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불가능한 시공간을 호흡하는 카메라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현실적(reality) 폐허를 포월해 실재(the Real)의 비의성, 혹은 시적 고양의 순간을 찾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항상 불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불확실한 방랑을 떠난다. 이를테면 그들의 배경에는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반도의 고통스러운 근현대사가 안개처럼 스멀거린다. 파시즘의 압력에 시달리는 쓸쓸한 광장에서부터 사회주의 독재가 끝난 이후에도 반목의 역사를 멈추지 못한 거리까지 현실적 폐허는 여러 모양으로 다가온다. <율리시즈의 시선> 이후의 작품에서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허무가 잿빛 톤으로 어른거린다. 꿈꾸는 이상향으로부터 난민이 된 이들이 때론 유령처럼 오가고, 혁명을 외치던 목소리는 피로를 머금은 침묵으로 대체된다.
자기 인생의 잃어버린 좌표를 찾는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그런 대문자 역사로부터 초래된 절망 위에서 부유한다. 그들의 인생은 조화로운 신화의 세계를 공연하기 위해 떠돌지만(<유랑극단>) 반목의 현장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빼앗기고는 언어화될 수 없는 슬픔의 깊이에 포박된다(<흐느끼는 초원>). 미완으로 남겨진 예술작품이 시적 섬광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지만(<율리시즈의 시선>, <영원과 하루>) 미궁으로 사라진 완전한 세계(아버지)는 신화적 신비에 휩싸인 풍경 안에서 초월적으로 자신을 계시할 뿐이다(<안개 속의 풍경>). 그처럼 그들은 비참한 역사를 배경으로 개인적 절망과 다투는 중 형이상학적 구도자가 되곤 한다. 그러다가 고통과 환희가 점착된 실재의 순간에 이르러 서글픈 이방인의 실존(<황새의 정지된 비상>)을 깨우친다.
아주 사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 순간 받아 든 ‘시인’, ‘영화평론가’라는 직함으로 인해 빈번하게 ‘시적인 영화’를 질문 받는 입장에 있었다. 그때마다 즉답을 하는 대신 질문의 저의와 기원을 탐색하곤 했다. 영화라는 예술이 다른 예술장르의 의장을 걸친 후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때의 ‘시적인 것’은 어떤 의미로 공유되어야 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다른 예술장르의 수식어로 불려 다니는 ‘시’ 혹은 ‘시적인 것’의 의미망을 좁혀보곤 했다. 주지하다시피 시는 절약적인 언어로 음악적 리듬과 회화적 이미지를 조화시키는 예술이다. 시인이라면 일상적 상황에선 쉽게 발현되지 않는 언어의 정동적 기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낱말의 배열과 구성에 창조적 열정을 쏟아야 한다. 좋은 시라면 의미기호를 초과하는 새로운 언어를 통해 울림을 가진 이미지를 만들어야 하고, 그것으로 독자들을 각별한 ‘시정(詩情)’에 이르게 해야 한다. 요약하면 ‘시적인 것’의 전제는 감화적 이미지의 정동적 배열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질료는 다르지만 앙겔로풀로스의 작품들은 가장 완전한 수준의 시적인 영화다. 그의 플랑은 우리에게 시선의 자유를 충분히 허락하면서(단지 영상이 중단없이 길게 이어진다는 것을 지칭하지 않는다)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정동을 창조한다. 그가 고안한 특유의 느린 이동 쇼트는 한 호흡으로 연결될 수 없는 비동시적인 것의 동시적 현전을 성사시킨다. <영원과 하루>를 가득 채운 플랑 세캉스 안에서 19세기 시인 솔로모스는 죽음을 예감한 20세기 시인 알렉산더 옆에 수시로 출몰한다. 플래시백 없이, 그러니까 시공간의 단절없이 알렉산더의 의식과 환상은, 현실과 기억은 하나의 플랑 안에서 교감하고 대화한다. 예를 들어 <영원과 하루>의 알렉산더는 의식의 연장, 혹은 정동의 흐름을 따라 1966년의 어느 하루로 자유롭게 건너간다. 거기에선 이제 곧 허물어질 해변의 집도 1966년 어느 날의 평화로 충만한 기운을 품는다. 이미 죽은 아내도 젊은 얼굴로 나타나 현재 밖에 없는 영화에 마술적 시간을 허락한다. 각별한 감화적 이미지의 주인이 된다.
