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가 기억하는 초등학교의 사회 교과서에는 늘 각 지역의 특산물을 그려놓은 삽화가 등장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대체로 도시와 농촌을 갈라 각각을 설명하고 이에 대한 부연 격으로 여러 지역의 특징과 특산물을 설명할 때에 등장했던 이 삽화에는 분명 ‘서울’의 특산물은 빠져있었다. 그렇다. 서울은 특산물이 없는 곳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서울의 모든 것은 ‘일반’이 될 수 있으며, 이 ‘일반’을 벗어나는 것들은 ‘특’산물이 된다. 이는 서울을 중심으로 지방을 가르는 매우 고까우면서도 폭력적인 시각이지만, 모든 것이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나라에서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 채기란 그리 쉽지 않다. 가장 쉬운 방법은 서울에서 한 발자국을 떼어보는 것이겠지만, 서울에 입성한 이상 굳이 그것을 하고 싶어 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 프레임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문화에 녹아들면서 웃음 코드로 활용되고, 사람들의 성격을 유형화 시키며, 젠더적 감수성 등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 여의도에서 압구정동까지 몇 분 만에 주파했다는 말에서는 웃음이 터지고, ‘상남자’의 지역을 결정지으며, 사투리 섞인 말투를 ‘애교’로 규정하여 칭송하는 것. 이러한 상황들은 서울에 살지 않는 이들에게, 그러니까 서울에서 소환한 그 지역에서 일상을 사는 이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웃음과 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상황과 나의 말투가 부여받는 생경한 의미들. 게다가 이 불편함과 어색함을 견디기보다는 서울로 올라가 ‘일반’이 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한 현실은 사투리는 숨겨야 할 것으로 지방의 본적은 수정해야 할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영화에서 서울을 제외한 지역들은 늘 그랬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만큼 순수한 공간으로 그려지거나, 타인의 시선에 맞춰 산수(山水)와 여성의 몸을 활용한 오리엔탈리즘의 표상처럼 존재하거나, 최근에는 한 지역의 사투리만으로도 등장 남성 인물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한 틀이 마련되어 있었고, 이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서울의 시선이었다. 대구 유원지의 연못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영화 <수성못>이 생경하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프레임을 <수성못>이 흥미로운 방식으로 벗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 <수성못>은 조금은 설익은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수성못에서의 살인사건은 희정(이세영)과 영목을 만나게 하는 계기 이상의 사건을 발생시키지 못하며, 정리가 덜된 듯한 영목(김현준)의 설정이나 희준(남태부)이 갑작스레 낯선 이에게 설득되는 결말은 영화가 명확한 소실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성못>은 끝끝내 관객들의 뒤통수를 붙잡으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말들에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다. <수성못>의 처음과 끝을 장식했던 기타소리, 단 한 순간도 당혹스러움도 내비치지 않은 채 희정을 똑바로 응시하며 그의 손에서 지갑을 잡아 빼던 서울의 지하철남, 끊임없이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뒤섞여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희정의 마지막 한 마디는 그 누구의 시선으로도 재단되지 않은 대구를 주인공으로 삼아 가능했기 때문이다.
2.
<수성못>은 물에 잠긴 듯 들려오는 기타소리를 깔고 물속에서 떠오르는 누군가의 시점 샷으로 시작된다. 빼꼼히 물 밖으로 시선이 올라왔을 때 보이는 유원지는 꽤나 잔잔하고 평화롭다. 이후 희정과 영목과의 대화를 통해 이 소리와 시선의 정체는 언젠가 수성못에서 자살한 기타치는 아저씨의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는 이 영화의 마지막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수성못>에 길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울려내는 기타소리가 꽤나 경쾌하다는 점인데, 이러한 상반된 감성의 배치는 <수성못>의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한다. 누군가가 함부로 정했을 대구의 모습이 아닌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가 느꼈을 대구의 모습은 그렇게 우리 앞에 도달한다.
<수성못>은 열심히 돈을 모아 서울로 가겠다는 열의에 찬 희정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면서도 그의 주변에 끊임없이 죽음의 흔적들을 펼쳐 놓는다. 희정과 만난 영목은 버릇처럼 동반자살을 준비하는 이이며, 희준은 도무지 세상에 자기가 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죽음을 꿈꾼다. 그러나 영목도 희준도 자신 나름대로의 하루 하루를 보내면서 삐그덕대지만 희정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경쾌함과 먹먹함, 분노와 슬픔의 끊임없는 교차는 <수성못>을 과하게 발랄하지도, 그렇다고 과하게 우울하지도 않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반’적인 일상의 모습으로 내려놓는다. <수성못>이라는 공간 역시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맘먹고 오리배를 타며 하루를 놀기 위한 유원지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곳이 돈을 벌고, 죽음의 고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일상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수성못>은 대구의 한 공간을 바로 그렇게 그려낸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박씨(강신일)의 등장이다. <수성못>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오가는 인물인 박씨를 통해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죽음을 결심한다는 것, 그리고 산 것과 죽은 것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든다. 몰래 오리배를 타고 수성못 한 가운데로 배를 몰아가 투신하는 장면은 졸고 있는 희정과 박씨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통해 가볍게 처리되고, 아내가 외국인과 바람이 났다며 외국어로 유서를 남기는 장면이나 바에서 만난 여인과 관계를 가지고 여인의 남자친구에게 들킬 위험에 처하자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장면 등은 순간 순간 웃음을 유발한다. 못에 빠진 후에도, 유서를 남긴 후에도, 몇 층인지 모르는 창문에서 뛰어내린 후에도 갑작스레 등장하는 박씨는 그가 산 자인지 죽은 자인지, 더 나아가서는 실재하는 존재였는지에 대한 의심을 피어오르게 하면서 어디든 죽음과 삶이 놓인 평범한 곳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발랄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수성못>이 스스로 대구를 그려낸 후에야 바로 그 공간이 그곳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그곳, 아무리 찾아도 ‘아무것도 없는 곳’과 같은 의미는 대구라는 지방을 낭만 넘치는 근대의 공간으로 그리는 이들에게선 절대 찾지 못할 결론일 것이다. 희정은 한 번도 가족들과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아빠와 엄마, 희준이 함께 앉아 밥을 먹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희정은 희준에게 ‘니 김정은 닮은 거 아나.’라며 툭 던지는 말로 그 자리에 끼고 싶지 않다는 것을, 희준과 밥을 먹을 때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엄마의 거친 잔소리를 배경처럼 깔아두는 것으로 그 자리의 불편함을 드러낸다. 자신이 속한 이 집단이 주는 이 일상의 무료함. 이제 희정은 이에 대한 적극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3.
