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광주 비디오를 본 적이 있는가. 80년대 젊은이의 가슴을 뒤흔들었던 소위 <광주 비디오>. 군인들의 곤봉에 맞는 사람들, 군인들에 의해 죽어간 사람들, 같은 나라 군인들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 힘든 영상이 담긴 비디오가 우리나라 광주에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더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하는 언론이 눈과 귀를 닫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더 분노했다. 군인의 만행도 엄청났지만, 그렇게 국내 언론의 입과 귀를 원천 봉쇄하면 완전히 닫힐 수 있다는 참담함에 더 피가 끓었다. 그런데 당시 많은 어른들은 언론을 정말 믿었다. 광주 비디오를 보고 집안 어른에게 말해도 “방송이 거짓말하겠냐”라고 했고, “학생인 네가 방송하는 사람보다 똑똑하냐”라고 말했다. 방송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고, 그리고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냐고 생각했던 당시 전형적인 기성세대는 자식이 “빨갱이들에게 속지나 않을까”하는 마음에 대학생들의 외출조차 걱정했다. 그러나 이 낡은 비디오를 본 사람은 심장이 뛰어 독재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이 낡은 비디오의 영상을 찍었던 실존 인물인 힌츠페터 기자의 죽음을 알리며 다큐멘터리 <5.18 힌츠페터 스토리>는 시작된다. 장영주 감독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뒤흔든 광주 영상의 실제 촬영자 위르겐 힌츠페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2003년 독일로 가서 촬영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 힌츠페터의 사진첩에는 80년 광주의 모습이 가득했다. 그는 당신 도쿄 특파원이었다. 1980년 5월 19일, 한국 내륙 지방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광주로 몇 차례 전화를 걸어보지만 전화를 받지 않자, 2시간 만에 짐을 챙겨 서울로 날아갔다. 당시 택시운전사 김사복이 광주로 데려다줬다. 5월 20일, 서울을 벗어나 고속도로를 달려 광주로 향하는데 아무런 제제가 없었지만, 광주 근처에 가니 탱크가 진입을 막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 진입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좁은 논길과 시골 마을로 우회해 광주에 도착한다. 도착 후 학생들 트럭으로 옮겨 타고 20일과 21일 광주를 돌아다니며 필름에 진실을 담아나갔다.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난 이 엄청난 일은 국내 어느 매체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전남에 있는 한 신문사에서 윤전기를 돌리려는 순간, 신문사 간부들이 들어와 판을 엎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틀만인 5월 20일 자신들은 최선을 다했다는 변명을 적은 한 장의 성명서를 남기고 스스로 보도를 포기했고, 스스로 기자임을 포기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5.20.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광주시민들은 이 엄청난 일들을 보도하지 않는 방송사들을 불태웠다. 그러나 힌츠페터는 20일과 21일 촬영한 필름 5통을 허리춤에 감추고 광주를 빠져나가 쿠키 상자에 필름을 숨겨 검열이 덜한 일등석에 올라탔다. 그제야 자신의 목숨이 붙어있음에 감사했다. 이 필름은 22일 저녁 독일 제1공영 메인 뉴스에 보도되었다. 23일 아침에는 전 유럽과 미국 언론에 방송되었다. 그리고 5월 22일, 바로 힌츠페터는 일본에서 독일로 필름을 전달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김사복은 호텔 택시를 운영하는 사장이었지만 힌츠페터를 직접 광주로 안내해 23일 금요일 다시 광주로 들어간다. 사태가 더 악화일로를 걷고 있어 광주 시내 진입은 더 어려워졌다. BBC가 진입하려고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광주 외곽에서 상황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힌츠페터 일행은 또다시 샛길을 찾아 달렸다. 결국 군대를 만났다. 광주 학생 폭동으로 책임자를 잃었다는 거짓말을 하고 통과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또다시 광주 진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택시 운전사 김사복의 도움 덕분이다. 두 번째 들어갈 때 김사복은 전북 김제 택시를 빌려와 힌츠페터와 광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힌츠페터는 개선장군처럼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광주 상황이 보도된 외국 신문이 광주에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사이 시신은 더욱 늘어났다. 자식의 황망한 죽음에 오열하는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는 파란 눈의 외국인 기사에게도 슬프고도 소름 돋는 비통한 심정을 자아냈다. 그런데도 광주 시민들은 힌츠페터가 다시 돌아온 23일부터 무기 회수를 시작했다. KBS 라디오는 토요일인 24일까지 무기를 반납하면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발표가 방송되었다. 평화로운 해결을 원했던 시민들은 자발적인 회수를 진행했고, 2500여 종의 총기가 회수되었다. 시 외곽에서는 군인들의 발포로 인해 여전히 희생자가 나오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 엄청난 사건이 평화롭게 해결되기를 바라며 총기 반환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다. 광주 시내는 시장이 열리고 정상적으로 돌아가듯 보였다. 잠시의 평화가 왔다. 도청 내에는 시민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계엄군에게 무기를 회수했음을 알리고 평화로운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협상은 순조롭지 않았다.