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아버린 언어를 내다 버리고”
본디 졸고를 풀어나가기로 맘먹은 건 어떤 흥미로운 ‘패러디’ 영화에 관한 소식을 접하게 된 바로 그 순간에서부터였다. 물론, 공연한 망상에 그칠 뿐이었던 구상일랑 지금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고 하겠다. 그로부터 미처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일이거니와, 실체를 부여잡을 수 없었던 이 모호한 청사진은, 어느덧 텍스트의 세례를 경유하는 즉시로 완전히 뒤집어져버리게 되었다. 살갗을 매만져오는 구체성의 감각은 막연한 사유의 편린들을 온탕 속 비누처럼 풀어헤쳐버리기에 충분했다. 상당한 시일이 흐르는 동안 부유하는 알갱이들은 점점이 배열을 달리하며 녹아 붙기 시작했고, 이제 지금-여기에서 이렇게 새로운 형태로 재구되고 있다.
그간 꾹 눌러 두었던 많은 이야기 가운데서도, 즈음하여 가장 중요하리라고 간주되는 건, 패러디라는 용어의 ‘무람없는’ 사용이 확실히 무모하다 못해 때론 꽤나 위태로운 결과를 낳기까지도 한단 점이다. 때로 그건 ‘텍스트와 전연 상관없는 공허의 수사들’을 논의의 무대 한 가운데로 불러들이는 착란의 계기로 복무하게 될 여지마저 내포하고 있다. 아무렴 사윌 둘러봐도 끝내 그 흥미로운 패러디 영화를 발견하기 힘에 부쳤던 필자가 맞닥뜨린 경험처럼 말이다.
사실 패러디란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모종의 근본 경험과도 같은 것에 해당한다. 이해를 돕고자, 이를 조금 달리 번역해 볼 수도 있을 터이다. 말하자면 모든 예술 텍스트들이 본래의 기원으로부터 벗어나 이질적인 맥락과 지형 속으로 스며들어 자리하게 될 때, 지극히 자연스레 그 형질의 재구에 ㅡ내지는 나름의 번역에ㅡ 맞닥뜨리게 되고야 말리라는 점에서, 어쩌면 패러디야말로 생성변형의 역능을 본질로 취하는 예술작품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표지자란 말이 그리 큰 거부감 없이 성립할 수도 있으리란 뜻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가없이 꿈틀대고 있는 변형-욕망의 에너지를 거세당한 채로 단지 ‘무엇에 대한 외견상의 모사’라는 협소한 국면 속에서 다루어지게 될 때면, 되레 텍스트가 가진 가능성과 전망을 사장시키는 부정의 계기로 복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아무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환언하자면, 소위 ‘속류-패러디’를 열쇠언어로 동원해서 영화 텍스트에 다가서길 시도하는 경우, 불가피하게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단 뜻이다.
먼저 원본(들)을 상정한 연후에, 텍스트와 그것(들) 사이의 공통점/차이점을 발굴하는 일을 제1명제로 삼아서 감상에 천착하다보면, 다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 그 ‘양상’(how)만을 식별하는 행위에 쉬이 매몰될 뿐이요, 어째서 그것이 달리 형상화되어야만 했는지, 곧 그 심층의 ‘원인’(why)을 따져 탐문하는 데에까진 좀처럼 가닿기가 어렵단 게 진실이다. 설령 목표지점에 어떻게든 이르게 된다고 해도, 이미 벌써부터 한계는 명확하다고 할 것인데, 공차라는 말만으로는 차마 협소화되지 않는 허다한 텍스트의 리듬들을 ‘진즉 망실해버린’ 뒤이기 때문이다.
하여 패러디란 말을 섣불리 내뱉기에 앞서, 조급한 태도를 버리고 부디 ‘영화를 영화답게’ 바라보려는 진지한 시선을 가질 것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영화답다니? 한결 쉬이 번역하자면, 영상문법과 그 언어장치들을 동원해 저마다의 문제의식을 독특하게 형상화해낸 개별 영화 텍스트의 구체적인 살점들을 촉지적으로 어루만지는 자리로 이행하는 편이 더 옳겠다는 뜻이다. 비평은 이 살점들을 낱낱이 곱씹으며 ‘텍스트가 밝히 드러내는 데에’ 성공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선 텍스트가 자기논리의 수준과 한계영역 안에서 미처 다뤄낼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가름막 ‘너머의’ 희미한 것을 붙들고 씨름하는 실천적 사유행위다.
