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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쓰는 남자> - 정민아

정민아 (영화평론가)

건조함과 지루함, 뜨거움과 카오스가 공존하는 흑백영화. 이 두 가지 감각은 현대 그리스의 사회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가운데 표출된다. 조용한가 하면 혼돈스럽고, 무감각한가 하면 욕망으로 가득하다. 신구의 대결로도 읽힌다. 고루하고 낡은 것과 새롭지만 폭력적인 것. 민주주의를 가장 먼저 실현했으며 고대로부터 발달된 예술과 문화를 가진 자랑스런 역사의 그리스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 읽는 것도 좋겠다.

TV로 축구경기를 시청하거나 술을 마시면서 빈둥거리는 니코. 여자와 사랑을 나눈 뒤에도 인사도 없이 각자 반대반향으로 등을 돌려 걷는 모습에서 그의 삶이 얼마나 건조한지 알 수 있다. 함께 살던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삼촌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면서 개를 산책시키면 월급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개를 돌보는 직업이란 게 불쾌하게 느껴지지만 별 대안도 없으므로 니코는 삼촌네 집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니코는 숙모인 고고와 가까워지고 성관계까지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아기를 원하는 강압적인 남편에게 저항하지 못하는 고고와 더 이상 참기 힘든 니코는 감옥같이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을 꾸민다.

영화는 즐거움과 재미를 위한 길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녹록하잖은 세상을 멀리 떨어져 관찰하기 위해 익스트림 롱쇼트를 유지하고, 자동차, 오토바이, TV, 싸우는 사람들 소리 등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확대하여 들려준다. 사람들 간의 대화는 거의 없고, 대화가 있다고 해도 늘 싸우며 자기 얘기만 일방적으로 전한다. 대화하는 두 사람의 투 쇼트라면, 전경에는 철창이나 나무 등이 위치해 두 사람 사이가 가려지고 분리되도록 정교하게 구성된다. 이는 폐쇄된 공간 속에 위치한 이기적인 인물들에 대한 상징이다.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모두 거칠다.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웃으며 걸어가던 남녀였지만 갑작스런 폭력으로 여자가 피를 흘리고 쓰러져도, 이를 지켜보던 주인공은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라 밟고 지나간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와 멀리 느리게 움직이는 롱쇼트, 롱테이크를 통해 현실의 답답함을 전달하고 있지만, 결말부에는 잠깐 동안 행복한 순간이 배치된다. 니코가 연극을 보기 위해 극장에 들어서면서 흑백화면은 갑자기 밝은 컬러로 채색되고, 관객의 위치에 있는 니코는 처음으로 환하게 웃는다. 연극 내용은 귀여운 남녀의 해피엔딩 사랑이야기. 사랑을 고백하고 반지를 끼워주면서 두 사람의 사랑은 완성되고, 나레이터는 관객들이 이제 TV 드라마를 보러 가야 하니 연극을 어서 끝내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감독은 놀라울 정도의 자기반영성을 드러낸다. 영화, 연극, TV 드라마 모두 사랑을 말하고 행복을 전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현실이 암울할수록 자극적인 드라마는 더 활기를 띤다는 것에 대한 주장, 그리고 관객은 속지 말아야 한다는 감독의 항변, 그것은 영화가 암울할수록 더욱더 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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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관리자

등록일2011-12-18

조회수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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