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시간은 지금 몇 시?
박태식(영화평론)
이 달에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아름답다고 하니까 선뜻 수려한 화면에 애절하고 눈물 짓게 만드는 애정물을 기대할 수 있겠으나 사실 이 영화는 그런 성격의 사랑 이야기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신기하리만치 낯선 내용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오랜 세월 외로움에 익숙해 지다보니 약간 이상해진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과정을 다루기에 그렇다. 2014년 부산 국제 영화제 뉴커런츠 분야에서 최우수작으로 꼽힌 <당신의 시간은 지금 몇 시?>(What's time in your world?, 사피 야즈다니안Safi Yazdanian 감독, 극영화, 이란, 2014년, 101분)라는 작품이다.
2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떻게 변했을까?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라 노래했던 정지용의 시어詩語처럼 파리에서 오랜만에 돌아온 골리(레일라 하타미)에게 고향은 낯선 곳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죽었고 옛집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낡고 칠이 벗겨졌으며 심지어 고향 역에 내려서 집으로 가는 방향마저 헷갈릴 지경이다. 그런데 묘한 일이 벌어진다. 액자 가게를 운영하는 파르하드(알리 모사파)가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나 한사코 자신이 골리의 초등학교 동창생이라고 우기기 시작한다. 그녀의 기억 속에 파르하르는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골리는 파르하르의 친절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단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다. 그 후로 일이 이상하게 꼬여만 간다.
파르하르는 집요하게 골리의 뒤를 쫓아다니면서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잘 알고 있는지 증명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골리의 맘은 점점 파르하르에게서 멀어지고 두 사람의 엇갈린 감정은 영화 내내 도저히 합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영화의 기조가 사랑 이야기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거기에 더해 사피 야즈다니안 감독은 “당신의 시간은 지금 몇 시?”라는 질문으로 ‘기억’에 대한 탐구를 시도한다. 인간의 기억은 과연 어떻게 형성될까?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경험을 한다. 매일 세 번씩 꼬박꼬박 식사를 하고 등교 길에 버스와 전절을 타고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졸업 후엔 직장생활을 하며 숨 가쁘게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중에 가끔은 아프고 가끔은 슬프고 가끔은 기뻐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순간들이 인간의 뇌에 자극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전부 기억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면 뇌에 과부하가 걸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망각은 하늘이 준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잊히지 않는 기억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기억들은 어떠한가?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친구들과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담임선생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했던 날, 입시에 실패해 잔뜩 풀이 죽어있을 때 아버님이 용기를 내라며 등을 두드려주셨던 날, 입대와 제대를 하며 걱정되고 시원했던 날, 처음 외국에 나가는 비행기를 타며 가슴 설레었던 날, 어머님이 임종하실 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났던 날 등등, 그 모든 날들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그 날 사람들과 나누었던 말과 주변 풍경 뿐 아니라 심지어 공기 중에 떠돌던 냄새까지 자세하게 기억난다. 기억이란 그처럼 이중적인 면을 갖고 있다.
야즈다니안 감독은 기억의 이중적인 성격을 묘사하기 위해 계단을 사용 한다. 영화 중반쯤 골리와 파르하르는 어느 골목 계단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골리는 아래로부터 위로, 파르하르는 위에서 아래로 걸어 내려와 중간쯤에서 마주선다.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진 두 사람이 이제야 비로소 기억의 저편으로 다가가 진지한 만남을 시도하게 된 것이다. 사실 어린 파르하르가 골리를 바라보며 가슴 설렜던 아름다운 초등학교 시절은 골리에겐 그저 스쳐지나간 인생의 단편일 뿐이었다. 마치 매일 세 번씩 꼬박꼬박 했던 식사의 범주에 머무는 기억이라고나 할까?
막 일이 잘 진행되려는 순간, 파르하르가 내민 선물을 열어본 골리는 불같이 화를 내고 파르하르는 좌절하고 만다. 엉뚱한 선물을 들이밀어서이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시절 같은 시간과 장소에 있었지만 완전히 다른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 인생이란 게 딱 그렇지 아니한가?