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하기 직전 광주 전역에 라디오 방송을 송출한다. “시민은 폭도를 숨겨 주지 마십시오. 시민은 군 작전에 협조해주십시오. 광주 시내에 있는 모든 외국인에게 알립니다. 지금 군이 폭도를 소탕하기 위해 작전을 수행했습니다. 신분과 임무 여하를 막론하고 위험하오니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군은 외국인 보호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군은 폭도를 소탕하기 위해 시내로 진입하였습니다. 시민은 거리로 나오지 마십시오. 문을 꼭 닫으시고, 집안에 계십시오.” 결국 계엄군의 재진입은 성공했고, 많은 시민은 사살되었다. 28일 대한민국의 저녁 뉴스에는 광주사태가 계엄군의 진입으로 일단 평정이 되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계엄군은 광주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전력 경주했고 대통령의 특별담화도 발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사태는 극렬한 폭도들에 의해 호전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되는 조짐이 보였다. 따라서 군은 생활고와 온갖 위협에 시달리는 선량한 시민을 구출하기 위해 오늘 오전 3시 30분 군병력을 광주 시내에 투입했다. 군이 진압하는 동안 도청과 공원 등지에서 폭도들의 일부 저항이 있었으나 오전 5시 10분에 광주시 일원은 완전히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당시 미국 CBS 뉴스는 “광주로 투입된 군인들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을 진압하게 될 것이라 설명을 들었다”라고 보도하며, 정부는 광주에서 일어난 대부분의 폭력사태를 소위 “공산당 선동”의 탓으로 돌리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계엄군의 초기 과잉진압이 이 저항운동을 불러일으켰다는 사실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힌츠페터는 세 번째로 광주에 돌아왔다. 계엄군 진입 후 전남도청 앞, 이제 그를 환영하는 시민은 없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도시는 침묵 속에 있는듯했다. 군부는 폭력적이었던 광주 시위 사건을 보도하지 않고 잊어버리게 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떤 신문도 시민들의 민주주의와 계엄령 철회 요구를 다룰 수 없었다. 그러나 광주학살의 책임자가 대통령이 되는 걸 보고 분노한 힌츠페터는 외신기자 베르트람과 함께 45분짜리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을 만들어, 1980년 9월에 독일 전역에 방송한다. 80년대 피 끓는 청춘들에게 광주의 진실에 눈을 뜨게 한 비디오, 그것이 바로 힌츠페터의 <기로에 선 한국>이다. 86년부터 광주 진상을 밝히기 위해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었다. 거기에 사진이 보태지고, 한국말 더빙이 보태졌다. 소위 <광주 비디오>였던 힌츠페터의 독일 다큐멘터리 <기로에 선 한국>의 상영회엔 구름처럼 사람이 몰려왔고, 진실을 보기 위한 학생과 시민들의 열망은 대단했다. 그러나 당시 정부 성명서에는 이 영상이 “북괴의 사주를 받은 불온 집단에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발표한다. 1986년 군사독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1986년 11월 26일 경찰이 국회의원들에게도 폭행을 가했고, 이를 취재하던 외국인 기자 역시 골목으로 끌려들어 가 구타를 당했다. 바로 힌츠페터였다. 이날 그는 생각보다 큰 상처를 입었다. 목과 허리뼈까지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독일로 돌아와 7시간의 대수술을 받고 결국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2003년에도 수술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입은 상처는 목과 척추에 국한되지 않았다. 남들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부인은 그가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힌츠페터는 현실이 뒤죽박죽되는 통과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독일에 가서도 한국에서 본 군인들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환영을 본다. 그렇게 오랜 투병생활 끝에 힌츠페터는 2016년 1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광주의 진실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한민국이 이렇게 빨리 민주화를 맞이할 수 있었을까. 광주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상황에 대한 가정은 생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살면서 흔들릴 때가 많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며, 나의 소임은 무엇일까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다큐멘터리 <5.18 힌츠페터 이야기>는 “자기 맡은 바 일을 다 하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군인은 외부세력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군인다운 일을 해야 하고, 기자는 진실을 보도하는 기자다운 일을 해야 하고, 택시운전사는 손님을 태우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주는 택시운전사다운 일을 충실하게 하면 된다고, 그것조차 쉽지 않게 만드는 사회는 좋은 사회도 정상적인 사회도 아니라고 역사는 말한다. 글: 서성희 영화평론가.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부에디터, 대구경북영화영상협동조합 이사장으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대표이자 대구단편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