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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영화적 섬광에 관하여

<해무>, 망망대해에 떠 있는 영화적 섬광에 관하여 (*스포일러 있음*)

 

영화평론가 이수향

 

영화라는 유기체와 사회적 의제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손을 떠나면서 온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완성한다. 그리고 그 완결된 형태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가지게 된다. 대중상업문화의 한 분야인 영화역시 예외는 아니다. 작품이라고 칭할 만한 영화가 손에 꼽을 정도라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영화 역시 완성이 되어 관객에게 보이고 나면 창작자의 손에서 떠난다. 정말 좋은-오래도록 남을만한 영화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감독이나 배우들의 의도나 노력도 완성된 작품에는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영화는 그 자체로 새로운 유기체가 되어 자신만의 구조와 서사, 미장센과 유의미함을 증명해내어야 한다. 그리고 때로-역시나 창작자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한 예술 작품은 한 시대의 한 문제적인 지점과 만나 반짝이는 섬광을 갖게 되는 수도 있다. 이것은 사회적 의식이 있는 척, 젠 체하는 꼰대의식이나 화제몰이를 해서 상업적인 성공에 도움이 되려는 유치한 노림수로는 될 일이 아니다. 다소 낭만주의적으로 말하자면,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 불확실성의 세계, 게다가 영화라는 장르는 유난히 알 수 없는 측정 기구인 불특정 다수라는 관객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은가.

안되는 게 없을 것 같던 이 21세기의 한 복판에서 고작 배 하나를 건져 올리지 못해 발만 둥둥거렸고, 결국 그 참혹한 죽음 앞에서 모두가 숨죽였던 2014년 전반기를 거친 상황이었다. 100여일이 지나고 이제 애도와 묵념의 시기를 거친 극장가는 모처럼 대작들이 활기를 띠었다.

, 여기서 잠깐 질문해 보자. 일개 상업영화에 사회적 의제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혹은 과연 그런 게 사실이기는 한가? 그냥 영화에서 아무렇게나 던진 대사인데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아닌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방식으로든 영화에는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의식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이는 감독이 의식 있는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단지 영화라는 장르의 본령이 가장 시대 반영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그려야만 영화적 개연성이 실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영화 속에 그려질 수밖에 없다. 다만, 영화가 실제 기획되고 촬영된 시점에서의 문제의식과 영화가 개봉될 당시의 상황은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의식적인 부분은 상황적인 설정이나 감정적인 차원 정도로 다소 애매하게 처리되기 마련이다. ‘나라-기득권자-권력-돈 있는 자-지배체제를 문제의 근본악으로 설정하고, ‘백성-민중-국민-약한 자-힘없는 자-돈 없는 자를 상황에 내던져진 자이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자들로 설정하는 것은 몇 년 간의 한국 영화, 아니 언젠가부터 한국영화의 주요한 공식이다. 이러한 공식은 작금의 비극적인 현실과 맞물려 더욱 폭발력을 발휘하는 방식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응하는 여름맞이 빅 4의 향배는 어떠한가.

막대한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인 이 작품들의 면면에서는 창작자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어쩔 수 없이 당대적인 문제의식이 투영된 흔적들이 발견된다. 그것은 <군도-민란의 시대>처럼 밸런스의 문제로 주객이 전도되기도 하고, <명량>처럼 결국 한 시대의 영웅적인 회고담으로 추억되기도 하며, <해적>처럼 느닷없이 원하지 않는 임금이 세운 나라가 내 나라가 맞느니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라느니 하는 뜬금없는 대사로 어색한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결국 이 영화들이 가지는 한계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창작자 자체 내의 치열한 탐구정신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전 해에 있었던 사극장르의 인기와 <변호인>류의 사회적 의제를 지닌 작품이 거둔 성공에 일정 부분 의존한 채 기획된 것에 기인한다. 각각의 장점을 지닌 이 영화들은 정면돌파처럼 보이든,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든, 아니면 짐짓 딴 얘기를 하는 척 하든지 간에 결국 현재 우리의 사회심리적인 문제, 그 우울한 페이소스의 깊은 심연에는 다가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위기 그리고 영혼을 잠식하는 해무

