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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스릴러라는 불가능한 이름을 넘어서서, 예술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을 촉구하는 자리로” - <108: 잠들 수 없는 시간>


 

“창살 바깥을 향해 시선을 외우 돌리기”

영화의 마스터쇼트는 반복강박적인 사운드들이 빚어내는 기묘한 형질의 몽타주 그리고 그와 맞물려 얽어지는 모호한 시각표상들의 중첩으로 구성된다. 먼저 끊임없이 헛도는 레코드판의 소음과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규칙적 반복음의 반 박자 즈음 지연된 교차가 이질적이면서도 불가해한 감각을 다분히 증폭시킨다. 곧이어, 어찌나 오래도록 한 자리에 앉아 빗질만을 계속했던지 연거푸 끊이지 않는 손놀림 가운데서도 머리에 파리가 버글거리는 노파의 모습이 아울러 겹쳐진다.

물론 이물감의 정점은 노파를 비춰 투영된 거울상에 작중인물의 모습이 현상되는 장면에 놓인다고 할 테다. 이로써 꿈틀대는 불안정과 불투명함의 지각은 극대화되고, 모든 명석판명함 내지는 견고한 확신 따윈 일말의 여지없이 공중으로 흩어져 버린다. 뜨거운 물속에서 물크러지다 못해 풀어져 그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작은 비누조각처럼 말이다. 사실 그 뿐만은 아니다. 이와 매한가지로 영화의 면면을 통해 산발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건 도대체 어찌해야할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도록 만드는 짙은 착란의 경험이라고 하겠다.

 

스릴러라는 이름의 감옥. 전신의 감각들과 사고의 줄기들을 일제히 마비시키는 압도적인 무질서의 현전 앞에서, 자칫하면 잊어버리고 또 잃어버리기 쉬운 게 하나 있다. 그건 착란의 기원인 동시에 그 동력으로서의 ‘무엇’이다. 설령 무제약적인 혼돈(chaos)으로 여겨지는 것 한가운데서마저도 낱낱의 파편들을 잇는 개연과 필연의 법칙은 발견할 수 없을지언정,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작용하는 질서와 패턴을 어느 정도 짐작해보는 건 가능하다는 교훈을 여기에다 접목시켜봄이 혹 어떨까 싶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핵심을 놓쳐선 안 된단 뜻이다. 온 신경이 일상적 흐름으로부터 탈구되고 예상 가능한 관념의 덩어리들이 여지없이 와해돼버리는 영화적 경험 가운데서도 ‘본시 텍스트가 현출하려고 의도한 게 과연 무엇일까’ 발굴하려는 주의 깊고도 끈덕진 안목이 요청된단 뜻이다.


“강박적 욕망, 움킬 수 없는 것, 예술의 역능”

금단의 열매를 끝내 멀리하지 못해 화를 자초했다던 태고의 기억처럼, 모든 것을 손아귀에 움키고 거머쥐려는 욕망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진 생래적인 지적 충동 또는 확실성에 가닿고자 하는 본원적인 갈망과 관계하는 것일 수 있다. 더러는 미답의 땅에 대한 정복욕이라든지 미지를 좀체 용인할 수 없는 끝없는 목마름과 같은 표현으로 정리해보는 편이 좀 더 옳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일 ‘그 어떤 앎의 대상’이라는 게 본디부터 정식화된 지식의 형태로 말끔히 환원될 수 없는 소위 부정(否定)의 성격을 가진 것이라면 과연 어떨까?

아무래도 그처럼 비정형적인 무엇에 다가서는 방식이라면 일반적으로 시도되는 방법론들과는 조금은 그 결을 달리하는 것이어야만 할 터이다. 허다한 지식인들이 오래도록 예술에 목매온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하겠다. 예술의 앎은 순전히 관념적 틀거지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진 않는 경험적인 앎이요, 또 예술의 진리는 체험의 세례를 경유해야만 비로소 온전히 형상화될 수 있는 체현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논의의 수월한 진행을 위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남아 있다고 할 테다. 이른바 부정성을 그 속성으로 머금은 허다한 것들 가운데서도 당당히 으뜸을 차치하고도 남음직한 게 이를테면 ‘표면화된 인간의식의 기저영역’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인류학적이고 문화사적인 견지에서, 예술이 오래도록 ‘이 무한의 지형을 탐사할 임무와 사명’을 도맡아 온 건 분명 우연함이 주축이 돼 부린 마술의 결과는 아닐 터이다.


