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가족이라는 군내 나는 화두가 중심이 되는 달이다. 남자와 여자, 각각 하나의 조각으로 만난 사람들이 아이를 낳아 한 조각, 결혼으로 생긴 또 다른 가족들로 한 조각, 그리고 기억과 추억의 조각들이 하나씩 모인다. 그렇게 가족이라는 건 각자의 조각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거대한 퍼즐 같은 건지도 모르겠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사이는 미세하게 균열이 나 있다. 촘촘하게 직조된 퍼즐 조각들이 가족의 일탈, 자식의 결혼으로 흩어지고 어느 순간부터 어긋나고 분열된 조각들은 각자 어느 빈틈 사이로 파고들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가까스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기어이 뭉쳐야 하나로 완성되는 퍼즐 조각의 아귀를 맞춰보려 하지만 대체 어느 조각이 사라져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순간, 가족이라는 이름은 생경하면서도 날선 생채기가 된다.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은 서로 잔인하게 발톱을 세우고 상대방에게 잔인하게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한 가족의 이야기 속으로 파고든다. 서로를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이상적인 가족의 틀에서 벗어나, 가장 잔인하게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가족의 모습은 어쩌면 가장 ‘보편적인 가족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이토록 차갑고 고전적인 비극
문학 혹은 연극의 역사에서 흔히 ‘가정비극’이라 분류되는 장르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혹은 이름만 아는 극작가 중에 헨릭 입센, 테네시 윌리엄스, 아서 밀러, 유진 오닐 등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잘자요, 엄마>의 마샤 노먼과 <매장된 아이>의 샘 셰퍼드 등은 비극의 전통적 장르를 가정 속으로 끌고 들어와 마침내 폭발 혹은 자멸하고야 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스테이시 레츠의 <어거스트 : 오세이지 카운티>를 원작으로 한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은 그런 가정 비극의 전통을 현대에 충실히 재현해 내는 드라마이다. 구강암에 걸린 바이올렛(메릴 스트립)은 남편 베벌리(샘 셰퍼드)가 실종되었음을 딸들에게 알린다. 근처에 사는 둘째딸 아이비(줄리엔 니콜슨), 아버지가 가장 아꼈던 장녀 바바라(줄리아 로버츠)는 남편(이완 맥그리거)과 딸(아비게일 브레스린)을 데리고 멀리서 찾아온다. 그러다 베벌리는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되고 가족 모임은 장례식이 된다. 막내딸 캐런(줄리엣 루이스)은 믿음직해 보이지 않는 남자친구 스티브(더모트 멀로니)를 장례식에 데려온다. 항암 투병과 약물 중독, 남편의 자살까지 겹친 바이올렛은 모든 가족에게 독설을 퍼부어댄다. 아이비는 사촌 리틀 찰스(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사랑의 도피를 꿈꾸고, 캐런은 또 다른 신혼을 기대하지만 이 모두가 거대한 벽 앞에 선 일이다. 남편이 젊은 애인과 바람이 나 별거 중인 바바라는 자신의 삶만으로도 버겁지만 속속들이 폭로되는 가족의 숨 막히는 이야기 속에 폭발해 버리고야 만다.