“뒤틀리고, 또 뒤틀리다 못해서”
하지만 패러디란 말을 폐기하고, 또 그 공백영역을 벌충하여 갈음할 부푼 기대감을 머금고 <어둔 밤>에 다가선 끝에 필자가 마주하게 된 건, 굉장한 난감함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ㅡ흔한 B급 영화가 안겨다줄 법한ㅡ 난잡스러움이, 좋게 말하면 허다한 요소들의 ‘실험적인 뒤섞임’이 무어라 언어화하기조차 까다로운 당혹스러움을 경험케 했다고나 할까. 확실히, 이 영화는 요소들의 층위를 넘나드는 다기(多岐)적인 뒤섞임으로 충만하다. 모든 영역들에서의 모든 뒤틀림, 좀 더 과격하게 말해본다면 ‘뒤틀림 그 자체를 위한 영화라는’ 말도 혹 성립할 성싶다. 무엇보다도 ‘구성’부터가 문제적이다.
혹 <어둔 밤>의 구성을 3.5 꼭지로 구획해본다면 그런대로 적절한 요약이지 싶다. 조빙에 의해 촬영된 안 감독의 제작(준비)기, 또 민수에 의해 촬영된 상미넴 감독의 제작(준비)기, 더불어 조빙에 의해 촬영된 상미넴 감독의 영화, 그리고 말미에 ㅡ엔딩 크레디트와 아울러ㅡ 덧대어진 ‘실제 영화의 제작기(인물 인터뷰)’ 정도가 될 테다. 첫 꼭지는 1세대 동인들에 의해 진행된 것이고, 두 번째 꼭지는 그들의 작업을 수용해 나름대로 재해석한 후 전유해낸 2세대 동인들에 의한 것이며, 제작(완성)된 영화는 굳이 따진다면 두 세대의 합작이라 할 만한 것이다. 보시다시피 각각의 성격이 개별적이다. 더하여, 말미에 덧붙여진 영상은 얼핏 보면 일견 일련의 모든 작업들의 후기적 성격으로 덧붙어진 곁-텍스트(para-text)처럼 보인다. 허나 심지어 여기에서조차도 실제인물과 작중인물의 구분은 대단히 혼연한 것으로 다가온다. 적확하게 말하자면 사실 그마저도 ‘전체영화의 일부’인 셈이다. 조금 달리 번역해본다면, 이 마지막 지점까지를 아우르는 모든 이질적이고 자율적인 부분들이 일견 불가능한 연합을 통해 비정형적인(informe)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게 곧 <어둔 밤>의 구성이 가지는 의의라고 하겠다.
그렇담 납득하기 어려운 작업을 가능하게 한 접착제의 존재를 상정해보는 것 역시 가능한 일일 테다. 이 기묘한 접붙임을 담당하는 건 ‘숨은 카메라’다. 숨은 카메라의 존재는 안 감독과 ㅡ카메라를 내려놓은ㅡ 조빙의 대화 장면에서도 은연중에 암시적으로 자신을 현상하며, 세 번째 꼭지, 그러니까 촬영된 영화를 들여다보게 되는 국면에선 한층 더 선연하게 제 존재감을 드러낸다. 관람객의 눈에 비치는 영화의 영상은 있는 그대로 날것의 화상이라기보다는, 사실 상미넴을 위시한 스텝들이 착석한 ‘시사회장의 스크린에서 송출되고 있는’ 영상이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그 스크린을 붙들고 있는 누군가의 손을 경유해 빚어진 이미지란 뜻이다.