그렇게 앙겔로풀로스의 카메라는 불가능한 시간대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리듬을 내보인다. 앙겔로풀로스의 플랑을 유비하면 이런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테렌스 맬릭은 자기 영화에 ‘시적’ 의장을 걸쳐놓기 위해 내레이션을 필요로 한다. 벨라 타르는 숭고미와 이웃하는 정동의 울림을 만들기 위해 흑백의 침묵을 이용하곤 한다. 그러나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시적 의장을 걸치는 게 아니라 의장 없이도 시적이다. 그렇게 그는 타르코프스키에 더 가깝지만 선지자의 강렬한 외침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정동을 배열하는 플랑의 가능성에 더 의존한다.
이 글은 ‘호흡하는 쇼트(breathing shot)’로도 불리는 알렉산더의 플랑 세캉스가 <영원과 하루>에서 어떤 이질적인 대상들을 중첩시켰는지를 더듬어 보려 한다. 방랑의 과정에서 그의 의식 세계로 끊임없이 틈입하던 다른 시간대의 인물, 사건, 소리를, 그리고 그들 간의 미학적 질서를 차분히 음미해보고자 한다. 거기에는 비평적 촉수를 끌어당기는 여러 층위의 ‘틈’이 있다. 틀림없이 이 ‘틈’은 <영원과 하루>가 베푼 미학적 긴장성의 핵심을 관통한다. 지금부터 앙겔로풀로스의 ‘호흡하는 카메라’가 만든 ‘운동-이미지’의 내부로 파고들 것이다. 동의를 구하지 않고서도 즉각적인 동의를 얻어내는 그 합목적적 형식으로부터 시적 텔로스(telos)를 느낀다면, 당신도 앙겔로풀로스에게 붙은 ‘거장’이라는 칭호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1. 언어의 틈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감춰졌거나 사라진 것을 찾아 헤매는 인물이 나온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안개 속의 풍경> 속 남매를 생각해도 좋겠다. 그런데 외부에 발생한 결핍과 다투는 등장인물의 모험은 결국 내면의 틈을 채우는 여정으로 치환된다. 우린 이미 <율리시즈의 시선>에서 마나키아 형제가 발칸 반도에서 찍었다는 그리스 최초의 영화 필름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현상되기도 전에 사라졌다는 그 필름을 찾아 나선 ‘A’는 앙겔로풀로스 자신이거나 그의 영화 속 페르소나로 등장하곤 하는 또 한 명의 알렉산더일 것이다. 그런데 전쟁 중 망실된 필름을 추적하는 ‘A’의 여정은 점점 자기 영혼을 대면하려는 방랑이 된다. 한 시대의 표정을 담은 필름 세 통, 곧 그리스가 잃어버린 ‘이미지의 틈’을 향한 발걸음이 자기 안의 빈 곳을 응시하는 여행이 되는 셈이다.
<영원과 하루>의 알렉산더는 19세기 그리스 시인 솔로모스가 쓰다만 시(『자유로운 농성자들(Eleftheroi poliorkimenoi)』)를 완성하려는 열정에 투신한다. 그러니까 그가 메우려는 결핍은 명백히 ‘언어의 틈’이다. 알렉산더에게 그 공백은 19세기 이후 그리스가 견뎌 온 질곡의 근현대사를 마주하는 일이다. 그런데 <영원과 하루>에는 또 다른 언어의 틈이 존재한다. 이 두 번째 언어의 틈은 매우 사적인 차원의 숙제처럼 출현한다. 알렉산더의 아내는 오래 전에 죽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그녀의 목소리는 죽음을 각오한 알렉산더의 의식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자기 세계에 빠져 살았던 알렉산더로 인해 그녀는 항상 외로웠고, 그 내막은 일기와 같은 편지 행간에 축축하게 잠들어 있다. 알렉산더는 곧 사라질 해변의 집에서 그 편지를 만난 후 30여년의 시차를 건너 언어를 초과하는 감정을 추수한다. 편지 속 언어는 생과 사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 혹은 좁히기엔 불가능한 시간의 간격을 건너온 것이다. 알렉산더는 그 거리와 간격에 사로잡혀 서글픔이 고이는 ‘언어의 틈’에 압착된다.
