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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훈] 코미디 거장의 엄숙한 치정극 - 영화 ‘매치 포인트’

 
 
1969년에 제작된 <돈을 갖고 튀어라> 이후, 우디 앨런은 반세기에 이르는 세월동안 거의 매년 한 편 (혹은 두 편)의 영화를 내놓으며 현재까지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그는 연출뿐만 아니라 매 작품마다 각본가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제작사의 간섭을 불허하는 고유한 편집권한을 지님으로써 자신만의 작가주의적 영화세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 그 가운데 2005년에 만들어진 <매치 포인트>는 전성기를 지나 잦은 부침을 겪던 우디 앨런에게 있어 중요한 분수령이 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매치 포인트>가 만들어지기 이전, 즉 2000년대 초중반은 우디 앨런에게 있어 일종의 위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2000년 이후에 개봉한 <스몰 타임 크룩스>, <제이드 스콜피온의 저주>의 실패, <애니씽 엘스>와 <멜린다와 멜린다>의 뜨뜻미지근한 반응으로 인해, 노년에 접어든 우디 앨런이 결국 매너리즘에 빠진 것이 아니냐는 성토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와중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배경이 어느 정도 작용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디 앨런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착안한 차기작의 배경을 뉴욕이 아닌 영국 런던으로 결정하게 된다. 이때까지 그가 뉴욕을 떠나 영화를 찍은 것은 96년 작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의 베니스 로케이션 촬영이 유일했다. 우디 앨런은 <매치 포인트>를 기점으로,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른바 '런던 4부작'을 연달아 내놓았고(<스쿠프>, <카산드라 드림>, <환상의 그대>), 스페인 바르셀로나(<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프랑스 파리(<미드나잇 인 파리>)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투 롬 위드 러브>)에 이르는 '유럽 방랑기'를 이어 나간다. 

<매치 포인트>와 우디 앨런의 전작들을 비교할 때,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전면에 내세운 계급갈등의 문제일 것이다. 뉴욕에서 제작된 우디 앨런의 영화들을 돌이켜봤을 때, 우디 앨런 자신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연기하였던 캐릭터들을 포함한 등장인물들은 대개 자신이 속한 계급적 자의식에 비교적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우디 앨런이 가장 자연스럽게 다루었던 부류는 뉴욕의 지식인 계층으로 대변되는 중산계급에 해당할 것인데, 그가 창조한 인물들은 미국사회에서 은연중에 만연한 경제ㆍ인종ㆍ종교적 계급문제를 농담조로 가볍게 건드릴지언정 이를 정면으로 공격하거나 전복시키려 하지 않는다. 

가령, <셀러브리티>에서 케네스 브래너가 연기한 속물적인 저널리스트는 자신이 처한 계급적 상황에 안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상류계층의 주변을 기웃거리는데, 다소 우스꽝스럽게 묘사된 그의 세속적인 열망은 도리어 그의 불행을 가속화시킬 뿐인 한낱 허영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결말에 이르고 만다. <스몰 타임 크룩스>에서 우디 앨런이 분한 '레이'는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좀도둑질과 강도행위 등으로 소일하는 아웃사이더에 가까운 인물이다. 레이 부부는 영화 속에서 뜻하지 않은 성공으로 극적인 신분상승을 겪게 되는데, 여기서 갑작스런 계급이동에 따른 문화적 혼란은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 영화는 물질적 성공이 반드시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다소 진부한 결론을 내놓는데, 여기서도 계급 간의 충돌은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고 부조리한 상황이 빚어내는 희극적 장면들을 유발하는 도구로써 주로 이용된다.

  
 
신분상승을 꾀하려는 노동ㆍ중산계급 청년의 파국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매치 포인트>는 런던이라는 동일한 배경을 두고 만들어진 <카산드라 드림>과 연관되는 지점이 있다. 물론, 현재까지도 계급사회의 잔재를 일부나마 유지하고 있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이기에 유독 이러한 갈등이 두드러진 측면도 고려할 수 있겠지만, <매치 포인트>의 경우 상류층과 하위계층을 뚜렷이 대비시킴과 아울러, 그 사이에서 인물들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非영국인(미국인인 '노라')의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계층 간의 묘한 대립구도를 설정한다.

