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영화에서 ‘기독교’라는 표상
한국영화계에서 기독교를 다룬 영화가 제일 융성했던 시기는 1980년대일 것이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를 다룬 <저 높은 곳을 향하여>(임원식, 1977), 이청준의 원작을 영화화한 <낮은 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 김진홍 목사의 사역을 다룬 <새벽을 깨우리로다>(이기원, 1989)등의 영화들이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는 당대 산업화와 함께 부흥하던 개신교의 확장이 국가조찬기도회 등으로 공적으로 승인되었던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대개 특정 목회자들의 순교나 사역을 다룬 전기 영화들이 많았으며, 비교적 이해하기 쉽도록 드라마틱한 고난 중심으로 내용을 풀어냈다. 특히 선교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대중과의 공명을 위해 감성적인 부분에 호소하는 신파성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의 영화들에서 기독교가 그려지는 방식은 대개 부정적인 함의를 갖는다. 탐욕스러운 성직자와 맹목적인 신앙만을 강요하는 성도들, 더불어 보수적인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교회에 대한 대중 일반의 비판적 평가가 영화적 개연성의 측면에서 자연스레 영향을 미친 결과로 보인다.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2005)에서 출소한 금자에게 두부를 주며 종교적으로 회유하려던 목사에게 그녀가 도리어 “너나 잘하세요”라고 일갈하는 장면은 금자의 복수의 시작점이 되면서도 영화 밖으로는 최근의 영화들에까지 지속되는 기독교에 관한 매우 양식화된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한 측면에서 <무산일기>(2010)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이다. 남한에 정착하려는 탈북자 남성이 ‘교회’라는 공간을 중심으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점, 그의 행위와 변화의 과정이 교회와의 구심력에 따라 길항한다는 점 그리고 그가 자기 의지에 따라 삶을 구성했을 때 결국 삶이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흘러가지 못했다는 점 등을 통해 기독교를 다룬 영화가 또 다른 차원의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한국에서 기독교를 다룬 종교영화는 목회자들의 순교나 사역 중심의 평면화된 서사에서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적 관점으로 발전해왔고, 때때로 ‘교회’라는 공간이 하나의 사회적 공동체로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밀양>(이창동, 2007)의 성취는 문제의식을 좀 더 예각화한 데서 이루어졌다. 단순히 기독교나 교인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아니라 구원과 속죄의 주체가 누구에게 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적 윤리의 측면에 좀 더 깊이 있는 통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간 여러 작품들에서 기독교적 신앙의 모티프들을 다뤄온 신연식 감독이 아예 ‘종교영화’를 표방하고 내놓은 <로마서 8:37>은 이러한 기독교를 다룬 종교영화의 흐름에서 어떠한 서사적 깊이를 더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2. 부순교회에 붙여진 세 개의 반박문
올해는 루터가 비텐베르크성당의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것으로부터 촉발된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이지만, 현재 한국의 개신교단은 목회자들의 부정과 대형 교회의 세습문제, 정치적 중립성 문제 등 여러 비판에 직면해 있다. 해방 이후 미국의 보수주의적 복음주의의 세례를 받은 개신교계는 엄청난 교세의 성장을 이뤄냈지만 그 결과 성장제일주의와 물질주의, 고답적인 교리 해석 등 상당히 경직된 상태로 내부적 혼란이 가속화되고 있다. <로마서 8:37>의 배경인 ‘부순교회’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부순교회는 원로 목사인 박강길 목사와 현 목사인 강요섭 목사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목사측은 강목사의 부정을 들추고 설교 내용에 꼬투리를 잡아 교단의 재판부에 면직 처분을 내리게 하려하고, 강요섭목사 측에서는 TF팀을 꾸려 이에 대응하려 한다. 전도사인 기섭은 아내의 오빠이자 유명한 목회자인 강요섭 목사를 평소 존경하던 중, 도와달라는 강목사의 요청에 TF팀에 간사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강요섭목사의 여신도들에 대한 성추문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사건의 중심에 다가갈수록 강목사에 대한 기섭의 신뢰는 흔들리게 된다.