희정은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이이다. 도대체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대거리를 하고, 나가서 뭐라도 하라고 잔소리 하는, 즉 자신은 지금 열심히 살고 있으며 그것의 귀결은 이 공간을 뜨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희정의 솔직함은 이 영화를 지방 청년들의 수난사로 쉽게 폄하할 수 없게 만든다. 혼자 좌절하거나 삭히지 않고, 혹은 서울로의 상경을 주제 넘는 것으로 부끄러워하며 감추지 않으며, 서울에 가서도 다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자신감, 이 감정들을 솔직히 터뜨려 놓는 것에 집중하는 것. 바로 여기에서 <수성못>이 가지는 에너지가 드러난다.
희정은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동창이 서울에서의 취업을 준비하며 역삼 쪽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도 곧 서울에 가서 살 것이라며 얼버무리지만, 어딘가 개운치 않다. 친구가 동생은 잘 지내냐는 질문을 했을 때 마뜩치 않게 변하는 희정 얼굴은 곧 자살예방센터에서 한 환자와 머리채를 잡고 싸우는 장면으로 연결된다. 마치 자신에게 잘난척하는 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싶다는 심정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이 컷의 연결은 <수성못> 속 솔직한 감정들이 날 것 그대로 떠오르는 방식이다.
서울로 편입시험을 보러갔던 날의 에피소드 역시 유사하다. 희정은 시험이 끝나고 복잡한 지하철 노선표를 보며 헤매다가 자신의 고향도 대구라며 접근한 한 남자에게 위협을 당한다. 희정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의 지갑을 빼내는 남성의 시선은 공포 그 자체처럼 보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컷에서 희정은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는다. 홀로 앉아 무표정하게 햄버거를 먹는 그의 표정에서 그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지갑을 찾았는지, 아니 그가 지금 괜찮은 것인지 등을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을 때 으앙 터져버리는 그 울음소리는 그가 경험했을 공포의 실체를 솔직하게 보여주면서 그의 목표를 응원하게 한다.
그의 절망이 우리에게 더욱 깊게 다가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이 솔직한 청년이 자신의 목표대로 무엇인가가 있는 곳으로 가길, 그리고 그곳에서 겪을 공포가 짐작은 되지만 그래도 숨을 쉴 수 있길 바란다. 희정은 편입시험장에서 누군가 시험이 너무 어려웠다며 볼멘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 씩 웃음 짓는다. 자신감에 차 보이는 이 표정은 그가 시험을 꽤나 잘 보았을 것이라 예상케 한다. 그러나 결국 희정은 편입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서 그가 잘보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극명한 수준의 차이였음을, 홀로 일을 해가며 지방에서 공부하는 것은 그의 목표에 도달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사실을 깊게 각인 시킨다. 기타치는 아저씨가 수성못에 빠진 후 기타소리가 들리는 이는 못으로 홀려 들어간다는 영목의 말이 희정이 기타소리와 함께 기타치는 아저씨의 모습을 보는 것과 오버랩되는 것은 그에게 이 공간이 얼마나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4.
재미있게도 대구는 근대의 문화유산을 도시의 한 가운데 배치했으면서도 머리 위로는 모노레일이 달리는 시간적 생경함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구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이미지로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그곳의 부분 부분을 세세히 따지고 보면, 정치 사회 문화에 있어 결정되어 있는 듯 보이는 대구의 이미지는 사실 그 지역이 아닌 많은 이들이 그곳에 원하는 이미지로 결정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지역의 박제, <수성못>은 바로 이 부분에 있어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재미있는 영화이다. 수성못에서 일하는 희정은 자주 존다. 나른한 곳, 긴장감이 없는 곳,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만 사람들이 주목하는 곳. 바로 이 조용한 유원지는 희정을 움직이기에 너무도 안정적인 곳이지만 그곳을 벗어날 방법도 요원하다. 이 갈등의 순간들을 <수성못>은 결코 무겁지 않게, 그리고 감정들의 여유로운 배치를 통해 배열하고 있다. 이 상반된 감각들의 발랄함과 생기, 대구에서 나고 자라 대구에서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했다는 유지영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해야하는 이유이다.
<수성못> 2018.4.19. 개봉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