영화의 첫 시퀀스, 네트를 사이에 두고 공이 오가는 테니스 코트 장면은 주인공 크리스(조나단 리스 마이어스 분)의 인생관, 더 나아가 우디 앨런이 자신의 전작을 거치며 설파해왔던 특유의 세계관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네트에 걸린 공이 어디로 떨어지느냐에 따라 득점과 실점의 향방이 갈라지는 결정적 상황. 여기서 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생이 인간의 의지가 뜻한 바대로 풀리지만은 않으리라는 우디 앨런 특유의 비관주의와 맞닿는다. 하지만 스포츠맨 출신인 크리스에게 있어 인생이란, 테니스 경기의 룰처럼 비교적 단순하고 뚜렷한 경로를 지닌 무언가에 해당되었을지도 모른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대등한 입장에 서서 똑같은 공을 주고받는 동등한 관계의 연쇄가 이 남자에게 익숙한 세계다. 하지만 테니스 클럽에서 부유층 출신의 톰과 그의 가족들을 알게 되면서, 크리스는 자신에게 익숙하던 세계-테니스 코트-의 문법에 차츰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가 발을 들여놓고 기꺼이 편입하려 하는 세계는 '공기총'의 논리로 움직인다.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성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목표물을 향해 총을 조준하여 발사하는 일방향적인 관계. 끈질기게 달라붙는 노라(스칼렛 요한슨 분)를 떼어놓는 극단적인 방편 또한 이 공기총이다. 크리스는 공기총으로 두 사람의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악행을 저지르지만, 이것이 자신의 본성과는 무관한 흉기임을 스스로 애써 납득시키려 한다. 하지만 공기총으로 대변되는 크리스의 일방향적 공격성은 노라와 대면하는 첫 장면에서 이미 드러난다. 재미로 시작한 탁구 내기에서 노라가 슬쩍 서브한 공을 강한 스파이크로 받아치는 크리스의 허세는 자기과시에 여념이 없는 야성적 수컷의 행태를 고스란히 표출한다. 그는 노라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일방향성-굳이 분류하자면 톰 가족이 속한 상류층에 대한 표상-을 끄집어내었고, 자연스레 점진적으로 이질적 계급에 편입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크리스의 살인행위는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에 있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연상케 하지만 하지만, 곤궁한 처지를 이기지 못해 범죄를 저지르는 라스꼴니코프와 달리, 인물의 사회ㆍ계급적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행되는 악행의 배경에 초점을 맞춘다는 면에서 우디 앨런의 88년 작 <범죄와 비행>이 떠오르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노라를 죽이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하숙집 여주인이 영화 말미 크리스의 환상 속에 나타나 자신의 죽음을 토로하는 장면인데, 크리스는 그녀에게 <죄와 벌>의 문구를 인용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때로는 위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무고한 이들이 희생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니….") 크리스의 환상 장면 말미에 노라는 그를 다그치며, 머잖아 경찰이 크리스의 덜미를 잡고 말 것이라는 엄포를 놓는데 이것은 그러한 발언을 한 당사자가 망자(亡者)라는 측면에서 자연스레 크리스의 파멸을 암시하는 예언적 성격을 띠게 된다. 바로 직후에 침대에서 각성하며 일어나는 경찰의 쇼트는 이러한 암시를 확신하게 하는 일종의 트릭으로 기능하는데, 여기서 우디 앨런 특유의 익살스런 비틀기가 등장한다. 크리스의 목을 죄어가던 경찰의 수사가 거역할 수 없는 '우연'의 힘에 의해 허무하게 끝을 맺고 마는 것이다. 우디 앨런의 세계에서 '우연' 혹은 '운'은 전통적으로 절대적 권위를 지녀온 '망자의 예언'마저도 비웃는 힘을 지닌다.

영화의 말미, 크리스는 노라를 죽임으로써 그녀가 임신한 아이마저 제거한 형국이다. 미국인 여성에게서 태어날 아이를 버리고, 영국의 상류계급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 되기를 선택한 크리스. 그는 숱한 피를 흘리며 신분상승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제 핏줄을 이어받은 생명의 탄생으로 자신의 지위를 더욱 더 공고히 하게 된다. 어찌됐건 그가 신분상승의 욕구를 현실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기막힌 운의 연쇄작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디 앨런은 이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자수성가와는 거리가 먼 계급사회 전체를 조소하려 한 것일까? 이 가련한 인물들의 조물주 격인 우디 앨런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법하지 않겠는가.  

글: 문성훈
영화평론가. 2015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 수상.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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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조회수6,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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