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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외계인’을 지배하는 몇 가지 방법

텍스트는 우리의 삶과 현실을 토대로 제작된다. 과거의 역사를 재구성하든, 미래의 세계를 허구적 상상으로 제시하든 그곳에는 우리의 기억과 꿈 그리고 당대의 현실 또한 반영하기 마련이다. 더구나 잘 만들어진 텍스트는 자신이 생산된 당대의 현실을 인식하게 하는 프레임들을 보여주고 초시대적으로 인류의 보편성을 담지할 뿐만 아니라 다가올 미래를 예언적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결국 모든 텍스트는 ‘우리-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닐 브롬캠프의 <디스트릭트 9> (2009)또한 그러한 영화 서사 가운데 하나이다. 이 영화는 헐리웃의 SF영화와는 사뭇 색다른 색채를 지녔다. 외계적 존재를 등장시켜 그것과의 갈등과 대결을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그 외계존재를 다루는 관점이 다르다. 외계적 존재를 통해 지구의 인간들을 비판하는 종류의 서사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지구인이 비인간화, 사물화 되었다는 것을 추상화된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이었고, 외계적 존재가 더 인간다운 존재임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성을 비판하는 서사 구조를 취한다. 물론 대다수 외계인 영화는 공포감을 일으키는 외계존재를 등장시켜 악으로 설정하고 지구인 영웅과의 사투를 그려내는 이야기나 코미디 종류가 월등히 많다. 

  그러나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은 지저분하고 비루한 바퀴벌레의 형상을 가지고 있으며 공포의 존재라기보다는 혐오와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무섭지는 않지만 기피하고 싶은 존재들, 우리들이 일상에서 노숙자들과 스칠 때 느껴보았을 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들이다. 이 영화에서 외계인은 미지의 존재에게 느끼게 마련인 공포나 신비스러움을 뒤집어 놓고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인간의 적이거나 친구가 아니라 인간의 관리대상이며 골칫덩어리로 제시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이 영화는 우리가 ‘다름’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는다. 

  <디스트릭트 9>은 여러 면에서 SF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외계인을 전형적인 헐리우드 방식으로 다루지 않는 것은 물론, 다큐멘터리 형식의 화면으로 영화를 채우는가 하면 지구인 영웅도 등장하지 않는다. 배경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빈민가가 펼쳐지고 나아가 동일자와 타자의 문제, 인간들의 주권과 사법적 지위, 그것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이 영화에는 단지 줄거리만으로 포착될 수 없는 인간 ‘삶-의-형태’들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자세히 읽기를 요구한다. 

   UFO가 지구, 그것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제2의 도시 ‘요한네스버그’의 상공에 불시착한다. 그 안에서 발견된 외계인은 바퀴벌레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지구에서 살게 된 그들 무리는 쓰레기를 뒤지며 폭력과 불법을 일삼는 빈민층을 형성한다.

  
 
 그들이 격리되어 거주하는 곳의 이름이 ‘9 지역’이다. 9지역에서 범죄와 폭력이 자행되고 관리와 통제의 차원에서 문제가 제기되자 다국가 연합(MNU)은 그들을 새롭게 정비된 지역으로 강제이주를 시키려 한다. 지구인들은 그 게으르고 통제불능인 그들을 쓰레기 더미의 최종포식자 ‘프라운’(Prown)이라고 부른다. 그곳에 거주하는 자들의 권리 따위는 명목상일 뿐이며 인간들은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그곳 거주자들, 외계인이자 지구의 하층빈민에 다름없는 그들에게 일방적으로 철거를 공시하고 서류에 동의확인 서명을 받으려 한다. 한편 외계인 가운데 ‘크리스토퍼’라는 이름의 외계인과 그의 친구는 자기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주선의 동력원을 모으는 작업을 진행중이었는데 철거공시를 하기 위해 들이닥친 ‘비쿠스’가 그 에너지원에 노출되어 감염된다. 

