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영화의 적
- <또 하나의 약속>
글. 정재형(영화평론가, 동국대교수)
<또 하나의 약속>은 희망의 시동을 건다. 운전석에 앉은 김태윤감독은 이 영화를 정치적 의도로 만든 것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관객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각을 주는 영화라고 판단한다. 그게 대중영화다. 영화는 만든 사람이 어떤 의도로 만들었든, 정치적으로 읽으려 한다는 점을 중시하는 예술이다. 그만큼 선동성이 강한 매체이다. 공산주의영화만 선동적인 게 아니다. 대중영화 자체가 선동성을 갖는다. 예외가 있다면 예술성 자체를 추구한 예술영화만이 선동성을 배제시킨다. <또 하나의 약속>은 헐리우드 스타일의 대중영화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영화만큼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예술도 없다. 비슷한 매체인 문학과 비교하면 영화의 선동성은 수백 배는 될 것이다. 대중소설 <도가니>와 대중영화 <도가니>의 반응을 비교해보면 금새 알 것이다. 소설이 나왔을 때는 조용하더니, 영화가 나오니까 온 관객들이 들끓고, 과거사가 들춰져서, 그때 했던 재판의 공정성을 다시 묻더니, 결국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새로운 법안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그게 영화의 힘이고, 매력이다. 영화는 그저 조용히 감상하고 끝나는 그런 매체가 아니다. 사람을 흥분시키고, 결국 현실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가 정치성이 있는냐, 없느냐의 성분 검사는 그리 유효하지 않다. 오로지 약발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현재까지 <또 하나의 약속>의 약발은 성공적이다. 그동안 대기업의 횡포에 억울해하던 가슴 앓이병 환자 관객들은 대부분 치유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대기업 사원 하나가 영화는 사실을 왜곡했다고 내용물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추세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약을 먹었는데 오히려 건강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에, 설사 약성분이 잘못 되었다 할지 라도 지금의 상황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거짓 약이라도 효과를 보는 플라시보 효과도 실제 있지 않는가. 단지 후유증이 나타나거나 약을 먹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 상황이 반전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곧 약은 판매종료될 것이고, 성분의 진위여부는 사후 약방문이 될 공산이 크다.
고로, 영화에 진실은 없다. 앞으로 진실 따위를 논하는 일은 없기로 하자. 이런 극장-관객현상을 경험해 보고도 내용이 왜곡되었느니, 어쩌니 하는 시비는 더 이상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의 왜곡 여부를 묻지는 않겠다. 하지만 심각한 영향력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는 대기업이 직원의 산업재해를 끝까지 부인하다가 결국 인정하고 만 공단 대 피해자 재판의 일부를 다루고 있다. 상구(박철민분)는 말한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영화는 희망을 제시한다. 대기업의 피해자들은 앞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낙관론을 믿게 한다. 지금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는 대기업의 피해자들은 아마 이 영화를 보고 그 지점에서 눈물을 흘리고 감동했을 것이다. 대다수 정상적인 관객들이 이런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 감동 받지 않는다면 그건 이상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소수의 약자가 다수의 힘있는 권력의 횡포와 싸워서 이기는 정의로운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마 당사자가 아닌 권력자들, 사회 지도층들도 이런 영화를 보고 감동할 것이다. 그건 보편적인 인간의 착한 감수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상구는 건실한 운전기사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가장이다. 딸 윤미(박희정분)는 가난해서 대학을 못가고 대신 대기업에 취직해서 빈곤을 갚아보려하는 효녀다. 윤미는 백혈병에 걸리고 죽는다. 이실장(김영재분)은 돈을 일부 떼어주면서 사건을 마무리한다. 이후 상구는 윤미가 산업재해라는 사실을 알고 공단에 청구하지만 거부 당한다. 그는 억울함을 호소하고 재판에 이기기 위해 노무사 난주(김규리분)를 찿아간다. 난주는 변호사와 같이 재판에 임해 결국 산업재해를 인정받는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대사는 정말 많은 오해를 낳기에 충분하다. 관객들은 이 말과 영화의 멧시지에 흥분하기 시작한다. 피해자들이 실제 대기업을 이기는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약자들이 대기업을 계속 이길 것처럼 관객들에게 희망을 준다. 그 희망은 언제까지 갈까? 실제 피해자들에게 희망적인 결과가 갈까? 그 희망의 열매를 항상 따먹는 사람들은 약자들의 정의를 팔아먹으며 현실을 비판하는 정치가들이다. 그들은 기득권 정치세력을 비판하기 위해 영화를 이용한다.
