선 재미있게 봤어요. 영화를 볼 때 어쨌든 간에 재미는 있었어요.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그런 재미도 있었고 그리고 오랜만에 여성 둘의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그걸 조합한 것도 괜찮았고. 김혜수가 옛날에 어린이 잡지 표지모델인가? 잡지 표지모델인데 이상아니, 김희애니, 또 누가 있었지? 이미연. 다 그랬는데, 얘는 그래도 꾸준히 발전하는 타입 이에요. 계속 연기를 하면서. 그래서 이 사람이 그래도 좀 잘 하는구나, 아직까지는 그래도 좀 매력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그런 게 좀 남아있긴 하더라고요, 연기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는 겁니다. 그리고 김고은이라는 배우는 <몬스터>? <몬스터> 봤어요? 난 <몬스터>도 재미있게 봤어요. 오히려 나는 <은교> 보다는 그 쪽이 좋더라고요. 그러니까 내 눈에 띄는 건 3번째예요. 뭐 다른 작품도 있겠지요. 이게 가능성이 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김고은은. 어쨌든 간에.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말라고는 못하겠어요. 한 번 영화를 보겠다고 그러면 극구 말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박우성: 예, 저도 뭐...

 

박태식: 그래, 한 번 보긴 해라. 그런데 정신 차리고 봐라, 이런 얘기는 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의 겉멋에 너무 빨려 들어가지 말고 좀 약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게 어떻겠느냐, 그런 말은 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기본적으로 윤성은 선생님 말씀에 동의해요. 나는 이 영화는 어느 정도는 잘 만든 영화 같아요.

 

박우성: 예, 저 역시 가능성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하지만 여전히 간과할 수 없는 아쉬운 지점도 있다는 의견이에요. (웃음) 시도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그 시도의 효과적인 극화는 하고 싶은 것의 절제에서 나오기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것과 관련된 균형감각이 부족하다는 말이었어요. 영화는 기본적으로 세 개의 선, 즉 인물의 내면의 선과 사건의 선과 카메라의 선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이 선들이 좌충우돌하는 거죠. 절제에서 나오는 정리된 선이 보통 감독의 개성과 연결되는데, <차이나타운>은 그런 선이 정제되지 않고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 매력적인 개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부족하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좀 전에 이것에 대한 개성적인 정리가 뒤따른다면 차기작을 충분히 고려할만 하다고 말한 거고요.

 

박태식: 흥행은 좀 되고 있어요?

 

박우성: 예, 100만 이상 갈 것 같아요.

 

박태식: 그래야지 다음 영화가 나오지요.

 

박우성: 제가 진짜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영화 외적으로 좀 말씀을... 이 부분도 얘기를 해야 하는 게 CGV, CJ가 아트하우스도 점령을 했구나.

 

모두: 맞아요.

 

박우성: 원래는 독립영화 혹은 다양성 영화를 위해 상영관을 보장하라는 게 수직계열화를 비판의 기본 취지였는데, 이것에 대한 대기업의 응대 방식이 상영관을 보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다양성 영화마저 제작해버리는 것으로 나아갔어요. 겉으로 볼 때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은 이것은 한국영화시장에서 유통되는 모든 영화를 점령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하잖아요. 다양성 영화조차 대자본이 정의내리고 진단하는 시스템을 기어이 완성했다는 그 첫 번째 근거가 <차이나타운>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지 좀 무서웠어요. 대기업의 눈치를 덜 보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조차 이제 대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랄까요.

 

박태식: 그걸 보고 갑질이라고 하지 않나요?

