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이창동 감독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은 특정한 캐릭터가 갑작스럽거나 우연한 상황을 마주할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집요하게 지켜보는데서 시작했다. 그의 이 방식은 항상 특정 캐릭터를 극한의 갈등 속으로 던져 넣고 극한의 갈등은 늘 우리의 서늘한 현실의 한 단면을 ‘은유’(메타포)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버닝>에서는 특정 캐릭터가 갑작스럽게 또는 우연히 어떤 ‘상황’을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캐릭터’를 마주하게 될 때 어떤 선택을 하는 지 집요하게 지켜보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그런 ‘상황’은, ‘현실’은, ‘시간’은 캐릭터와 캐릭터의 만남 뒤로 밀려나 캐릭터와 캐릭터의 만남을 더 미학적으로, 기술적으로 집요하게, 우연하게 이창동 감독에 의해 포착된다.
캐릭터와 캐릭터의 만남은 우선 종수(유아인)와 해미(전종서)에게로부터 일어난다. 그 이후(영화에서는 표현 안 된 해미와 벤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종수와 벤(스티브 연)의 만남으로 최종 마침표를 찍는다. 이 우연한 마주침‘들’은 모두 충동처럼 갑작스럽게 일어난다.
갑작스러운 이러한 마주침 들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이창동 감독은 해미의 입을 통해 진실과 거짓이 결판나도록 판을 짜고 이후에는 벤의 입을 통해 진실과 거짓이 결판나도록 판을 짠다. 해미와 벤의 이야기에 휘둘릴 사람은 종수뿐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종수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적용된다. 그것이 거짓이든 진실이든 이제부터 해미의 말은, 벤의 말은 종수의 기억 또는 현실과는 상관없이 ‘있었던 일’ 혹은 ‘없었던 일’이 된다. 종수의 해미에 대한 기억, 벤을 향한 열등감 등은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거나 그 경계에서 헤매게 만드는 또 다른 요인이 된다. 그렇게 종수가 겪는 이 상황을 그것이 사랑이든 열등감이든 질투든 분노든 이 영화는 해미와 벤의 진술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를 찾아야 하는 의미 찾기 게임으로 만든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 <버닝>을 통해 하나의 의미를 찾는 일에 동참한다. 그리고 해미의 입을 통해 이러한 일은 결국 삶의 의미를 찾는 일과 다를 바 없음을 전해 듣는다.
이로써 종수의 부유하는 혼동은 세 개의 관계를 갖는다. 이 관계의 첫 번째 상대는 ‘해미’이다. 종수는 해미에게 돌봐줄 것을 부탁받은 고양이 울음소리조차 듣지 못한 채 오로지 해미의 입을 통해서만 존재를 인정할 만큼 대화에는 늘 성공한다. 해미와의 관계는 처음에 기억을 더듬어 내야할 만큼 불안정했지만, 나중에는 전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해미의 알 수 없는 침묵마저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해진다. 어떤 식으로 말하건 종수는 해미 때문에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상대는 벤이다. 종수에게 ‘벤’은 해미를 통해 갑작스레 만나게 된, 그러니까 구조적으로 해미와의 만남 과정을 축약시켜 놓은 인물이다. 종수는 해미의 고양이를 보살펴야 할 때마다 다시 말해 해미의 방에 올 때 마다 해미와의 육체적 사랑을 복기한다. 그 행위들은 ‘육체적 사랑’이 순전히 ‘사랑’ 한 글자로 압축되는 과정이다. 종수에게 벤은 그 과정에 끼어든 걸림돌이다. 결국 종수는 해미를 사랑하기 위해 벤을 의심한다. 그래서 벤을 의심하는 일은 사랑을 완성하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된다.
세 번째 상대는 ‘아버지’(최승호)다. 종수는 해미에게 소설가를 지망한다고 최초로 말하긴 했지만 오히려 아버지 탄원서를 써야할 처지에 놓인다. 그런데 탄원서를 쓰기 이전부터 종수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포기하거나 실패해왔다. 관계의 실패 속에서 비집고 나온 ‘다정한 이웃’이라는 표현은 ‘분노조절 장애’라는 결함과 충돌한다. 이 충돌은 종수에게 침묵을 선사한다. 아버지 앞에서의 침묵. 어쩌면 종수의 이 침묵은 이미 벌어진 일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음을 반문하는지 모른다. 의미를 어떻게 따진들 아버지의 범죄사실, 해미에게 일어난 일, 종수가 저지른 일, 벤에게 일어난 일에는 변함이 없다. 결국 영화 <버닝>은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행위는 실제로 일어난 일과의 관계에서 아무런 중요성도 강조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해미가 괴로워 한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삶을 전적으로 나만의 뜻대로 살아갈 수 없어서 더 괴로워한다. 영화 <버닝>은 의미가 확정돼 있지는 않은 삶 때문에 괴로워하는 해미와 의미가 확정돼 있지는 않은 삶 때문에 한 줄의 소설도 써내려가지 못한 종수의 이야기에 더해 의미가 확정돼 있는, 다시 말해 하나의 정답으로 존재하는 벤(살인자)의 이야기가 개입하면서 진행되는 영화다.
특히 여기에서는 종수가 벤을 연쇄살인범으로 믿게 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종수의 입장이 되어 해미가 한 말이 맞는지, 틀린지를 확인하기보다 해미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는 과정임을 보게 된다. 이는 이 영화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 흐름은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올바로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미에 대해서 더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과 믿음의 경계에 서있는 종수와 해미의 혼란은 ‘분단 경계를 넘나드는 파주의 대남방송’, ‘늑대와 개의 시간’, ‘없다는 것을 잊는 행위’, 다시 말해 무엇도 절대 가치를 가질 수 없는 장소, 시간, 행위 속에서 더욱 명료하게 부각된다. 이 모순적 경계의 명료함은 황혼 빛의 아름다움을 더욱 더 강조하는 하나의 질감을 이루는데, 이는 이 영화의 결말이 비극만은 아니라는 묘한 여운으로 돌변하여 다가온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던 그 착실한 혼란은 해미의 방으로 스미는 노란빛과 종수의 집 마당을 뒤덮는 노을빛의 순간처럼 아름다움을 헌사하다 해미처럼 사라진다. 혼란의 사라짐. 그것은 우리가 늘 견뎌내는 현실의 순간이자 고통의 순간이며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충동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 <버닝>은 바로 이러한 충동의 갑작스러운 돌출과 사라짐의 명료한 혼동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그려낸다. 이창동 감독이 바라보는 그 날카로운 아름다움은 갑작스러운 마지막 장면처럼 예나 지금이나 그렇게 여전하다.
글·지승학
문학박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했으며,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