이야기의 특징을 조금 더 부각시키기도 하고, ‘오세이지 카운티’라는 지명이 한국관객에게 낯설기 때문에 바꿨을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주제와는 더 가까워졌지만, 영화의 정서와는 상당히 멀어진 것 같아 아쉽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처럼 스테이시 레츠의 원작 희곡 <8월의 오세이지 카운티>는 특정 지역이 주는 기후와 그 속에 숨 막히는 정서가 또 다른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이다. 에어컨도 없는 8월의 사막 한 가운데 아버지의 자살로 모인 가족들은 격식을 차리기 위해, 혹은 격식을 갖추기를 강요당하며 장례식을 치른 후 답답한 복장으로 식탁에 둘러 앉아 있다. 열대 기후에 사는 앵무새마저도 죽어버리고 마는 덥고 답답한 집안 가득 흐르는 끈적거리고 숨 막히는 정서는 이 영화를 느끼고 공감하는 첫 번째 단서가 된다. 희곡을 원작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영화는 사건 보다는 등장인물의 대화를 통해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갈등을 폭발시킨다. 기승전결이 너무나 뚜렷하고 결말이 예측가능하다는 점에서 전통적 가족 비극의 틀을 지니고 있지만 서로의 상처에 소금을 뿌려대는 대사들이 어느 순간 키득거리게 만드는 유머가 되기도 한다. 수많은 대사들을 쏟아내면서 충돌해야 하는 영화의 특성 상 캐스팅이 영화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데, 캐스팅만 놓고 보면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은 이미 절반 이상은 성공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메릴 스트립과 줄리아 로버츠라는 이름만으로도 벅찬데, 여기에 이완 맥그리거, 더모트 멀로니, 줄리엣 루이스, 조금 모자라는 사촌으로 등장한 베네딕트 컴버베치가 단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기에 2006년 <미스 리틀 선샤인>의 아비게일 브레스린이 고기를 먹지 않는 엉뚱한 사춘기 소녀로, 세계적인 극작가이면서도 배우인 샘 셰퍼드가 이 모든 소동의 주인공인 아버지로 등장한다.
존 웰스 감독은 이 화려한 배우들이 불화하는 순간들을 특별한 기교 없이 가장 극적인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드 <쉐일리스> 시리즈가 떠오르는 순간이 있었는데 역시 감독 존 웰스는 <쉐임리스> 시리즈의 대본과 프로듀싱을 맡았던 전력이 있다. 아버지를 때리고 쌍욕을 퍼붓고, 무시하고 저주하면서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쳐 사는 한 가족의 이야기였던 <쉐임리스>의 무지막지한 다툼은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에서도 빛을 발한다. <쉐임리스>의 주인공들이 ‘막장’의 직전에 딱 멈춰주어, 이야기에 한껏 동조하는 관객들의 죄의식을 극한까지 몰고 가지 않는 그 방식 그대로, 영화는 콩가루 막장의 최고치에서 멈춰 숨고르기를 한다. 바이올렛은 가장 무시하던 인디안 가정부에게 살포시 안기고, 바바라는 자신과 얽혀있던 두 개의 가족의 카테고리로부터 달아난다. <인형의 집>의 노라가 집을 나서는 결말처럼,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서 주인공은 떠나거나, 홀로 대책 없이 집에 남는다.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고만고만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첫 구절로 <안나 카레리나>를 시작한다. 하지만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을 보고 있자면 불행의 다양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가족의 불행의 근원은 어쩌면 불완전한 남이 만나 결혼이라는 제도로 얽혀 불완전한 자식을 낳아 허덕거리면서 살아가는 그 순간 시작되는, 근원적 불행의 씨앗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끔찍해 하던 엄마 바이올렛이 하는 그 방식대로 자신의 남편과 딸을 대하는 바바라의 모습은 끔찍하게도 이어질 수밖에 없는 피의 유전이며 바이올렛과 남편 베벌리는 자신의 부모가 물려준 불행을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대물림한다. 이 구질구질한 유전적 불행은 어느 누구도 안정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 못한 세 딸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또 다른 가정의 비극을 만들어낸다.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은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처럼 보이지만, 결국 고만고만한 이유로 불행하다, 라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순간, 그 앞에서 멈춰 선다. 존 웰스 감독은 애먼 가족의 화해를 내세우지 않고, 고전적인 방식으로 주인공의 미래를 에둘러 방치한다. 그래서 무척 차갑지만 칼날처럼 에는, 서늘한 정서적 비극까지 품어내지는 못한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어거스트 : 가족의초상 - 포토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수상.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근무하며 객석, 미르 등 각종 매체에 영화평론과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