알렉산더의 욕망은 이 두 가지 ‘언어의 틈’을 경유해 미학적 자기실현과 윤리적 자기멸절로 나아간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중요한 정보 중 하나는, 알렉산더가 약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각한 지병을 앓아왔고 영화가 시작된 순간부터 그가 그 약을 끊기로 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그는 마지막일지 모르는 하루를 스스로 선택했고 지금 그 여정의 출발점에 있다. 그 때문에 알렉산더의 딸이 아버지의 전생애가 머물렀던 해변의 집을 팔았고 내일이면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해변의 집과 알렉산더의 상징적 관계를 단박에 확인하게 된다. 그 때문에 솔로모스의 시와 아내의 편지에 붙들려 ‘언어의 틈’을 응시하는 그의 뒷모습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역사적 열망과 탐미적 모색을 통해 가시화되는 타나토스의 운동이 있다.
라캉에게 언어는 결핍을 토대로 욕망을 표면화시키는 권능이다. 욕망을 추동시키는 근본적 기저인 타나토스도 언어를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죽어가는 중에도 외부로부터 주어진 ‘언어의 틈’을 메우기 위해 헤매는 알렉산더의 동선은 그 자체로 너무 ‘라캉적’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하루는 “죽음의 본능에 의해 언어의 생산이 이뤄진다”(1)는 라캉의 명제가 찬란한 시적 순간으로 응축되는 사태다. 사실 그가 완수하려는 최후의 ‘시 쓰기’ 작업은 어려서부터 이방인의 운명을 감수해야 했던 솔로모스의 시에 몰래 국경을 넘어온 알바니아 소년의 언어를 보태는 일과 다르지 않다. 젊은 아내의 목소리로 읊어지는 언어는 그 ‘시 쓰기’ 과정에서 알렉산더 자신의 초상을 들여다보게 하는 신비한 압력이다.
물론 이 ‘시 쓰기’ 과정의 전경에는 에로스적 운동이 배치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솔로모스의 슬픔과 알바니아 소년의 비극과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하루 안에서 합치시키려는 강렬한 의지. 그것은 차라리 에로스적 불꽃에 가깝다. 그러나 앙겔로풀로스는 ‘언어의 틈’을 메워가는 속도로 알렉산더의 육체가 부서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시의 완성과 자신의 소멸이 한 점에서 만나는 마지막 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의 생은 그야말로 시적 섬광이 된다. 타나토스는 그 찰나에 무엇인가를 ‘완수’한 주체가 자기 자신임을 알릴 것이다. 그렇게 <영원과 하루>는 알렉산더를 ‘언어의 틈’으로 밀어 넣은 후 자기 멸절의 순간으로 달려가게 한다.
2. 실존의 틈
‘언어의 틈’에 압착된 알렉산더는 이미 ‘실존의 틈’을 사유해 왔다. 어쩌면 두 가지 표현은 정확히 동어반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원과 하루> 속 인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앙겔로풀로스의 주인공들이 어떤 성격의 이방인이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후자의 의미는 중층화된다. 다시 말하지만, 앙겔로풀로스의 중요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이방인이거나 망명자다. 과거의 거처로부터는 스스로 이탈했고 미래의 목적지는 예측으로부터 달아나는 중이어서 그들의 현재는 세계의 윤곽을 지우는 안개(앙겔로풀로스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안개는 최고의 미장센이다)로 등치된다.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을 비극으로 내모는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실체는 그리스가 감당해 온 질곡의 역사, 그 자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시간들은 태고에서 영겁으로 나아가는 신화적 배경, 어쩌면 영원회귀의 상상과 맞닿는다. 앙겔로풀로스가 그린 이방인의 초상을 원경에서 바라보면 우주적 시간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그 절대적 시간과 대조되면서 갈수록 왜소해지는 이방인이 된다. 사실 태어날 때부터 시한부 인생이라는 점에서 우리들 중 누구도 그 이방인의 실존을 벗어날 수 없다. 복잡하게 설명할 것 없이 죽음이란 현존재가 반드시 불가능해질 가능성이다.(2)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이 예외없는 가능성에 우리 모두가 포로라는 사실을, 그 완전한 가능성 안으로 이미 내던져진 상태였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기표다. 우리의 ‘…에 대한’ 관계, 혹은 ‘…를 향한’ 모든 관계의 끝이 파국이라는 확증,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래서 앙겔로풀로스의 가장 중요한 플랑에는 혁명의 좌절 이후, 그리움이 목적지에 가닿지 못한 이후에 도착하는 최종적인 공허가 넘실댄다.