루터가 기존의 교황청과 성직자들에 관해 가장 분개했던 것은 ‘면죄부’ 판매였다. 신 앞에 진실된 믿음 없이 돈으로 면죄부를 사서 성직자가 대리로 집행하는 고백과 회개를 통해 속죄가 완성된다는 사실이 성경을 오독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신약성서의 상당수를 저술한 바울의 사상과 공명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신득의’, 즉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마서1:17)라는 개신교의 정언명령을 확립했는데, 어떠한 구제나 행위 혹은 면죄부로도 진정한 구원에는 이를 수 없고 오직 각자의 믿음에 기초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결국 이러한 초기 기독교의 사상에서 문제 삼는 것은 첫째, 진정으로 속죄하지 않는 성직자들, 둘째, 교회라는 구조적 조직의 타락, 셋째, 회개와 자기 극복의 온전한 신앙대신 성직자에 대한 무비판적인 추종 등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이러한 세 가지의 문제를 부순교회의 상황에 등치시켜 풀어낸다. 이는 바울이 경계한 가짜 신앙이 드러난 세 가지 양태라고 볼 수 있다. 요섭은 목회자로서 극악한 부정을 저지르고도 “한국 교회에는 강한 리더십이 필요해. 내가 내 마음 편하고자 외면하는 것도 옳다고만 볼 수 없어”라며 잘못을 응징 받는 대신 사명감을 강조하여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이는 한국교회의 불성실한 성직자들이 갖는 전형적인 문제인 ‘소명’의 자의적인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가짜 소명’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각각의 성직자에 대해 최소한의 제재를 가할 수 있는 교단의 노회와 총회마저도 목사들의 권력 싸움의 상황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치적 묘수만을 계산하기에 바쁘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재판의 결과를 변경하는 ‘가짜 재판’의 담지자로서 행동한다. 그리고 개개인의 성도들은 철저한 신앙적 각성이 아닌 목회자 추종적인 태도를 드러낸다.이들이 가진 ‘가짜 평화’는 신에게서 받은 것이 아닌, 목회자를 향한 맹목적 순종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적 시선이 결여된 것이다. 그 폐해가 영화 속에서는 성추문의 피해자들로 설정된다.
기존의 영화들에서는 교회 바깥의 시선에서 교회 속에 속한 인물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다소 평면적으로 보여주는데 그쳤다면, 이 영화에서는 정치적인 수싸움이나 교회의 사유재산화, 언론 대응 등의 태도에서 지극히 세속적인 모습들을 묘사하기 위해 세밀하게 공을 들인다. 이는 외부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권력쟁투적인 교회 내부의 의사결정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선을 강화한 것인데, 내부로부터의 시선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3. 고통받은 자의 목소리를 복원한다는 것
<로마서 8:37>은 기존의 기독교 영화들과는 달리 종교적 회유의 목적이나 단순한 기독교 내부고발자의 시선을 취하는 정도에서 머무르고 있지 않다. 이 영화는 종교적 속죄에 대한 윤리적 태도를 물었던 <밀양>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으면서도 좀 더 밀도를 높인다. <밀양>에서 아들을 잃고 가슴을 쥐어뜯던 신애에게 신앙은 평온을 준 듯 했다. 그러나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유괴범 앞에서 신애는 당사자가 용서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용서를 할 수 있느냐며 울부짖는다. <밀양>은 신 앞에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를 하여야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기독교적 신앙의 오인된 적용을 지적한다. 신과 개개인 사이의 고백과 용서라는 메카니즘은 ‘죄’라는 문제 앞에 피해자로 놓이는 타인의 고통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로 진행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밀양>은 간파하고 문제제기를 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로마서 8: 37>이 더욱 나아간 지점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복원시키려는 영화적 노력에 있다. 