이처럼 은폐된 카메라의 존재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진행된 서로 다른 인물들의 작품 제작기, 완성된 제작물 한 편의 실제내용, 그리고 모든 것이 막을 내린 이후의 이야기들을 무람없이 뒤섞어 ‘한 편의 영화’로 거칠게 엮어버린다. 그러니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울퉁불퉁한 혼종의 덩어리를 눈앞에 놓고 그 성격을 무어라고 쉽게 규정하는 게 정녕 가능한 일이겠는가? 분명 다큐멘터리는 아니다. 극영화에 한 없이 가깝다지만, 마지막으로 덧대진 꼭지에서 알 수가 있듯, 작중인물과 실제인물의 경계가 극히 모호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극영화라는 단정적인 선언을 내리는 일 역시 조심스레 주저할 수밖엔 없게 된다. 아무렴 이 뒤틀림을 지칭할 방법이라곤 이미 화석화된 단단한 장르규범의 딱지를 부착하는 대신 ‘실험적’이란 잠정적인 형용어구를 바치는 수밖엔 없을 듯싶다.
이에 더하여 디제시스의 경계를 이지러트리는 요인들의 간여 역시 텍스트를 잔뜩 뒤트는 하나의 흑막이라고 하겠다. ‘군대 정착기’와 ‘할리우드 진출기’는 확실히 영화세계 바깥의 어디에선가부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새 필름을 찢고서 틈입해 온 것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이것들이 찰나를 환기하는 감각표상으로 잠시잠깐 텍스트의 전면에 등장했다 휘발되는 게 아니라, 분명 지워지지 않은 흔적을 피하조직에 닿기까지 깊숙이 각인시킨다는 점에 있다. 가령 할리우드의 세례는 렌즈의 속성조차 온전히 파악하지 못해 초점을 뭉그러트리던 조빙의 카메라에 세련된 기교의 힘을 덧입혀 준 것으로 확인된다.
끝으로, 여기에다 크고 작은 형식실험들까지 이리저리 들러붙는다. 모국어와 외국어 대사를 동시통역이라도 하듯 병렬 접속시키고, 자막환경을 180도 뒤집어 모어에 대한 외어자막을 송출하며, 보다 흔하게는 내레이션을 불어넣는다거나, 외국 히어로영화에서 착안해 쿠키영상을 집어넣는 등속의 것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로써 영화 <어둔 밤>은 정체를 종잡을 수 없는 ‘완전한 혼종’이 되어버린다.
“허물고 다시 지어 올리지 못한 자리엔 빈 웃음만이”
이러한 영화의 애매함과 부산스러움은 순전히 우연이라든지 미필적 고의 따위로부터 말미암게 된 것이 아니다. 실상 영상언어의 기법을 (본시) 완전하게 손아귀에 거머쥐고 있다는 증좌가 텍스트 면면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마도 철저한 의도와 기획 아래에, 텍스트가 실험장을 향하여 내몰리게 됐으리란 사실을 어렵지 않게 헤아려볼 수가 있다. 가령 오브제에 기대어 심리현상을 기술해낸다거나, 카메라 구도를 조작함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인물간의 관계라든지 내지는 대화내용의 깊이와 질감까지도 간단히 가시화해낼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영화의 ‘숨은 신’(카메라) 내지는 텍스트의 최종심급을 거머쥔 누군가의 능수능란함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표지들이라고 하겠다. 혼잡함이 결코 아마추어리즘의 결과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담 당최 그 의도가 뭐란 말인가? 몰입도 넘치는 스펙터클만을 제시하기도 아까운 시간에, 골이 지끈거릴만한 어지러움을 구태여 상연해야만 할 필요가 ‘과연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한 가지 명심해 둘 게 있다. 이를테면 세상의 어느 실험도 ‘허무는 것’ 그 자체를 종극목적으로 취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든 어떠한 실험의 본령은 어딘가에 가닿길 염원하며 피어 올리는 격렬한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다. 환언하자면 주어진 경계선이나 가름막 안팎을 소동케 해 교란하려는 건, 그것 너머에 실재하는 어떤 ‘새론 지평’에 발돋움하고픈 곡진한 욕망에 근거한단 뜻이다. 그렇담 역으로 말해서 이 신기원의 청사진을 그나마 흐릿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는 방법이란 그 몸부림의 ‘국면들’을 소상히 지켜보는 데에 있다고 할 테다.