어두운 밤, 풍랑이 이는 밤바다에 어선 한 척이 위태롭게 항해하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는 뱃사람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식사 준비를 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이에 걸맞는 음악과 함께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잔잔하게 안개가 깔리면서 해무라는 타이틀이 스크린에 떠오르고, 안개가 깔리듯 흐릿하게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금 위태로운 항해를 하는 배가 등장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우리는 느끼게 된다. 망망대해에 가녀린 듯 유연한 몸집으로 풍랑을 거스리고 있는 저 배가 고립되었다, 고로 외롭겠구나라는 것, 그리고 저 배는 지금 위기상태이겠구나 라는 것.

이 영화의 위기 상황은 두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첫째, 경제적 위기가 온 나라를 휩쓸던 1998‘IMF’외환 위기 당시의 지방 소도시 여수라는 배경. 나라가 금융 환란상태라 생산과 소비가 원활할 리 없고 그런 이유로 도시뿐만 아니라 어업을 주로 하는 어선들의 생계가 용이할 리 없다. 아마도 늘 앞으로 나아가라고 지었을 이름인 전진호도 더 나아가기 어렵게 된다. 이미 낡은 배와 쌓여만 가는 부채는 이 배를 목숨처럼 아끼는 선장 철주에게 모종의 결심을 하게 한다. 두 번째 위기는 철주가 어렵게 시도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전진호가 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는 상황이다. 이러한 위기 상황은 이 영화를 단순히 스릴러적인 서스펜스에 오락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인 정서적 반응을 야기한다. 이 영화의 리얼리티적인 힘은 앞선 세 작품과 가장 구별되는 뚜렷한 장점이다. 이는 장르적인 차이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 사극은 장르적으로 먼 과거의, 끝나버린 이야기라는 거리감 때문에 영화 내적 상황에 대한 몰입도에 한계를 가지고 관객들에게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그에 비해 이 영화가 가진 리얼리티의 힘은 단순히 당대를 사실적으로 잘 그려내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비교적 근거리의 과거-‘IMF’라는 매우 돌출한 경험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역사적 경험이 실제 관객들이 몸소 돌파해 온 현실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현실을 거의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표현으로 보여주는 매우 어두운 이 영화의 파동은 너울 치듯 관객의 정서에 직접적으로 와 부딪힌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영화적 현실은 영화 밖의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영화 자체에 그늘을 드리우는 것이다. 이는 세월호 참사을 통해 바다에 대한 착잡한 심정과 거기에서 연유하는 두려움이나 불안함 같은 것들이 채 가라앉지 않은 작금의 상황이 어쩔 수 없이 투영된 결과인 것이다. 그 불안함은 뭍-땅에 안정적으로 발을 딛고 있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좌표를 알 수 없는 그리고 배를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는 환경적인 불안함과 같이 배를 탄 사람들을 점점 믿을 수 없게 되는 상황, 그리고 어느샌가 스며들어 사위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드는 해무가 주는 고요한 잠식에 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 불안함이 돌올하게 된 것은 어창에서 뜻하지 않게 밀항자들이 전멸한 일에서 발생한다.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사건은 벌어졌고 그럭저럭 밀항에 성공해서 생계를 이어가려던 그들 양자(선원들-밀항자)의 소박한 바람은 산산조각이 난다. 선장 철주는 오랜 경력의 뱃사람이고 늘 그렇듯 폭력과 위압을 사용하여 상황을 무마하려 한다. 그리고 선장의 지시에 따라 선원들도 사건을 수습하려 애쓴다. 사건은 아무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처리된 것처럼 보이고 전진호는 다시 평정을 되찾은 듯 보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라고 서로에게 다짐해봤자 결국 그렇게 처리되고 끝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 전진호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 낡은 배는 수리할 수 있고 기관실의 엔진은 새로 갈면 되지만, 그 배 안에서 벌어진 무구한 목숨들의 값은 지우고 덧칠한다고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떼어낼 수 없는 이물감 같은 것이 전진호를 에워싸고 결국 이 배는 깊은 해무 속에 길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물적인 것의 침입과 흔들리는 전진호

