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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헨(Märchen)은 오래 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민간에 전승된 이야기를 뜻한다. 대부분 비합리적이며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요정과 괴물이 등장하고 인간과 동물이 대화하며, 마법과 변신 같은 초월적 사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오늘날 환상문학의 모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톨킨의 저서 『Tree and leaf』에는 자신이 어린 시절 읽은 페러어테일(fairy tale)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는 현실세계(real world; primary world)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2차세계(secondary world)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현실세계의 합리성과 무관한 세계이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찾아오는, 진실과 연관된 세계이다. 근대적 이성이 신과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기 이전, 이질적인 것들이 소통하던 세계이다.
미셸 오슬로(Michel Ocelot)의 작품들은 그러한 메르헨의 세계에 기반하고 있다. 물론 오래도록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이야기인 폴크스메르헨(Volksmärchen)의 형식을 가져와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고 재가공한 쿤스트메르헨(Kunstmärchen)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실루엣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나 <키리쿠와 마녀>, <키리쿠 키리쿠> 같은 키리쿠 시리즈, 그리고 비교적 최근작인 <아주르와 아스마르>에 이르기까지 그의 애니메이션에는 마녀와 요정, 공주와 그녀를 지키는 괴물, 그리고 용감한 청년 등 전통적인 메르헨에서 인물과 배경, 모티브 등 기본적인 요소를 차용해왔다.
그런데 그가 들려주는 메르헨의 공간적 배경은 제각각이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에피소드 중 ‘소년과 무화과'는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노파의 외투‘는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키리쿠‘ 시리즈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다. 단지 공간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곳의 자연적·문화적인 특질을 포착하여 아름다운 그림체로 승화시킨다. 그가 창조해낸 빛과 그림자, 아찔할 정도로 눈부시고 선명한 색감은 장식적인 배치를 넘어 색채의 미장센을 이룬다.
사실 미셸 오슬로가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들은 디즈니의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백설공주와 일곱난장이>나 <신데렐라> 같은 유럽의 메르헨에서부터 <포카혼타스>와 <뮬란>, <모아나> 같은 비서구권의 매르헨, <보물섬> 등 고전소설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의 온갖 진기한 이야기들을 허기진 포식자처럼 집어삼켰다. 집적된 자본의 투자와 오랜시간 누적된 경험으로 이룩한 동작의 유연함과 현실감, 색채의 풍요로움은 디즈니의 성과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들은 톨킨이 말하는 ‘진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일까? 혹은 어떤 ‘진실’과 관계 있는 것일까? 어쩌면 디즈니가 추구하는 진실은 스펙터클과 자본이 아닐까? 아니면 스펙터클을 통한 자본의 증식이든가. 미셸 오슬로는 동일한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의 서사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 아이러니를 떠받치는 것이 선의와 공감이다. 선의와 공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에피소드 중 ‘마녀의 성’이다.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공주를 아내로 주겠다고 왕이 선포하자 청년도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녀에 성에 들어가기 위해 도전한다. 청년은 그저 지켜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각종 공성병기와 대포를 이용해 공격하지만 마녀의 성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주변의 비웃음에도 청년은 여전히 지켜볼 뿐이다. 온갖 강력한 무기들이 모두 실패한 후 마침내 청년이 마녀의 성을 향해 간다. 그가 노크를 한다. 그러자 성문이 열린다.
용맹보다는 선의가, 지략보다는 공감이 그의 이야기들을 이루는 주된 테마이다. ‘마녀의 성’에서 성문을 열게 한 것이 무력이 아니라 그저 예의바른 노크이며, ‘공주의 다이아몬드’에서 다이아몬드를 모두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잔꾀나 지식이 아니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가 하면 ‘마녀의 성’에서 마녀의 도서관과 정원, 그리고 호수를 둘러보며 마녀와 대화나눈 청년은 그녀의 삶의 방식에 공감하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청년은 마녀의 성에 들어갔으니 공주를 아내로 맞으라는 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마녀와 함께 성에 머무르기로 결심한다. ‘왕자와 공주’에서는 키스를 할 때마다 개구리와 애벌레 등으로 변신을 거듭하던 왕자와 공주가 여러 번 시도 끝에 사람드로 돌아오지만 성별이 바뀐 채 상대방의 모습으로 뒤바뀐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모습을 거부하던 두 사람은 점차 상대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마침내 뒤바뀐 모습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한다. 이런 위트 있는 역지사지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것을 벗겨낸 뒨 남는 어떤 것, 바로 ‘함께 살아감’이다.
<아주르와 아스마르>는 이와 같은 선의와 공감의 연속선상에 있다. 파란눈을 지닌 유럽게 청년과 짙은 갈색 피부를 지닌 아랍계 청년이 어린 시절 함께 지내다가 각기 다른 성장기를 거쳐 전설 속 진의 요정을 찾는다는 이야기는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빛이 새어나오는 듯한 색채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롭다.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은 『천일야화』를 연상시키는 메르헨의 세계를 가져오면서도 상당히 현실적이다. 그 현실감은 서구 기독교 문화권과 이슬람 문화권의 대립이라는 오래됐지만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이어지는 갈등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이야기들은 메르헨 형식이 지닌 주제가 빠질 수 있는 함정, 즉 화석화된 보편성이라는 올무로부터 비껴나는 듯하다. 그의 작품에는 계급과 성, 인종, 문화 등의 문제가 담겨 있다. 여러 지역의 설화를 차용하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메르헨이라는 형식은 비현실적일지 몰라도, 그가 문제를 제기하는 감각은 현실적이다. 선의와 공감이라는 주제는 보편적이지만 그의 ‘진실’이 자리한 곳은 우리의 현실이다.
미셸 오슬로는 ‘다름’이 악의와 편결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다양한 색처럼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이며, 그 다양함을 인정하고 공감하며 선의를 가지고 받아들일 때 공존과 조화의 길이 열린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의 그림이 아름다운 것은 기교 때문이 아니라 그가 보여주는 ‘선의와 공감’ 때문일 것이다.
글: 이대연
영화평론가. 소설가. 저서로 소설집 『이상한 나라의 뽀로로』(2017), 공저 『영화광의 탄생』(2016)이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