 

박우성: 완벽한 갑질 같아요. 지금 대부분의 스크린을 대기업이 수입한 <어벤저스2>가 점령하고 있는데, 이것이 내려가면 그 스크린에 이제는 그 대기업이 만든 <차이나타운>이 다양성 영화라는 명분으로 들어가게 되겠죠. 상황이 이러할 때 일테면 대기업의 자장 안에 들어가지 않는 일테면 <약장수> 같은 영화는 최소한의 상영 기회조차 박탈당하겠죠. 사실 수직계열화에 대한 비판은 정말 지겨워요. 10년 전부터 계속 해 온 말인데,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게 없고 오히려 악화일로인데, 그것을 비판하는 말들만 지겨워지는 느낌까지 들어요. 막강한 자본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양경미: 칸느에 갔네, 누구, 누구 감독까지 영화를 보고 호평을 했네. 홍보차원에서 자꾸 이슈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게 너무 보이더라고요.  마치 독립영화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은 CJ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고 홍보하고 역시 자신의 극장에서 상영하는 게, 일반 상업영화랑 다른 게 없잖아요, 제작비만 적게 들었다 뿐이죠.

 

박우성: 상업영화뿐만 아니라 예술영화도 찍는다는 속빈강정 식 대의를 과시하는 것이겠죠.

 

양경미: 결국, 돈 없는 영세한 제작사, 그리고 독립예술 영화 제작사들은 CGV 아트하우스에 또 그렇게 밀려나겠죠.

 

박우성: 언론에서 수직계열화 관련 비판을 공론화시키면 그때는 어떤 특단의 조치를 내릴 것처럼 하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돌아보면 언제나 겉모습과는 달리 독점적 상황의 강화로 귀결되는 게 문제에요. CGV아트하우스에서 만든 영화들이 나름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다는 것은, 이제 영화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대기업의 손에 들어갔다는 증거일 테니까요. 영화산업의 맥락에서 <차이나타운>은 대기업 독점의 마침표를 보여주는 징후일 수도 있겠어요.

 

박태식: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슬퍼지는 거죠.

 

박우성: 슬퍼지는 거죠. 

 

윤성은: 나는 너무 슬펐어요. 다른 의미에서...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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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우성: 과장하자면, 생존 전략이 없으면 죽는 처절한 시스템을 냉엄하게 조망하는 <차이나타운> 같은 영화가, 실은 그 비판하는 시스템의 속에 들어가 일정부분 혜택을 봐야만 제작, 투자, 상영될 수 있는 서글픈 상황인 거죠.

 

윤성은: 아, CGV 안에?

 

박우성: 예.

 

윤성은: 그런데 어쩌겠어요. 지금 한국에서 영화 만들려면...

 

성진수: 그런데 평론가들의 생태계도 그런 면이 있지 않나요? 일부 GV 같은 일거리 들이 CGV 아트하우스에 연계되어 있기도 하고...

 

박우성: 그러니까 어떤 영화를 마음껏 소신껏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죠. 뭐 이것은 다들 알고 있는 상황이잖아요. GV는 홍보사와 연계되는데, 영화를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할 전문가들이 그 홍보사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는 형국이잖아요. 물론 그렇다고 할 말 못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자기검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에요.

 

윤성은: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왜냐면 GV 진행은 미리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이 하시는 분들은 영화를 보기 전에 몇 편을 한꺼번에 계약 하잖아요.

 

박우성: GV가 미리 결정된 후 영화를 보는 것이 영화에 대한 객관적 판단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는 원론적인 얘기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윤성은: 그런데 GV라는 건 전 그렇게 생각해요. 거기 가서 비판을 하는가, 안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고 영화의 맥을 집어주는 역할을 하는 거니까, GV 진행의 역할을 생각해야지 그렇게 일방적으로 판단할 일은 아니라고 봐요.

 

양경미: 모든 영화에는 장단점이 다 존재하죠, 당연히 GV를 할 때는 단점도 짚어주겠지만 장점을 위주로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겠어요?

 

성진수: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나 그것을 해설하고 연구하는 사람에게나 영화가 생계이기도 하니까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한국 영화 생태계가 좋은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상황은 아닌 것 같네요.

 

지금까지 <차이나타운>의 영화의 내용부터 외적인 것까지 얘기를 나눴는데,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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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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