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포 시리즈’는 <보이후드>(Boyhood, 2014)와 더불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독특한 영화 만들기 방식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영화들 중 하나다. 물론 그의 영화세계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기 위해선 더 많은 영화들의 목록이 필요할 테지만, 특히나 국내에서는 ‘비포 시리즈’와 <보이후드>를 통해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소개되고 담론이 형성되는 경향이 짙은 것 같다. 이 영화들이 공유하는 작업 방식이란 현실의 시간을 영화적 형식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을 함께 한 배우들이 자라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어가는 과정이 영화의 등장인물이 지나온 세월 속에 고스란히 녹아난다. <보이후드>는 영화의 주인공을 연기한 엘라 콜트레인이 6살 어린아이에서 18살의 청년이 될 때까지 12년의 시간을 고스란히 담는다. 소년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를 연기한 에단 호크와 페트리샤 아퀘트, 누나를 연기한 로렐라이 링클레이터가 12년간 <보이후드>의 세계를 함께 만들었다. <보이후드>가 12년의 시간과 소년의 성장기를 한 편의 영화 안에 담았다면, ‘비포 시리즈’는 각각 9년간의 간격으로 만들어진 세 편의 영화를 통해 사랑과 시간에 대해 탐구한다.
1995년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를 시작으로 <비포 선셋>(Before Sunset, 2004)과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 2013)이 9년마다 차례로 만들어졌다. 비엔나에서 우연히 만난 미국 남자 제시(에단 호크)와 프랑스 여자 셀린느(줄리 델피)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빠져들며 밤을 함께 보낸 뒤 6개월 후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헤어진다.(<비포 선라이즈>) 그러나 약속처럼 6개월 뒤가 아닌 9년 뒤가 되어서야 두 사람은 파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고, 예전처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에게서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비포 선셋>) 그리고 다시 9년 뒤, 두 사람은 결혼해 아이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과거의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만은 않았다. 이제 이들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대화 속에서 서로에 대한 원망과 현실의 지난함을 길어낸다.(<비포 미드나잇>) 몇 줄로 간단히 요약했지만, 물론 ‘비포 시리즈’는 단지 이러한 줄거리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감흥을 안겨준다. 함께 걷는 거리,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 영화들 사이의 간격을 불러내는 방식과 시간의 속성에 대한 탐구들까지. 시리즈의 개성과 장점에 대해선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들의 찬란하게 빛나는 젊은 시절과 낭만,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과의 일시적인 상호작용으로 어우러져 빛나는 <비포 선라이즈>나, 세월의 축적과 깊고 넓어진 인물들의 주변 관계 속에서 두 사람을 다시 마주보게 하는 <비포 미드나잇>이 가진 탁월함 역시 쉽게 잊혀지지 않는 것들이다. <비포 선셋>은 두 편에 비해 보다 소박하고 러닝타임도 가장 짧지만, 어느 오후 파리의 거리를 함께 걷는 두 남녀의 모습과 대화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성립하고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사한 사례다.
9년을 넘어 마주한 현재의 불확실하고 불안한 활력이 이들을 감싸고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 파리의 서점을 찾은 제시가 하는 인터뷰 장면을 돌이켜보자. 그는 9년 전 비엔나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This Time>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썼다. 책의 출간을 기념해 마련된 작은 자리에서의 질문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실제로 프랑스 여자를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져 하루를 함께 보냈나요? <비포 선라이즈>를 보았거나 적어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그렇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 질문에 대해 대신 대답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러나 다음 질문은 좀 다르다. 6개월 뒤 약속처럼 그녀를 만났느냐는 질문에는 실제로 어땠는지 알 수 없어 망설이게 된다. 영화에 속하지 못한 9년의 시간은 모호한 상태로 불려나온다. 그리고 영화는 명확하게 정의내리거나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을 껴안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매 순간을 생생하게 살려낸다.
이는 제시와 셀린느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서도 반복된다. 제시가 방문한 서점에 셀린느가 우연히 찾아와 두 사람이 만나게 되지만, 책을 출간하고 인터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셀린느가 서점에 찾아온 것을 마냥 우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제시 역시 우리 이야기를 책으로 쓰면 언젠가 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혹은 셀린느가 만든 노래의 가사가 그들의 이야기인지 아닌지, 매번 너의 꿈을 꾸다 울면서 깬다고 말하는 제시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제시가 결혼식장으로 향하며 보았던 뒷모습이 셀린느인지 아닌지, 영화는 이런 불확실함과 모호함, 우연과 의도의 불분명한 구분을 동력삼아 이들과 함께 걷고 결국에는 마음속에 내내 간직하고 있던 모종의 진실을 꺼내놓게 한다.
너의 지난 9년은 어땠는지 만큼이나 궁금한 건, 만약 우리가 그 때 다시 만나고 계속 사랑했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앞선 질문들에 답하기 어렵듯이 실현되지 않은 과거와 변할 수도 있었을 현재에 대해 말하기란 어렵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걷고 있는 거리와 쏟아내는 대화가 그 어디에도 기대지 않은 채 위태롭게 빛나는 현재라는 사실을 직감하며 그렇기에 현재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는다. 때로 상투적이고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의 대사처럼 들리는 말들을 하며 서로에 대한 원망이나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을 늘어놓지만, 마치 제시가 썼다는 책 속에서 빠져나온 듯한 이들은 과거와 떨어뜨릴 수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에 속박되지도 않은 현재를 끝없이 더듬는다.
셀린느의 노래를 들은 제시는 그녀의 아파트를 떠나 곧장 공항으로 향할까. 서로에게서 발견한 사랑의 가능성을 이들은 얼마나 믿고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9년 전 비엔나에서 헤어진 이들이 6개월 뒤 다시 만나게 될지 궁금해 했던 것처럼, 그리고 그때와는 또 다른 궁금함을 남기며 영화는 나른하고 불확실한 활력 속에 불현 듯 끝난다. 다시 9년 뒤 <비포 미드나잇>이 설명해준 그 이후가 없더라도, 혹은 그러한 내용과 상관없이 <비포 선셋>은 80분 남짓한 오로지 현재의 시간만으로도 충분히 기억될만한 아름답고 쓸쓸한 영화다.
* 이봄영화제
상영 : 2018년 9월 4일 (화) 오후 7시 영화 상영 및 해설
장소 : 이봄씨어터 (신사역 가로수길)
문의 : 070-8233-4321
글 : 손시내
2016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수상.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