  그 에너지-물질과 접촉한 비쿠스에게 외계인으로의 신체변환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신체변화 탓에 비쿠스는 주위 동료들로부터 격리되고 신체연구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인간들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된다. 자기 신체변화를 멈출 방도를 찾기 위해, 자신을 찾는 지구인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비쿠스는 9지역으로 잠입하고 크리스토퍼와 협력한다. 자신의 신체변화를 멈추기 위해서는 자신이 압수했던 그 에너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 비쿠스와 크리스토퍼는 MNU에 침투한다. 그곳 지하연구실에서 크리스토퍼는 자신의 동족들을 처참하게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삼아 온 MNU의 만행을 목도한다. 에너지원을 되찾아 9지역으로 돌아온 그들은 모선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동안 감춰졌던 지휘선을 구동시켜 모선으로 회귀하려 한다. 하지만 MNU의 용병들과의 전투에서 부득불 비쿠스는 남게 되고 크리스토퍼와 그의 아들만이 모선을 타고 지구를 떠난다. 완전히 외계인으로 변환된 비쿠스는 잠적하고 사람들은 이 모선이 지구로 돌아올 경우에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된 현실에 직면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다국가연합(MNU)의 외계인담당부서에서 일하는 ‘비쿠스’(Wikus van de Merwe)가 9지역 철거공시의 책임자를 맡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첫 장면부터 영화는 비쿠스가 방송 카메라 앞에서 보도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외계인들이 철거에 동의한다는 서류에 서명을 받는 과정은 실시간으로 방송된다. 관객들이 보는 장면 역시 그렇게 녹화된 화면들이다. 이렇게 촬영된 장면을 통해서 중계된 현실을 서사적으로 전달받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영화 내내 정치가는 물론 전문연구자들, 시민들의 인터뷰가 서사 자체에 끝없이 개입하며 정보를 제공해준다. MNU의 촬영화면, 뉴스보도의 화면, CCTV의 화면들이 등장한다. 심지어 패스트푸드점에서조차 모니터에서 쉴새 없이 뉴스-정보가 흘러나오고 있다. 단지 카메라가 많고, 그렇게 촬영된 화면을 통해서 사실-정보를 전달받는 정도가 아니라, 이러한 화면들이 현실 자체를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단지 외계물질에 감염되었을 뿐인 비쿠스를 외계인과의 성관계를 통해 외계인으로 변한, 외계인으로 변하게 하는 바이러스 보균자로 보도한다. CCTV나 촬영된 카메라는 사실 그대로를 보여주지 않고 현실을 적극적으로 재생산한다. 대중매체에 의한 통치를 뜻하는 미디어크라시(mediacracy)의 지배방식이 여기서 멀지 않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방송하여 공동의 여론을 생성시키며 그것으로 현실을 작동시키는 방식에 기여하는 미디어야말로 우리 사회와 일상유지에 필수불가결한 매체이며 그러한 사회 유지 방식이 우리에겐 결코 낯설지 않다.

  여기서 우리가 어떤 사실을 접하는 방식은 언론의 생중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생중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태를 중계하는 것은 화면일 뿐 그것을 매개하는 미디어는 현실과 수용자 사이에서 중계(inter-mission)하고, 간섭(inter-ference)한다. 우리가 파악하는 현실은 이미 미디어의 해석적 개입(inter-pretational inter-vention)을 통해 변형 굴절된 것에 불과하다. 영화 내내 계속 나오는 인터뷰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언론은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편집-선별된 것들이며 그러한 보도를 통해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를 만들어낸다. 그 과정에서 현실이 생성된다. 인간은 원래 현실을 날 것 그대로 파악할 수 없는 존재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입이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시퀀스는 비쿠스의 신체변이가 외계인들과의 성관계를 통해서 일어났다는 것을 보도하는 뉴스다. 뉴스는 희극처럼 비쿠스의 주위 200여 미터 내에 접근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패스트푸드점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비쿠스를 발견하자 아연실색하여 순식간에 흩어지는 희극적 장면을 연출한다.