20년간 고향을 떠나있으면서 골디의 기억은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세월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은 고향에서 옛 기억의 단편들을 모아 그럴 듯하게 완성해내는 일도 결코 쉽지 않다. 감독은 왜 골디가 파리에 갔다가 돌아왔는지 일체 설명하지 않는다. 또한 그녀가 앞으로 고향에 계속 머무를지에 대해서도 속 시원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그저 시간과 장소를 부지런히 바꿔가며 그녀의 기억을 일깨울 뿐이다. 생략의 묘미를 잘 아는, 세련미가 돋보이는 연출력이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인연 덕분에 부산 영화제 기간 중 어느 모임에서 감독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사위원 입장에서 수상작이 결정되기 전에는 감독들과 만나는 일이 금지되었지만 수상까지 한 마당에 감독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감독은 내게 머리를 숙이면서 수차례 감사의 말을 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대해 특히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 즉 골리가 여기저기 수리를 하던 그녀의 옛집에서 이번에는 완전히 다른 형태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충돌한다. 감독의 말인즉슨 모든 사람은 모름지기 장소와 시간과 사람에 대한 기억의 단편들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그 단편들이 합쳐져 하나의 완성된 기억에 이르기는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스포일러(spoiler: 영화를 볼 때 방해가 될 만큼 지나치게 친절한 사전 정보를 칭하는 말)를 의식해 함축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필자의 입장을 독자들은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다. 파르하르는 골디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녀의 삶에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다정다감한 성품의 파르하르는 골디 어머니의 말년을 죽 지켰고 그 과정에서 골디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던 까닭이다. 초등학교 때 품었던 첫 사랑의 기억이, 어머니의 말년을 지키고 그녀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보다 구체화 된 셈이다. 사랑은 그렇게도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별난 사랑 이야기가 그런 대로 낯설지 않았던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도 한 때 할머니가 잘 보아두었던 동네 소년을 나중에 손녀사위로 맞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세상 인연을 보는 눈이 그만큼 매섭고 정확하다는 뜻이다. 요즘은 찾기 어려운 경우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놓고 보니 이란도 우리나라의 풍습과 비슷한 면이 있었다. 아니, 영화 곳곳에서 어딘가 우리에게 익숙한 냄새들이 풍겨 나오는데 눈을 크게 뜨고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이란 사람들의 생김새는 비록 서양에 가깝지만 그들의 정서는 확실하게 우리 쪽이었다.
골디 역을 맡은 레일라 하타미는 <시민과 나데르의 별거2011>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세계적인 명성에 맞게 대단히 훌륭한 연기가 돋보이며, 코미디 영화에는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배우다. 파르하르 역을 맡은 알리 모사파는 칸 영화제 초청작인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2013>에서 탁월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인생의 깊이를 깨달은 듯 진지한 연기의 모범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실제 부부라는 사실을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처음 알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므네모시네 라는 여신이 나온다. 이 여신은 기억을 관장하는데 저 먼 바다 건너 동굴에서 언제나 잠을 자고 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경우 전령을 보낸다. 하늘을 나는 샌들과 투구를 쓴 전령 머큐리 신은 동굴 속에 깊이 잠든 여신을 깨워 잊었던 기억이 무엇인지 자세히 듣고 제우스에게 돌아온다. 신화가 알려주는 내용은 간단하다. 인간의 머리 깊은 곳에 기억이 저장되어 있고 필요한 때가 오면 다시금 수면 밖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파르하드 역시 각고의 노력으로 골디의 의식 속,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기억에 다가서려 한다. 하지만 매사에 미숙한 탓에 그녀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골디를 향한 그의 사랑도 시들어가려 한다. 한 때 찬란했던 사랑이 그 빛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그렇게 관객에게 애틋함만 안겨주더니 감독은 결국 우리를 평온한 길로 이끌었다.
“세상에는 이런 사랑도 있습니다.” 감독이 하는 말을 우리 다섯 명의 심사위원 모두 정확히 들을 수 있었고, 만장일치로 최우수상 수상을 결정했다. 눈요기 블록버스터와 정체불명의 퓨전 사극들이 판을 치는 요즘 시절에 발견하게 힘든 보석 같은 영화다.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