이 영화에서 각 시퀀스을 연결시키는 편집점들은 암전 화면에 성경 구절이 떠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성경 구절들은 대개 이후에 펼쳐지는 내러티브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추측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가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출20:19)”라는 자막의 뒤로는 신과 직접 대면하기를 꺼리고 목사의 말만을 따르려드는 성도들의 수동성에 대해 각성을 촉구하는 설교가 이어지는 식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이 챕터의 분할을 연결하는 여러 자막들 중 성경 구절이 아닌 것은 성폭력 피해를 당한 여성들이 고백하는 목소리와 강요섭의 동생인 강현민의 기도의 구절 뿐이다. 성경의 구절 먼저 배치되고 서사가 뒤따르는 방식은 전체의 내러티브를 매우 분명하게 기독교적 사상에 포박되게 한다. 그러한 강력한 뼈대로서의 성경 구절과 병치되어 끼어드는 자막들이 여성 피해자들이 방송에 제보한 녹취록의 음성들에서 따온 문장들이라는 점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가끔 운동을 같이 가자고 하시면 따라 갔어요” 혹은 “내 잘못이라고 생각해요”와 같은 자막들과 함께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녀들의 목소리가 상황적 설명으로 잠깐 나오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부분에 이르기까지 전부 발화가 되도록 영화는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특히, 세 번째 피해자인 지민의 경우 성폭행을 당했던 당시의 상황이 이미지로 재현되면서-물론 전시적 태도는 아니다-그녀의 나레이션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또 어떻게 저항할 수 없었는지를 ‘말할 수 있게’ 한다. 이는 피해자인 그녀들이 믿었던 목사에게 그리고 교회의 다른 신도들에게,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제대로 발화하지 못하고 입막음을 요청받았던 것과 대조된다. 독실한 교인인 지민의 아버지는 지민이 강간당한 사실을 알고도 미국 유학을 가라고 했고 떠밀리듯 떠난 유학 생활에서도 결국 내면의 고통을 숨길 수 없었던 그녀는 상처 입은 채 돌아왔었다. 피해자의 목소리를 빼앗고 가해자가 손쉽게 신과의 화해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사이 그녀들은 고통에 신음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녀들의 목소리가 성경구절과 함께 병치되는 것은 진정한 속죄와 구원에 이르는 길이 결코 개인의 죄과를 간과하고는 가능하지 않음을, 즉 개인이 신에 대한 용서를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강요섭목사가 “내가 더 위대해지지 못했다고 비난하면 어쩔 수 없지”라고 비겁한 말로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 할 때, 모든 죄가 신의 은총 아래 변제될 것이라는 두둔 대신 “그냥...범죄자예요, 형은.”이라고 기섭이 단언하는 부분은 그런 의미에서 영화가 진정한 종교적 윤리를 어느 가치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가해자에 대한 문제제기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지민은 ‘거짓 평화’ 혹은 ‘독버섯 같은 허영심’으로 가려왔던 지난날의 맹목적 신앙에서 벗어나 자신이 신이 아니라 우상을 섬긴 것에 불과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여유를 얻게 된다.
4. 두 개의 ‘바울-되기’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이자 바리새인파였으며 초기 기독교 공동체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이다. 그러나 우연히 신의 계시로 회심한 이후-바디우식 표현으로는 ‘사건’을 겪고 난 이후-그는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꾸고 신약 성경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도가 된다. 바디우는 바울의 가르침을 두 가지로 범박하게 집약한다. “1.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니다. 2. 우리는 더 이상 율법하에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다.”(알랭 바디우, 『사도바울』, 새물결, p.145) 위의 첫 번째 조항이 종종 개신교도들에게 신 앞의 속죄에 대한 오인된 이해를 끌어내는데 이러한 예의 대표격인 바로 <밀양>의 유괴범에게서 볼 수 있는 태도였다.