“반(反)예술과 예술, 그 사이에서의 서성임”

허나 본 영화는 대개의 예술 텍스트들이 으레 그래왔듯, 그저 ‘심원한 지평에 대한 탐문’ 차원에서 그치진 않는다. <108: 잠들 수 없는 시간>(이하 <108>)의 특이점은 이 탐문의 한 방식으로써 지니게 되는 자연적인 가치보다는, 되레 그 탐사의 ‘과정 자체’를 쪼개어 밀도 있게 들여다봄으로써, 여간해선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예술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지는 자리로까지 존재자들을 추동하고 견인하고 있다는 데에 찍힌다고 하겠다. 더불어 바로 이것이야말로 스릴러라는 국부적 표면에 빠지게 될 때엔 쉽사리 감지할 수 없게 되는 ‘텍스트의 은밀한 속삭임’과 관계하는 지점이 된다.

다른 무엇보다 <108>이 가진 대단히 특별한 측면을 하나 꼽아봄으로써 이야기를 계속해서 풀어가 보고자 한다.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는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사실 이 영화 텍스트에 현상된 ‘예술적인 탐사의 과정’이란 게, 실상은 ‘전혀 예술적이지가 않다는’ 점이라고 하겠다. 어쩌면 그건 차라리 실험관찰이라는 자연과학의 일반원칙을 따른다고 술회하는 편이 한결 더 옳은 판단일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예술은 본인에게 철저히 귀속된 것으로 간주되는, 그리고 온전히 통제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는 의식적 세계의 덧없음과 그 한계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의 실재를 긍정하는 자리를 향해서 나아간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이 나아감의 방식’에 있다. 환언할진대, 이 방식이야말로 기실인즉 예술의 예술다움을 지탱하는 본령에 해당하는 셈이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예술의 나아감이란 다름 아닌 의식세계의 틈새(diastema)이자 사이공간(in-between)에서 번쩍이는 실재를 통찰하는 선견자적 직관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발짝을 내딛을 발판조차도 부재하는 무한의 영역 속으로 직접 존재를 던져 넣어 방기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멀찍이 한 걸음을 떨어져서 그 반응을 기록하며 관찰하는 실험관찰의 방법에 기대는 건 결코 아니란 뜻이다.

영화 속 비유를 고스란히 따른다면 다음과 같이 해설해보는 일도 가능할 터이다. 작중인물의 목에 걸린 로켓(자의식)은 쉽게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질 만큼이나 불안정하고, 로켓에 담긴 분필로 그려낸 영역과 그 경계라는 것 역시 기실은 본인의 믿음과는 달리 대단히 흐릿한 것에 불과하다는 점엔 의심의 여지가 없겠다. 그렇다지만 적어도 예술의 기획을 따른다면, 그 선 바깥으로 강제로 존재를 이끌어내선 안 된다. 더군다나 모르모트의 행동관찰에나 동원됨직한 ‘108시간의 실험관찰’을 적용한단 건 더욱이나 안 될 말이다. 그런 건 예술의 방법이 아니다.

예술적 대상에 예술적이지 않은 방법을 접목시킨 결과를 가늠해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통상적인 행동관찰을 시도할 때완 달리 이런 경우라면 변인의 예측과 통제가 좀처럼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반드시 고려돼야만 할 테다. 영화는 이 점을 여실히 확증해준다. 피실험자는 물론이거니와 실험자(알마)조차 끝내는 안전할 수 없었다는 점이 문제에 대한 피해갈 수 없는 증언이 된다. 예술적이지 않은 기획을 통해 예술의 눈이 가닿는 자리로 돋움하려 한 무리한 시도가 빚어낸 결과라고 정돈해본다면 큰 무린 없을 테다. 하지만, 텍스트에 현상된 문제가 비단 그것 하나만은 아니다. 실험공간의 내부지형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안전한 실험이라서, 더러는 지극히 까다로운”