<유랑극단>에도 인물들을 비참에 머물게 하는 역사적 맥락이 등장한다. 그 배경엔 물론 신화의 그림자가 깔려 있다. 주인공들의 이름부터가 아가멤논, 엘렉트라 등이다. 그들의 정처없는 발길은 1939년부터 1952년 사이의 그리스 역사와 교섭하면서 고대의 비극을 상기시키는 로드무비를 써내려간다. 그들이 모여 이룬 유랑극단은 파시스트가 지나는 광장에서 시대의 상처를 품은 상황들과 다투고 화해하길 반복한다. 자꾸 과거의 시간대로 되돌아가 비극의 기원을 사색하는 <유랑극단>의 카메라는, 이때부터 앙겔로풀로스만의 형식미학이 완성됐음을 알린다. 흥미로운 지점은, 혁명의 구호와 압제의 시선이 부딪치는 후경에서 죽음은 더 이상 그들의 삶 이후에 머물지 않고 삶과 동행하며 삶 안으로 들어오려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앙겔로풀로스가 창조한 인물들은 ‘신화적 상상을 거느린 역사적 시간’이라는 매우 거창한 비전 아래에서 이방인의 초상이 된다.
신화적·역사적 시간과 인물 사이의 간극은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망원경으로 들여다 볼 때 발견되는 ‘실존의 틈’이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서로에게조차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들키며 더욱 현실적인 ‘실존의 틈’을 환기시킨다. <영원과 하루>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도 모두 다른 형태의 이방인이다. 알렉산더의 마지막 하루에 틈입해 우정을 나누는 알바니아 소년은 국경을 넘어와 정처를 잃은 전형적인 이방인이다. 그는 인신매매와 폭력의 위험에 노출된 채 길 위에서 근근이 생을 유지하던 터였다. 그는 최대한의 연민과 호의를 베푸는 알렉산더로부터도 지속적으로 도망치곤 했다.
이방인으로서 그의 비극성은 ‘알바니아-그리스’ 국경의 눈 덮인 언덕 위에서 시작하는 플랑에서 적확하게 실감된다. 프레임 안으로 차 한 대가 틈입해 질퍽한 흙길을 어렵사리 올라온다. 곧이어 알바니아 소년을 그의 조국으로 돌려보내려는 알렉산더가 소년과 함께 차에서 내린다. 그런데 차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년은 알바니아 내전으로 그곳을 탈출하던 날 밤을 시적으로 진술한다. 죽음을 피해 친구와 도망치면서도 나무 마다 플라스틱 봉지를 걸어두었다는 말. 그것은 귀향에의 희망이 아니다. 국경 너머에도 안전한 정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근본적인 불안의 존재를 시사한다. 소년의 긴 이야기가 끝날 무렵 카메라는 눈 덮인 언덕 위, 산안개가 가득한 그곳으로 나아간다. 그때 카메라는 황망한 죽음들을 기억하고 있을 안개 속 철조망을 둘러본다. 철조망을 붙들고 매달려 있는 숱한 사람들, 회화적 조형물처럼 보이는 그 비극적 실존의 풍경을 그로테스크하게 응시한다. 결국 알렉산더는 소년을 그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얼마 후 이 음산한 죽음의 풍경은 소년을 그리스로 이끈 친구의 사고사 소식으로 실체화 된다. 그렇게 소년은 완전한 이방인의 초상이 된다.