  미디어크라시가 하나의 객관적 대상을 구별, 분리시킴으로써 그에 대한 생체정치(biocracy)를 작동시킨다. MNU는 평화와 안전을 유지하는 기구처럼 보이고 실제로도 그러한 활동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지하에서 외계인들을 잡아서 생체실험을 계속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 목적은 외계인들의 생체융합형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비쿠스는 MNU라는 국제연합기구의 직원이면서 외계인을 철거하는 임무의 현장책임을 맡은 사람이다. 여기서 또한 인간들 ‘삶-의-형태’가 드러난다. 외계인 담당부서라는 관료조직과 기구가 그것이고, 외계인들이 철거에 동의한다는 서류 I-27는 물론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두음문자의 조직기구들이 그것을 보여준다. 이른바 관료통치(bureaucracy)는 서류에 의한 통치를 뜻한다. 이것은 동시에 법(규정이나 조항)에 의한 통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외계인으로 변하기 전에 비쿠스는 이러한 합법적 절차에 따라서 행동하려고 하고 통제하려고 한다. 인간들 스스로 외계인의 철거와 이주를 결정해놓고 그들의 동의 사인을 받으려 하는 것은 영화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장면은 아니다. 그들의 이주에 관해 어떤 선택권도 제공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동의했다는 서류(!)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들 자신이 합법적이고 절차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는 자기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통치방식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미디어가 하는 일, 생체권력이 하는 일, 서류와 규정들이 하는 일은 결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위험 요소를 조절, 통제하는 것이다. 문제는 누가 누구에게 그것을 행사하는가 뿐만 아니라 어떻게 그러한 과정들이 생성되고 작동하는가다. 그것은 누가 무엇인가를 분리하고 배제하는 방식에 관계된다. 하나의 대상을 격리하려고 하고, 그것을 보도(매개)함으로써 그를 격리하고, 그를 분리하는 것에 관한 담론을 유포한다. 이것은 결국 공포정치(terrorcracy)에 다름 아니다. 이때 공포의 대상은 ‘타자’이다. 물론 타자는 고정적으로 확정된 대상이 아니다. 한 사회에서 타자란 사회체가 스스로를 봉합하고 유지하기 위해 그때 그때 배제의 담론을 통해 탄생하는 대상이며, 각 담론 분야에서 서로 이질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차이를 생산하고, 그 차이를 분리와 배제라는 방식을 통해 전유하고 그것을 통제와 관리한다. 그것은 때론 인종이나 성별(gender), 지역이라는 분할선을 통해 작동하기도 하며 심지어 취향에 관해서 작동되기도 한다. 

  인간 주체가 본원적으로 낯선 외계와 사물에 대해 갖게 마련인 본능적 불안과 공포심을 이런 식으로 전유하며 유지되는 사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중핵이며 우리는 그러한 사회의 구성원이다. ‘비쿠스’는 하나의 분할선 안쪽에 있던 대상이 어떻게 분할선 밖으로 배제되며 어떠한 운명을 가질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존재다.
  
  
 
  격리 수용된 지역으로서의 디스트릭트 9은 외계인들의 단순한 집합소가 아니다. 거기에는 이미 나이지리아인들의 수용소도 함께 있다. 그곳은 편견과 차별에 의해 격리된 지역이며, 정상성의 집합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들을 격리시켜 수용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격리-수용소다. 이들이 프라운들을 새로운 곳으로 이주시키려 하는 디스트릭트 10지역 또한 지금보다 더 완벽히 수용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쟁포로 수용소나 군대의 캠프(막사)와 매우 유사하다.  

  외계 비행선이 뉴욕이나 워싱턴, 시카고가 아니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한네스버그’에 도착했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미국중심적 사고와 헐리우드 외계인 영화에 대한 비아냥이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인종과 차별로 널리 알려진 국가-도시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즉 하나의 국가 자체가 거대한 수용소로 변해버린 곳에 이 외계 존재자-타자들이 출현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인간들이 외계인들을 무가치한 생명으로 대하고 있다는 점은 철거작전에서부터 드러난다. 그런데 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도 괜찮은 이유들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된다. 그들의 생김새 자체가 바퀴벌레의 형상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지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우주비행선 안에서부터 질병에 감염되어 끈적끈적한 신체분비물들을 유출시키는 더러운 존재들로 묘사된다. 또한 그들을 쫓아내려는 다양한 이유들이 인터뷰로 방송된다. 그들은 지구인들의 예산을 엄청나게 소모하게 만들었으며, 그들의 거주 지역은 쓰레기로 뒤덮여 있고 혼란과 무질서의 공간 그 자체다. 한 마디로 그들은 구제불능의 루저들이다. 그들의 거주 지역은 슬럼가이고, 거기에 격리 수용된 외계인-프라운의 형상들은 홈리스, 알콜중독자, 갱들의 모습으로 방송된다. 그들은 인간보다 열등한 골칫덩어리 존재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왜 그러한 존재자들을 관리하는가? 그것은 저능하고 문제거리인 존재들을 적법한 절차들에 따라서 인도적으로 대우한다는 인간들의 자기 확인을 위해서다. 타자를 적법하게 처리한다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본인 스스로가 적법하게 통치되고 있음을 믿기 위해 필요한 환상적 기제로써 그들이 필요하다. 인간들에게 프라운은 인간 스스로가 합리적이며 합법적으로 타자들을 처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기제-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프라운은 골치 아픈 존재들이다. 그들은 무가치한 생명이며 쓰레기 더미의 최종포식자라고 치부되지만 그들의 과학기술은 분명 인간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들이 타고 온 우주선이 그것이고, 무엇보다 그들의 기계와 무기는 생체반응으로만 작동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프라운의 생체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시급한 일이며 필요불급한 일이다. 