관객들은 멀찍이서 실험대상(비앙카)을 바라본다. 실험실(무대) 너머의 영역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조심스레 관찰하며 그녀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촉지적으로 인식한다. 바로 이 국면을 곰곰이 되씹어보아야만 할 테다. 물론, 알 수 없는 세계에 어떻게든 가닿고자 하는 열망 그 자체를 그르다며 다그칠 순 없을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그것을 타자를 통해 확인하고 싶다는 바람마저도 그렇게나 질이 나쁜 것이라며 폄훼할 수만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관객과 비앙카 사이에 놓인 ‘가름막의 존재’를 복기해본다면, 사태는 더는 간단한 일이 아니게 된다. 좀 더 자세히 풀어써 볼 수도 있겠다. 말하자면 무대와 그 바깥의 영역을 철저히 별개의 세계로 대별하고, 더불어 자그마한 눈구멍을 양편을 오갈 유일한 매개지점으로 상정하며, 나아가 개중의 어느 한쪽에게만 이 비수평적이고 관음증적인 시선의 권력을 허용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을 눈여겨보아야만 한다는 뜻이다.

 

기실상의 ‘안전지대 구축’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안전지대의 구축이라니? 그건 소극적으론 실험에 가까운 이 기획이 충분히 파괴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한 발 더 나아가선 그 폭력적인 기획에 스스로가 비교적 적극적인 동참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시하기도 한다고 하겠다. 반사적인 쾌를 누리기 위해서 말이다. 쉽게 말해, 동조자가 되길 택한 것이랄까. 보다 와 닿는 사례를 제시해볼 수도 있다. 가령, 두터운 방호복과 산소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오염물질이 들끓는 구역을 소요하면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자들에게 발생하는 신체적-정신적 변화들을 느긋하게 지켜보는 건, 스스로가 그 여정의 인솔자가 아니라 한들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할 테다. 그렇지 않다면 혹 단순히 무의지적 반응, 더러는 단순한 무지의 문제로 치부하고서 덮어둔 채 지나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그 두렴의 무게를 몸으로 체현했던 존재(마를레네)마저도 비앙카에게 엄습해오는 혼돈의 광시곡을 튼실한 방벽 뒤편에 숨어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가늠할 수 없는 무질의 공간 속에 직접 발을 들여놓는 것의 위험도가 어떠한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 그래서 한때 비앙카가 자신을 대신해서 무대에 서는 걸 적극적으로 만류하기까지 했음에도 돌연 전도된 자세를 취했단 뜻이다. 분명 그녀의 달라진 태도는 ‘의식적 동의의 표지’에 해당한다. 달리 설명할 길이란 없어 보인다. 아무리 불가지의 세계에 대한 존재자들의 욕망이 간절하고 한편으론 타당하다고 해도, 부정(不正)과의 악수까지 납득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실은 붙들고 고투해보아야 할 만한 지점이 하나 더 있다. 가지런히 정식화되지 않는 비정형 세계의 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감으로써 얻게 된 상처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단 점이다. ‘닫아걸 수 없는 세계를 열게’ 된다는 작중의 표현 그대로, 간신히 생의 위기로부터 몸을 구출해낸 비앙카는 5개월이 지난 후에도 미처 아물지 않은 딱지의 간질거림(딱정벌레의 출현)을 목도하게 된다. 지우려 해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존재 깊숙이까지 인(印) 박게 된 셈이라고 보는 편이 옳을 터이다. 과연, 상술한 문제들을 스릴러란 이름하에 다뤄낼 수 있을까?