앙겔로풀로스의 내면에 거주하는 또 한 명의 이방인인 19세기 시인 솔로모스는 어린 시절을 이탈리아에서 보낸다. 그때 자신을 가르친 사람은 터키 사람이었다. 솔로모스는 모국어로 조국의 현실을 간파하는 시를 쓸 수가 없는 사람으로 자란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로 돌아온 이후, 그는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로부터 시에 쓸 낱말을 구입하고 다녀야 했다. 그는 결국 이탈리아와 그리스 중 어디에도 실존을 가눌 망명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가 맞닥뜨린 ‘언어의 틈’은 부서진 정체성의 흔적이면서 그 자체로 ‘실존의 틈’이었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앙겔로풀로스의 페르소나라면, 알렉산더와 동행하며 그의 안과 밖을 비추는 알바니아 소년과 시인 솔로모스는 알렉산더의 페르소나다. 이 중층적인 미장아빔 사이를 떠다니다가 그들 사이에 내려앉지 못하는 언어들. 혹은 이방인들에게서 이방인처럼 떠돌다가 흩어지는 낱말들은 <영원과 하루> 가장 안쪽의 뼈를 이룬다. 앙겔로풀로스가 제 영화의 주인공으로 이방인이나 망명자를 그려온 근본 이유도 그들 언어를 통해 유추된다.
다시 알렉산더의 여정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역사적 현재, 혹은 사적 절멸을 앞둔 시간 속에서는 알바니아 소년과 길을 걷는다. 그와 동시적으로 흐르는 신화적 시간, 혹은 영원으로 연장되는 내면의 시간 속에서는 솔로모스와 동행한다. 알렉산더로부터 이미 영원한 이방인이 된 아내는 솔로모스의 방랑과 알바니아 소년의 방랑을 알렉산더의 인생과 유비시키는 궁극의 힘이다. 이 모든 해석적 관계망을 적확하게 확인시키며 그들 이방인 사이를 떠도는 세 개의 낱말이 있다. 알바니아 소년이 알렉산더에게 가르쳐주었으며, 솔로모스 시의 빈 칸으로 갈 궁극의 언어. 사라질 해변의 집 앞에서 아내의 환상을 물리고서야 낭독되는 그 낱말들은 영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하루 안에 고인 정념을 완전하게 집약한다.
“코르풀라무(korfulamu)”, “제니티스(xenitis)”, “아르가티니(argathini)”. 영화 속 이방인들의 ‘실존의 틈’이 중첩되는 빈 공간으로 던져진 이 낱말은 ‘작은 꽃’, ‘망명자’, ‘너무 늦은 밤‘을 의미한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작고 소소한 것에서 느끼는 사랑과 이방인으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슬픔, 죽음 곁에서 느끼는 때늦은 회한을 성찰과 한다. 알렉산더는 먼 신화의 시간으로 되돌아가기 전, 눈앞에 바다를 두고 등 뒤에 해변의 집을 두고 이 단어를 울부짖는다. 단숨에 의미기호를 초과해버리는 이들 단어는 <영원과 하루>에 삽입된 모든 영상을 응축하여 재배열한다. 감화적 이미지의 정동적 배열의 순간.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우리는 하이데거가 ‘시 쓰기’를 “존재가 낱말이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 이유에 근접하게 된다. 시를 쓰는 행위가 “존재를 건립하는 명명”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3) 실존은 그 언어로부터도 미끄러져 틈을 가지겠으나 우리 중 누군가는 알렉산더의 비극적 절규가 우리 각자에게 되돌아오는 메아리를 들었을 것이다.
3. 시간의 틈
이제 알렉산더의 내면에 작동하는 리비도의 행방을 물으며 ‘시간의 틈’을 이야기하려 한다. 맑시스트로서 앙겔로풀로스가 품었던 정치적 혁명은 그의 시대에 항상 좌절되었다. 그로부터 생겨난 회한의 감정은 그가 만든 영화들 안에 늘 흥건하다. 이를테면 <율리시즈의 시선> 속 ‘A’는 아이스킬로스나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뛰쳐나온 듯한 표정으로 영웅적 슬픔을 가시화한다. 목이 잘려 철거되는 거대한 레닌상을 배경으로 함께 했던 사람을 떠나보낼 때, 산산조각 난 레닌상과 함께 그가 배를 타고 국경의 밤을 건널 때, ‘A’가 앙겔로풀로스의 페르소나임을 깨닫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상이 사라진 자리를 아직 향하고 있는 앙겔로풀로스의 리비도가 그들 장면에서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렇듯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비극적 사건, 절망적 상황을 재구성해보려는 의지가 살아있다. 이때의 ‘재구성’이란 언명은 더 오래 음미할 필요가 있다. 그의 첫 장편 영화 제목은 그 유명한 <범죄의 재구성>이다. 그러나 원제는 ‘Anaparastasi’ 곧 ‘재구성(Reconstruction)’이기도 하다. 그는 영화감독으로 출발점에 선 순간부터 과거로부터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사건, 사람, 사연을 재구성해왔던 것이다.
