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흥식 감독의 『협녀, 칼의 기억(Memories of the Sword),121 min』
‘복수’에 얽힌 무사 가문의 비극
박흥식, 최아름 공동각본의 무협액션, 드라마 『협녀, 칼의 기억』(2015)은 시대적 배경으로 칼이 지배하던 시대, 고려 말을 정조준 한다. 세 개의 칼의 향방, 유백(이병헌)의 고려를 탐한 검, 월소(전도연)의 대의를 지키는 검, 홍이(김고은)의 복수를 꿈꾸는 검은 갈 길이 다르다. 왕을 꿈꿨던 한 남자의 배신, 십 팔년이 지난 후, 유백을 겨눈 두 여인의 칼이 춤춘다.
무인시대의 익숙한 풍경, 배신과 지조에 걸린 세 무사, 유백과 월소 그리고 풍천, 야망을 이룬 유백,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월소, 죽임을 당해야 했던 풍천, 그렇게 등장인물은 성격을 나눠 갖는다. 죄책감에서 풍천의 딸 홍이를 키워 온 월소, 월소는 어느 날 홍이의 출생 비밀을 밝히고 한 때 연인이었던 유백을 제거하는 것이 홍이의 숙명임을 천명한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8월의 크리스마스』의 조연출을 거쳐,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2001)로 감독에 데뷔한 박흥식은 『인어공주』(2004), 『사랑해, 말순씨』(2005), 『미안해, 고마워』(연출), 『천국의 아이들』(2012)에 이르는 영화 터널에서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한 영화가 독창적 개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을 받으며 탄탄한 입지를 굳혀왔다.
단편영화 제작과 SBS TV 드라마 『달콤한 나의 도시』(2008) 연출로 외연을 확장하던 그가 듣고 싶었던 흥행감독이라는 말, 그 말을 산산이 무너트린 시련이 그에게 닥쳐왔다. 『협녀, 칼의 기억』은 누적 관객 431,310명(2015년 10월 25일, 영진위 집계)이라는 치명적 흥행참패를 기록, 제작사 측 손익분기점 관람객 350만 명과는 엄청난 차이로 불명예 작품이 되었다.
영화연출가는 자신의 고도의 상상력으로써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분야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이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라는 각오로써 그 분야의 예술가들의 최고의 자양분을 빼내야 한다. 들뜸을 가라앉히고 연기자들을 조율하고, 스나이퍼처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해야하는 것인데, 감독은 자신의 시나리오가 최고라는 생각 때문에 스토리 라인을 짜는데 실패했다.
그가 치밀하지 못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가족 간의 복수, 칼부림이 영화의 결론이 된다는 것은 시대적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설득력을 얻지 못한다. 『협녀, 칼의 기억』은 잔잔한 이야기가 깔리지 못했고, 이런 출발점에서 시작한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문제점이 도출되어 있었다. 영화는 그림이나 사진 전시회가 아니다.
한국에는 전통 무예단체가 200여개가 넘고, 고수들도 많다. 그들의 눈물겨운 고증과 조언이 충분하지 않았다. 영화에 필요한 연기적 무예는 전문 고수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칼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만들어진 무협영화는 소비성 무협 만화와 다름없다. 필자가 수석 부회장으로 있는 한국전통무예학회에 조언을 청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첫 장면에서 해바라기 밭을 활보하는 홍이의 낭만적 모습은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부풀렸다. 화려한 영상미가 돋보였고, 연기자들의 연기도 진지하였다. 외부적인 모든 조건을 배제하고, 방송국의 드라마로 친다면 그냥 봐줄만하다. 영화는 입장료를 내고 보기 때문에 상황은 달라지고, 이 영화가 갖는 매력을 반드시 소지해야 한다.
황정민이 맹인 무사로 나왔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의 경우의 액션에 비하면 전도연의 맹인 연기는 고급스럽다. 사극, 맹인, 검술이라는 조건이 완전 일치한다. 결국 『협녀, 칼의 기억』은 독창성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어디에서 본 듯한 장면과 상황이 지속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신선감이 떨어지고, 무협으로 내세운 장면들은 그 기술적 기교가 이미 쓰인 것이었다.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 나오는 무당파의 마지막 무사 리무바이(주윤발)가 벌이는 ‘대나무 숲에서의 결투’의 모사(模寫)는 외로운 지성들의 냉철한 관조가 있을 때 가능하다. 『협녀, 칼의 기억』은 상상력의 범위를 가족으로 축소하였고, 『와호장룡』은 고수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제자를 찾겠다는 고뇌에 찬 지성의 모습을 보인다.
‘검’을 영화의 소재로 삼은 감독의 태도는 환영할 만하지만 『협녀, 칼의 기억』을 대하는 철학적 깊이에서 실패한 셈이다. 신비감이 사라진 영화, 짜임새 없는 구성은 연기파 배우들의 연기도 신통찮게 만든다. 감독은 자신을 숙성시키는 색다른 도구로써 철학과 사상의 깊이를 가지려는 진지한 태도로 ‘우리는 우리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의미를 새겨봐야 한다.
장석용/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백제검술협회 이사장 역임,한국무예학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