하지만 바로, 바로 이 점이 걸림이 된다. <어둔 밤>에서 텍스트의 지층이 갈라지고 지형의 왜곡이 초래되는 국면들을 곰곰이 살펴보아도, 특기할만한 공통인자를 발굴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뭔가를 ‘어떤’ 방식으로 넘어서고자 일을 벌이긴 벌였으나, 사실상 그 스스로도 자신의 욕망의 현주소를 충분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에서부터 빚어진 문제가 혹 아닐까 싶다. 어쩜 그 ㅡ극복할 대상으로서ㅡ ‘뭔가’에 대한 사전 이해란 게 생각보다 부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의 유비를 동원해 좀 더 쉽게 이해볼 수도 있겠다. 정박한 섬을 벗어나고자 드디어 배를 끌고 파도가 들끓는 바다 위로 나왔는데 정작 옮아갈 목적지를 정해두지도 않았다든지, 좀 더 심하게 말한다면, 아직까지 미숙한 지형이해 탓에 암초에 걸려버려 그만 해안선을 벗어나지도 못한 셈이라고 일러둘 법도 하다.
어쩌면 ‘웃음’이 면면이 그리고 부단히 강조되고 있는 것 역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처치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러니까 잔뜩 부풀고 늘어나다 못해서 터져버린 주머니의 입구를 잠가버릴 ‘임시적인’ 매듭으로써 말이다. 확실히 텍스트가 자아내는 웃음은 사유의 진전을 견인해내는 반성적인 빛깔의 웃음은 아니다. 단순히 소재 중심의, 더러는 콩트와 제스처에서 기인하는 지극히 소비적인 성격의 웃음들이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옳을 게다. 환언하자면 그 순간순간의 신파적인 감각을 자아내는 일회성의 웃음들 말이다.
다방면에서 시도되는 영화적 실험의 급진성에 비한다면 갈 곳을 잃은 허술한 매듭은 아무렴 아쉬운 지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만일 이 영화의 항해를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노정에서의 ‘과정적 산물’로 인식하고 안아 들인다면, 우린 파도의 진자운동 앞에서 힘겹게 낑낑대는 모습을 들여다보는 일만으로도 상당한 자극을 받을 수 있을 터이며, 나아가선 조심스런 응원과 격려의 시선을 보내는 일 역시도 가능하게 될 테다. 그것은 비단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한 명의 영화인이 안에서 밖으로 부단히 부대끼며 껍질을 찢고나오는 성장과정의 진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좀 더 확장된 맥락에서 인식해보자면 그 진통은 영화라는 영토의 국경지대로 슬며시 나아가서, 제 작은 몸을 어느 한 점(point)에 부딪으며, 목하의 경계선을 미미하나마 확장하기 위한 욕망에서 말미암은 것일 게다. 밀려나다 만 그 지점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운명을 이후의 작업들을 통해 기대하며 살펴보는 것도 아무렴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지 싶다-.
글: 남유랑
비평가. 1986년 출생. 본명은 남병수, 필명인 유랑은 유목늑대라는 뜻을 가진다. 문자 그대로 사회적 짐승인 늑대의 이미지에서 착안한 이름이다. 늑대는 홀로 쏘다니며 고독한 단독자의 길을 열어가지만, 자유로운 발길이 내딛는 걸음은 언제나 공동체의 생존이라는 목적에 닿아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초상이다. 만일 주된 관심사에 대해 묻는다면, 긴 설명 대신 두어 가지 화두로 갈음해볼 수도 있겠다. 먼저는 비평의 비평다움 곧 에세이도 논문도 아닌 비평이 과연 무얼 할 수 있으며 또 어떤 몫을 감당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일 테며, 다음은 다분히 관념적인 정치철학의 선언 대신 예술이 제시할 수 있음직한 실존적·연대적 구원의 가능성을 끝끝내 소명해내고야 말겠다는 갈증이라고 할 테다.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 당선, 또 같은 해 제37회 영평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 비교문학협동과정에 재학 중이며,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총무간사로 사역 중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