그런데 미학적·정치적·역사적 함의를 갖는 그의 재구성 과정은 결국 윤리적 올바름을 포기하지 않는 애도 작업으로 나아간다. 그가 인위적인 편집, 곧 몽타주의 편리를 이용하지 않는 이유도 현실로 이어지는 절망적인 기억을 오롯이 지켜보게 하기 위해서다. 전경에 위치한 인물과 후경을 장악한 역사적 상흔을 딥포커스로 공평하게 불러내는 이유도, 익스트림 롱쇼트를 통해 인물을 둘러싼 압도적 상황들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게 하는 이유도 같은 동기를 가진다. 앙겔로풀로스는 그러한 전략 안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플랑을 세심하게 활용한다. 우리는 그가 의도한 호흡을 따라 거대한 비전을 가진 애도작업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그 연장선에서 단순화의 오류를 감안하고 말하면,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대처였다. 추구하던 이상의 훼절에 대한 반응이었다. 언어의 틈, 실존의 틈이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자리였다. 앙겔로풀로스 영화를 가득 채운 폐허와 같은 광장, 잔해와 같은 건물들은 이제 리비도를 철회해야 하지 않느냐는 요구였다. 그러나 앙겔로풀로스의 인물들은 대상 상실을 자아 상실로 동일시한 후 자아가 대상을 탈은유화하여 삼켜버리는 과정을 밟으며 비극으로 치닫곤 했다. 그렇게 그들은 애도의 필연성과 불가능성 사이로 난 길을 고통스럽게 걸었다.
그 길은 ‘시간의 틈’을 마주보고 걷는 길이다. <영원과 하루>로 돌아가 죽은 아내의 목소리가 열어젖힌 환상으로서의 기억을 다시 생각해보자. 1966년의 하루는 딸이 태어나 젊은 아내가 일가친척과 함께 떠들썩한 축제를 벌인 날이다. 평화로운 해변의 집을 나선 그들은 배를 타고 어느 섬에 이르러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그러나 그곳에 알렉산더는 없다. 그는 환상으로 각색된 기억을 재구성하면서 고독한 젊은 아내와 죽음 앞에 선 늙은 자신 사이의 낙차, 곧 ‘시간의 틈’을 어떻게든 극복하려 시도할 뿐이다. 그런데 젊은 아내에게 새겨진 타자성(otherness)을 소거하고 그녀와의 합일을 시도하려는 열망은 죽은 그녀에 대한 초월적 상징화 작업,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환상이 아니고서야 1966년의 아내에게 가닿을 언어를 그가 가질 수 있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아내가 먼저 건너간 세계로 자신도 넘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영원과 하루>의 마지막 씬은 타나토스가 불러낸 탐미적 황홀로 나타난다.
이 탐미적 황홀은 <영원과 하루>의 7분 30초짜리 마지막 플랑에서 절정을 이룬다. 지금부터의 설명은 단 하나의 쇼트에 대한 설명이다. ‘시적인 영화’를 묻는 이에게 대답 대신 보여주고픈 ‘감화적 이미지의 정동적 배열’이 여기 있다.