도대체 대기업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봐도 영화대로라면 사회적 약자들이 대기업을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겨우 판결 하나 유리하게 난 걸 갖고 수십건의 산업재해 재판에서 이길 거라고 낙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 영화를 현실에 기반한 허구영화라고 말하는 게 솔직한 표현이다. 헐리우드 미학처럼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영화로나마 그려보는 것. 솔직한 대중영화인 셈이다. 영화는 꿈이고, 피곤한 삶을 위로한다.
이 영화가 관객들을 선동하여 갑자기 대기업에 데모라도 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감독이 말했다시피 전혀 정치적 의도로 만든 영화가 아니다. 목적이 있다면 돈을 버는 것이다. 흥행이 많이 돼서 돈을 벌어야 제작비도 갚고 다음 영화도 만드는 거다. 그게 이 영화가 짊어진 운명이지, 정치운동이 목적은 아닌 것이다. 이처럼 투명한 영화를 왜 일부 언론에서는 정치적으로 볼까? 그게 다 정치적 활용도 때문이다. 이 상업오락영화를 대선에 활용하려는 정치 세력에 의해 영화가 정치선전화된다.
그러니, 정치는 영화의 적이다. 정치는 영화의 순수오락적, 상업적 의도를 여지없이 부숴뜨린다. 이실장은 말한다;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가 본질이죠.” 맞는 말이다. 대기업이 주장하는 것이고, 주류언론이 주장하는 것이고, 국가가 주장하는 것이다. 경제가 모든 것의 본질에 선행한다. 결국 대중영화는 예술이 되지 못하고, 오락이 되어 경제에 기여할 것이고, 정치에 이용당해 역시 경제에 흡수되고 말 것이다. 영화는 그저 소비되고 만다.
영화가 좀 더 정신영역으로 승화될 수는 없을까? 이런 소재는 좀 더 진지하고 객관적으로 드라마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실장과 조폭들의 존재는 대기업을 서부영화에 나오는 악당에 해당하도록 각인시킨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리고, 팀장 교익(이경영)마저 병에 걸리는 설정 역시 작위적이다. 그가 인간적으로 대기업을 배신하지 않는 설정은 잘 된 것 같다. 바로 그런 관점이다. 대기업도 좀더 인간적인 면을 많이 부각시켰어야 한다. 그들 나름대로의 고충을 털어놔서 드라마 속에 녹였어야 한다. 지금은 선악이분법의 고전영화적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재판정에서의 일방성도 여전하다. 이실장이 증인을 매수한다든가, 대기업측의 변호사들이 주장하는 것도 단순하다. 서로 팽팽해야 하는데 너무 일방적으로 피해자들은 정의롭고 대기업은 악당이다.
주인공과 선한 사람들의 주장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대방 악당에 대한 묘사가 너무 단순하다. 선은 무조건 악을 이긴다는 식이다. 대기업의 횡포문제가 단지 선악의 문제로 해결이 날 질문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기업의 문제는 자본의 문제다. 피해자들이 생존의 문제였듯이 대기업도 생존으로 악을 자행하고 버틴다. 그런 점에서 자본의 문제를 좀더 진지하게 풀어내지 못하고, 단지 영웅주의와 선악의 서부극으로만 풀어낸 문제의식은 다른 방향의 진지한 모색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