이물감. 그렇다. 문제는 이물감이었다. 선장인 철주가 고기잡이 대신 밀항자를 실어나르기로 결심하는 순간 이미 전진호는 오래도록 유지해온 안정감에 틈이 생긴 것이다. 더구나 뱃사람들의 일은 그 험난함의 특성 때문에 때로는 자부심이, 때로는 금기와 무속적인 요소가 지배하는 세계가 아닌가. 철주가 영화 내내 강조하는 것도 배를 같이 타는 우리 형제(선원들)와 저들(배 외부의 사람들인 밀항자들, 공무원 등)을 구별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가 재수없게 여자를 태웠다고 분노하는 것 역시 단순한 여성비하적 발언이 아니라 오래도록 조심스레 지켜온 금기와 질서의 흐트러짐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철주에게 전진호는 절대적이다. 아내가 있으나 멀리 나간 남편을 살뜰히 기다릴만한 여자가 아니어서 모처럼 만의 육지행에서도 바로 배로 돌아와 선장실에 몸을 뉘일 수밖에 없는 것이 철주의 삶이고 보면, 그에게 전진호는 여기에서만은 주인이고 대통령일 수 있는, 그의 지나온 세월을 쏟아 부은 곳이자 갈 곳 없는 그의 마지막 종착지 같은 곳이다. 그러므로 철주에게 전진호는 감척사업을 통해 폐선을 만들어 고금리의 돈을 받는 것이 더 이익이라해도 포기할 수는 없는 자기 삶의 전부인 것이다. 그렇지만 금융위기의 나라에서 낡은 어선과 그 어선의 선장은 이미 폐기를 향해갈 수밖에 없는 소용돌이 안에 있는 것이다. 철주 역시 그 흐름을 알면서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밀항업자의 예언대로 배를 버린 선장은 더 이상 주인이지 못하고, 공사판에 날품팔이로 남아 화려한 세월의 후일담만을 되뇌일 수 있을 뿐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것이 더 현실적인 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를 버릴 수 없었던 철주는 주인됨을 유지하기 위해 전진호본령과 금기를 위반하게 되고 이는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창 사건 이후, 인정많던 기관장 완호’(문성근)가 단 시간에 미쳐버린 것에 비해 다른 인물들은 비교적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어창사건 이후, 선장 철주도, ‘창욱’(이희준), ‘경구’(유승목)도 심지어 막내인 동식(박유천)까지 그들이 감지하지 못했을 뿐 미쳐가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너무 힘든 일들을 겪으며 서둘러 봉합했지만 그 미봉책은 필연적으로 외상을 남기게 되고, 그 외상은 각자가 몰두하는 대상에의 광기어린 집착으로 나타난다. 철주가 배를 지키기 위해 점점 광란의 행각에 몰두하는 동안 창욱에게는 그 대상이 섹스이고, 경구에게는 돈이고, 동식에게는 홍매였을 따름이다. 모두 어느 정도씩은 제정신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들은 이미 공동운명체였던 것이다.

 