알바니아 소년과 이별하고 난 다음날 새벽. 부서져나갈 해변의 집 안은 텅 비워져 있다. 카메라는 그 ‘텅 빔’ 안으로 홀로 걸어 들어간 알렉산더를 잡는가 싶더니, 프레임 밖으로 그를 밀친 후 그 공간의 허무를 오른쪽, 왼쪽으로 천천히 둘러본다. 프레임 안으로 알렉산더가 다시 들어왔을 때, 젊은 아내가 젊은 그에게 부치지 못한 마지막 언어들이 다시 30년의 시간을 건너와 읊어진다. 그녀가 “내게 준 이 하루” 속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하루는 알렉산더의 삶 이전과 이후에 존재하는 신화적 세계의 부름이 된다. 카메라가 창문을 열고 천천히 밖으로 나가자 해변에서 음악과 더불어 축제를 즐기는 1966년의 일가친척들이 보인다. 그들 사이에서 젊은 아내가 나타나 늙은 알렉산더를 아무렇지 않게 맞이한다.
그리고는 두 사람의 춤이 시작된다. 이후 두 사람 주변에서 함께 춤을 추던 일가친척들이 프레임 밖으로 조용히 빠져나간다. 그제서야 알렉산더는 아내에게 “내일은 뭐지?”라고 묻고 30여년 전에도 그 대답을 했었는지, 아내는 “영원과 하루”라고 답한다.
아직 이 플랑은 끝나지 않았다. “영원과 하루”라는 영화의 제목이 젊은 아내의 입에서 읊어지는 순간, 알렉산더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그리고는 현실과 동거하던 환상의 축제는 끝이 난다. 아주 명쾌한 수준으로 알렉산더의 ‘들을 수 없음’은 봉합 불가능한 ‘시간의 틈’을 환기시킨다. 이제 아내마저 사라진 바닷가에서 알렉산더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그가 등을 돌려 바다를 향하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사로잡았던 태고의 신비를 가진 파도소리가 더 커진다. 이때 등 뒤에서 젊은 어머니의 그를 호명하는 목소리가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다. 신화적 시간의 부름인양 그 호명은 세 번 반복된다. 여기가 <영원과 하루>의 끝이다.
이 ‘끝’이 ‘시작’에 대한 응답이었다는 사실을 부연하고 싶다. 앙겔로풀로스의 영화가 영원회귀의 시간을 짊어진다는 것, 메우면 다시 벌어지는 ‘시간의 틈’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 <영원과 하루>의 오프닝을 이루는 두 개의 쁠랑은 1939년의 어린 알렉산더를 잡는다. 새벽 무렵, 고요한 해변의 집을 몰래 빠져나간 알렉산더는 친구 두 명과 바닷가로 몸을 던진다. 이 과정에서 지진으로 인해 수세기 동안 바다에 잠들어있다는 행복한 고대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꿈처럼 읊어진다. 어린 알렉산더와 친구의 목소리로 구연되는 그 신화는, “한 달에 한번 금성이 비탄에 잠겨 가던 길을 멈추고 몽상할 때” 그 도시가 뭍으로 올라온다는 정보로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그날 새벽의 바다는 어린 알렉산더와 두 명의 친구를 기다리던 완벽한 신화의 세계다. 그때도 알렉산더 앞에 파도소리가 있었고, 등 뒤로는 젊은 어머니가 그를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영원과 하루>의 끝은 단순히 수미상관(순환)이 아니라 두 번째 ‘시작’(들뢰즈의 해석을 따르는 ‘영원회귀’)이다. 사실상 영원히 반복되어 온 끝이자 이전과 다른 시작이다. 마지막 플랑에서 알렉산더는 신화를 묻힌 1939년의 하루와 아내의 목소리로 온 1966년의 하루, 그리고 다시 신화의 초입에 선 지금 여기의 하루를 동시에 살아내게 된다. 영원이라는 관념을 흔적으로 실감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도 비탄에 잠긴 금성의 날에 영원으로, 신화로 나아갈 것이다. 영원회귀의 풍경 아래에서 우리 모두를 잉태한 모태로 돌아갈 것이다.