이 영화가 제시하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윤리적 실천은 위의 두 번째 항과 관련된다. 앞서 설명한 영화 속 자막들에 성경 구절과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병치되고, 강요섭의 동생 강현민의 기도 노트의 한 구절도 제시된다. “기도는 계속되는 의지의 표현.. 모든 생각의 방황을 멈춰야한다.”라는 구절은 형을 위해 기도하다 죽어간 벙어리 동생이 끝내 매달리고 있었던 고통스런 기도의 의지 그 자체였다. 전달되지 못했던 현민의 목소리를 자막으로 복원하면서 비로소 영화는 그에게도 자리를 마련해준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왜 가련한 현민은 고통 속에 기도하다 불행하게 죽었으며, 왜 강요섭 목사가 아니라 선한 일에 몰두하려 했던 기섭이 눈물을 쏟으며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는가.
<로마서 8:37> 속 고민에 빠진 신앙인인 기섭은 바디우가 말하는 사도 바울에 유비될 수 있다. 바디우는 비기독교인으로서 비기독교적 저작으로 사도 바울에 대해 다루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바울이 보여준 전대미문의 몸짓은 공동체-민족, 도시, 제국, 지역 또는 사회 계급-가 장악하고 있던 진리를 그로부터 벗어나도록 한 데 있다. […]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보편성의 산출 조건들과 관련해 그것을 정립하는 힘 안에 포섭된 주체의 몸짓이다.”(위의 책, p.18)
남자든 여자든,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중요한 것은 차이들이 그들에게 은총처럼 도래한 보편성을 담지하는 것이다.(위의 책, p.206)
요컨대 그는 당대의 유대교적인 진리-예루살렘이라는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드는 개별적 주체성의 사고를 강조한다. 기섭은 부순교회로 상징되는 기존 교계에 문제제기를 통해 그들과 손쉽게 동업하기를 멈췄다. 그러나 또한 그러한 행위는 또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그리스도교적 신의 보편성은 ‘은총처럼’ 도래한 것이자, ‘값없이 의롭다’(로마서 3:24)함을 받은 것으로 기섭에게만이 아니라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억울함을 대신 구제 하겠다는 기섭의 의지도 결국 타인을 정죄하는 것에 불과하며, 이러한 자신의 죄를 들여다보는 행위를 통해 기섭은 더 큰 자기성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섭의 참회는 선한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그 당위가 어느새 또 다른 속박으로 혹은 또 다른 우상처럼 자신을 지배해왔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바디우적 ‘바울-되기’의 또 다른 판본은 현민에게서 이루어진다. 그는 세속적인 유명을 얻고도 끊임없이 죄악의 길로 가는 형 강목사를 위해 기도한다. 이 기도는 전심전력의 기도로서 아무 것도 자신의 노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고백하는 주체의 낮아짐을 설명하는 것이며, 도리어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더 큰 사랑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직 사건만이 주체를 사랑할 수 없는 죽은 자아가 아닌 다른 것이 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법은 주체화(확신)에 의해 가능해지는 방식으로 타자들과 모두를 향한 자기-사랑의 힘을 전개하는 데 있다. 사랑이랑 정확히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 바울의 사유 속에서 사랑이란 바로 자기-사랑을 보편적으로 말 건네는 힘에 따라 그리스도라는 사건에 충실한 것을 말한다. 사랑은 사유를 힘으로 만든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라 사랑만이 구원의 능력을 갖는 이유이다.“ (위의 책, p.173)
형수는 괴롭게 죽어가면서도 끝내 형의 회심을 포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형을 위해 기도해 달라던 형수의 부탁을 현민은 실행한다. 그에게 ‘사건’은 형수의 죽음에서 왔을 것이다. 신앙은 기왕에 주어진 것이었으나 자기의 죄가 아닌 것에 대하여 자신이 죄를 자백하고 중보하는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그의 신앙은 구원받는다.
로마서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리스도교적인 주체성의 성찰로 회의하는 자, 타인을 위한 중보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을 가진 자 그리고 맹목적 중심으로 회귀하지 않으려는 자는 사도 바울의 태도와 공명한다. 이들이 기다리는 도래할 신은 이미 이들에게 승리와 구원이 주어져 있음을 기록해 놓았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제목인 <로마서 8:37>의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의 죄성을 넘어서는 사랑을 통한 구원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소개
글: 이수향
영화평론가. 2013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으며 웹진 문화다 편집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