의지의 맹목성에 대한 윤리적 시선의 문제

영화의 후반부에서 잔인무도한 선장 철주와 선한 의지의 동식은 뚜렷이 대비된다. 그런데 매우 이상하게도 철주와 동식이 고투하는 과정은 똑같이 폭력과 살인으로 점철된다. , 두 인물의 선악의 여부와 관계없이 폭력과 살인이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제각기 목적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철주는 살인귀로서 절대 악이고, 동식은 선인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영화가 여타의 대중 영화와 매우 다르게 취하는 윤리적인 시선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 동식 역시 배에 대한 맹목적인 목적으로 살인을 일삼는 철주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처음엔 선장의 시체 치우기에 동참하고 점차 다른 선원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결국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살인도 저지르게 된다. 그 두 사람의 행각은 매우 닮아 있고. 이 때문에 이 영화는 결국 그 의도를 떠나 맹목성의 관점에서 행사하는 폭력에 대한 윤리적인 질문을 환기시킨다. 쉽게 말해 선한 의지를 이루기 위한다는 명목 하에 사용되는 폭력성에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진짜 선인에 가까운 사람은 밀항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처지에 동감(sympathy)하며 그들의 억울한 죽음에 이르러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놓아버린 완호일 것이다. 우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알게 되었듯 선한 의지는 결코 잔혹한 현실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미쳐버린 완호는 이 영화에서 매우 예외적으로 자신의 선한 판단을 끝까지 지킬 수 있었던 경우에 속한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 다른 차원에서 타인에게 흘리게 한 피는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됨-징벌받게 됨을 알고 있다. 결국 동식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윤리적인 시선이 결국 동식의 행위에 징벌을 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남은 동식에 안도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배를 포기하지 못하고, 가라앉는 배에서도 마지막까지 자신의 행동의 당위성을 철회하지 않는 철주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우리는 감정적인 파동을 느끼게 된다. 죽음 앞에서도 전진호를 포기하지 않는 그의 광기어린 행동이 악한 것임을 우리는 모두 인식하고 있지만 그 맹목적인 태도 자체에 대한 윤리적 감각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애정이, 자신의 일에 대한 맹목적이고 당위적인 태도가 이제는 가능한가.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고 배에 대한 애정도 없이, 남은 사람들을 묶어두고 달아나는 선장이라는 삼류영화에서나 가능한 설정이 현실인 되어버린 상황에서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해오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또 그것으로 존중을 받는 일이 이제는 더 개연성이 없는 상황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개인의 윤리감각에 물을 일이 아니라 비정규직이라는 구조와 이윤 향상을 위한 규제 철폐라는 시스템의 문제에 돌릴 일이다.

그렇다면 IMF에서 시작된 이 영화는 매우 역설적인 방식으로 앞으로 펼쳐질 디스토피아적인 상황을 예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영화는 비슷한 상황이 일어났을 때 배와 함께 운명을 같이하고 결국 같이 소멸할 선장이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움을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묘파하는 작품일 수도 있는 것이다. 배의 선장이자 주인이고 대통령이었던 사람이 이제 몰락하면 사회의 밑바닥을 맴돌 뿐이라는 밀항업자의 예언은 결국 동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남겨진 자들의 삶

배가 부서지고 겨우 살아남은 두 사람인 동식과 홍매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선한 의지를 가졌다고 설정되고 비로소 구원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홍매가 결국 떠날 수밖에 없었던 저간의 사정은 이 영화에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가 추측 가능한 범위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너무도 험악한 일을 겪었고 그 일은 그들의 삶에 거대한 공동(空洞)이 되어 평생을 떼어낼 수 없는 이물질 같은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 일은 더 이상 이전의 순박하던 동식과 홍매의 삶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게 할 것이다. 이런 모든 일들은 그들이 함께 하는 순간 내내 서로를 볼 때마다 떠오를 것이고, 이를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사랑하며 웃고 살아가기에는 둘은 너무 많은 빚을 바다에 남겨두게 된 것이다.

영화의 말미인 6년 후는 경제위기가 많이 극복되었다고 하는 시기이자 한 여자가 아이를 두 명 정도 낳고, 한 남자는 여전히 쓸쓸한 눈빛으로 공사장을 떠돌아다닐 만한 시기일 것이다. 홍매를 먼저 알아본 것은 동식이지만 여전히 동식의 음식취향을 상기하는 홍매에게는 그의 흔적이 남았음을 알 수 있다. 문득 밀물처럼 들어와 삶을 잠식했던 사랑이 이제는 썰물처럼 빠져나갔지만 동식과 홍매는 각자의 삶을 견디어 나가는 방식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 것이다.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 이 영화의 기획이나 스토리 어디에도 근자에 벌어진 참사를 상기하거나 환기하려는 의도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창작자의 손을 떠나 하나의 유기체로 완성되고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도 모르는 새에 한 시대의 그림자 혹은 그늘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해무에 쌓여 망망대해에 불안하게 떠있는 전진호의 한 한 스틸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뼈아픈 현실을 응시하는 한 표정으로 남게 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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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이수향

등록일2014-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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