-1. 나르시스트가 나르시스트에게
앙겔로풀로스의 시적 화법에 가깝게 그의 영화를 말해보고 싶었다. 이 글은 명백히 실패했다. 앙겔로풀로스와 나 사이, 그의 영화의 내 글 사이의 ‘틈’을 더 좁힐 순 없었다. 알렉산더는 생의 마지막 하루에 아내의 편지 이전에는 닿아보지 못했던 내면의 환부를 감각하게 된다. 알바니아 소년을 만나지 않았으면 몰랐을 이방인으로서의 지난날을 죽음 직전에 깨닫게 된다. 알렉산더는 그를 열렬히 사랑했던 아내에게조차 ‘작은 꽃’을 건네지 못한 채 떠도는 ‘망명자’로 살아왔고 이제 ‘너무 늦은 밤’에 이르렀다. 솔로모스의 시를 완성하려는 그의 마지막 안간힘은 그래서 더 애처롭다. 허물어진 것을 대체할 방도가 없음에도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메우려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서글프지만 아름다운 환유적 대체의 운동!
짐 호버먼은 ‘자아도취의 향연’이란 말로 앙겔로풀로스의 영화를, <영원과 하루>를 폄하한 적 있다. 표현은 정확했으나 표현에 뒤따르는 뉘앙스는 사려 깊지 못했다고 본다. 그리스 신화 속 나르시스는 자기 이미지와 합일을 이루려다 물에 빠져 죽는다. 신화 밖을 사는 우리도 나라고 믿어지는 존재, 나였으면 하는 이미지를 앞에 두고 황홀한 결여로 나아가는 소외를 경험한다. 이는 지극히 보편적인 우리 모두의 생활 메커니즘에 가깝다. 어쩌면 알렉산더를 유혹한 신화적 바다와 자신의 페르소나나 진배없는 이방인들의 이미지도 보편적 운명에 대한 시적 수사이거나 신화적 해석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앙겔로풀로스의 거의 모든 작품이 엄정한 형식미학을 바탕으로 유사한 도취의 순간으로 나아가는 건 사실이다. 최소한 ‘역사 3부작’, ‘침묵 3부작’, ‘국경 3부작’ 중 그러한 주장에서 크게 벗어나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뒤따르는 모든 동사를 목적어 하나가 규제하는 문장도 시로 갈 수 있다. 앙겔로풀로스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현대 그리스 3부작’ 중 마지막 작품도 분명한 목표와 견결한 수단을 가진 도취의 과정을 거쳐 ‘시적인 것’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런 영화를 싫어할 순 있지만 비난할 순 없다. 이 말은 앙겔로풀로스와 그가 창조한 알렉산더들과 그의 호흡하는 쁠랑 세캉스에 대한 진지한 옹호다.
<영원과 하루> 중반에 알렉산더는 오랜 시간 방문하지 않은 늙은 어머니의 요양병원을 찾는다. 죽음의 그림자를 주름살 사이사이에 숨긴 어머니는 창가에서 그 언젠가처럼 알렉산더의 이름을 호명한다. 그때 알렉산더는 (아마도)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 어쩌면 우리가 삶에서 대신 대답했으면 하는 질문을 던진다. “내 언어를 말할 수 있을 때! 왜 그때에만 내 발걸음이 집에 돌아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죠?”. 영화가 끝난 후, 그 물음을 복기하면서 모국어로 시를 쓸 수 있게 된 솔로모스와 평온을 되찾은 알바니아를 향해 국경을 넘는 한 소년을 떠올렸다. 해변의 집을 외로이 지키던 아내를 향해 젊은 알렉산더가 ‘작은 꽃’을 들고 와 새로운 새벽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살아있는 한 영원처럼 여길 그들 각자의 찬란한 하루를 생각했다. 언젠가 앙겔로풀로스는 자신의 영화를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들 사이의 사멸한 공간”으로 정의했다. 그들 각자의 찬란한 하루를 알렉산더와 나 사이의 ‘틈’ 안에, 그 ‘사멸한 공간’ 안에 끼워 넣은 후 언젠가 다시 꺼내 봐도 좋을 듯하다.
(1) 아니카 르메르, 이미선 역, 『자크 라캉』, 문예출판사, 1998, p.245에서 재인용.
(2) 마르틴 하이데거, 전양범 역, 『존재와 시간』, 동서문화사, p.321.
(3) 이기상, 『하이데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 영향』, 누멘, 2005, pp.380-382.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글: 안숭범
영화평론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시인. EBS <시네마천국>을 진행했으며, 문화콘텐츠 기획 및 인문학적 비평에 매진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