  비쿠스가 외계생명체로 변이하게 되는 것은 프라운들의 에너지원 물질에 감염되고 나서부터이다. 비쿠스는 결코 바이러스나 병원균에 감염된 것이 아니었다. 이 프라운들에게 모든 동력의 핵심 에너지원인 물질에 접촉하고 나서부터 비쿠스는 신체변이를 일으킨다. 따라서 프라운들의 에너지원, 크리스토퍼 존슨이 20년에 걸쳐 합성해 낸 물질은 바로 우주선을 움직여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줄 힘의 근원이자, 인간을 프라운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강력한 감염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 물질이란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수용소 지역에 분리된 채 관리대상으로 전락한 이 타자들의 외밀한 핵심, 또한 그들과 같은 존재로 변이시켜 줄 수 있는 핵심기제이다. 이 물질에 대해 인간들이 몰랐기 때문에 MNU는 생체실험을 통해 그들을 연구하며, 나이지리아 갱들은 원시적이고 제의적인 방식으로 외계인의 신체를 직접 식육하여 그들처럼 되려고 한다. 인간들이 프라운처럼 되려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힘을 얻기 위해서다. 타자를 지배할 힘. 여기에 ‘동일성’의 문제가 가로걸려 있다. MNU가 그들을 관리-조작-통제하기 위해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프라운을 연구한다면, 갱조직은 프라운의 신체를 먹는 방식으로 그들의 힘을 얻으려 한다. 동일화의 두 가지 방식, 전자가 계몽이성에 입각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이라면 후자는 원시종교적인 방법으로 동일성을 획득하려 한다. 

  비쿠스가 외계인으로 변해가는 신체증상이 나타날 때 보이는 그의 부하직원들이나 주변 친구, 가족들의 경계에 가득찬 표정을 생각해 보자. 이들 눈 앞에는 동일성의 주체가 변이를 통해 타자로 변해가는-그들이 멸시하는 프라운으로 변해가는 하나의 생체가 현전해 있다. 그들의 경계심으로 가득한 눈초리는 바로 그들이 프라운-타자들을 어떻게 간주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간에서 프라운으로 완전히 변신해 버린 ‘비쿠스’는 누구인가? 그는 이제 인간인가 프라운인가? 그의 신체는 분명 완전히 외계인이 된 듯하다. 그런데 영화의 끝에 보면 비쿠스의 아내가 인터뷰에서 집 앞에 꽃송이가 놓여져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그는 변신하기 이전 아내에게 손으로 만든 꽃송이를 선물하곤 했다고 설명된다. 프라운으로 완전히 변해 버린 비쿠스가 그의 아내에게 쓰레기를 활용한 꽃송이를 선물한다는 점을 보자면 비쿠스가 완전히 프라운이 되었다고도 볼 수 없다. 아니 프라운 자체가 열등한 타자가 아니다. 게다가 그의 기억과 그의 정체성은 여전히 인간의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프라운의 차이는 말소되어 종 간의 경계를 명확히 하기가 힘들어진다. 사실상, 비쿠스가 크리스토퍼 존슨과 협력하여 액체물질을 MNU로부터 탈취해 온 것이나, 우주선이 출발하도록 돕는 이유란 비쿠스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목적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비쿠스는 지구에 남고 크리스토퍼 존슨만이 그의 어린 아이와 함께 우주선을 타고 자신들의 행성으로 되돌아 간다. 이제 비쿠스는 크리스토퍼 존슨이 약속한 그 시간을 기다려야만 한다. 그는 지구에 남겨진 지구인-프라운이자 크리스토퍼 존슨이 다시 올 때까지 인간의 정체성과 프라운의 신체를 가지고 남겨진 시간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지점에서 외계인의 이름이 ‘크리스토퍼’라는 사실은 새삼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크리스토퍼라는 이름 자체가 ‘크라이스트’의 변형인데, 비참하고 비루한 형상의 외계인이 하늘로 날아가 버렸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믿고 쓰레기 더미에서 남겨진 시간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의 형상은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공중으로 올라간 그리스도의 것이며, 남겨진 예수의 제자들-크리스천들은 비쿠스라고 읽는 독법을 허락하기도 한다. 

  
 
  이 영화의 외계인-벌레로의 변이 모티프는 프란츠 카프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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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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