 

“새로운 문제들 앞에 마주서서, 예술‘을/에’ 묻다”

혹자는 필자에게 불만을 표해올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저 ‘예술을 소재로 한 스릴러 영화’라는 말로 가볍게 정돈 가능하리라 짐작되는 이 영화에, 구태여 덕지덕지 많은 수사들을 덧대어 늘어놓은 까닭이 무엇이냐는 핀잔을 듣게 될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변명에 가까운 변호의 말을 덧붙이면서까지 강조를 거듭하는 까닭이란, 필시 그 이면의 세부를 들여다보는 게 충분히 유의미한 일이라는 확신 탓이다. 적어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그러하단 말일 게다.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108>은 여태껏 전통적으론 제기돼오지 않은 질문들을 예술을 향해 던지도록 만든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통상 예술의 가능영역과 한계지점이란 논제를 둘러싼 논쟁적 화두들은 ‘정도(limit)의 문제’와 ‘재현의 윤리’ 문제로 범박하게나마 갈무리될 수 있다. 달리 번역하자면 ‘과연 예술이 어느 지점까지 발화할 때에 그 타당성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냐 그리고 ‘본질적으로 재현의 구도를 벗어나기 어려운 예술이 윤리라는 차임벨을 건드리지 않는 범주 내에서 어떻게 눈앞의 살얼음판을 건널 수 있을 것이냐’ 정도로 갈음될 수 있는 게, 기존에 예술을 향해 던져져 왔던 주된 문제제기라고 정돈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108>의 세례를 경유함으로써 우리는 좀 다른 것들을 생각할 여지를 갖게 된다. 먼저는 예술이라는 것의 방법론을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문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기술과 문명의 발전에 의해 기존에 다가설 수 없었던 세계에 발 딛을 수 있는 길은 확장되고 경로들은 새롭게 확충되었다. 어쩌면 한시적으로 효력을 발휘하는 알약의 복용이라든지 간단한 기계장치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금단의 땅에 발돋움 하는 게 가능한 일이 될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분명 그런 건 기존의 예술이 지향하는 바와는 그 기원도 형태도 달리 할 터이다. 그렇담, 전연 다른 동력으로부터 발원하는 것을 예술의 영역 속에 스스럼없이 도입하고 지각없이 향유할 때 야기될 수 있는 문제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실험실 바깥으로 몰래 꺼내온 게 프로메테우스의 불이 아니라, 되레 모든 걸 사르는 모진 화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텍스트는 이에 대한 충분한 성찰의 근거를 제시해준다.

더불어 관람성과 ―넓은 범위, 그러니까 좀 더 확장된 맥락에서 예술일반의― 공연성의 관계에 대한 탐문 역시 필경 중요한 화두가 될 터이다. 기본적으로 양자는 상호관계를 전제로 한다. 심지어는 건조해 보이는 스크린 위로 현상된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나름의 표현된 의도를 머금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으며, 나아가 이것을 맞닥뜨리는 자가 품은바 내밀의 영역과 아울러 공명하게 됨으로써, 하나의 예술이 비로소 만 가지의 예술로 체현되는 현상학적 경험이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경험은 양측이 악수함으로써 맺어지는 ―이런 거칠고 느슨한 표현을 용납한다면― 인격적인 경험이다. 따라서 상호교감에 근거하지 않은 것, 양자가 격리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비소통적인 움직임, 더러는 공연자 스스로도 제어하기 어려운 몸부림을 멀찍이서 관망하는 쾌락행위를 예술의 향유로 간단히 등치하는 게 정말로 가능한 일일는지에 대해선 충분한 숙찰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특히 예술의 저변이 확대된 가운데 무엇이 예술이고 그렇지 않은지 답변하는 일조차 애매해지는 오늘의 국면이라면 말이다. 이는 분명히 새로운 종류의 윤리적 물음을 태동시키는 외면하기 힘든 근거조항이 될 터이다.

<108>은 보통은 떠올리기 쉽지 않은 지점들을 향해 존재자들을 끌어당긴다. 이처럼 텍스트가 부여해주는 독특한 반성적 지각의 계기들을, 아무래도 스릴러라는 협소한 단어 안에 온전히 눌러 담아내기란 조금 힘겨워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상당히 긴 지면을 할애해 선보인 해괴망측한 주석에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되었을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허나, 해석의 수긍과는 별개로 다소의 미심쩍음을 안겨다주었다면 그 나름대로 <108>의 기여는 확실한 게 아닌가 싶다. 불어넣어진 균열에 반응하는 미더움이란 각자에게 남겨진 문제일 터이니 말이다―.

글: 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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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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