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톡: 정재형, 이대연, 성진수, 민병선, 이수향
<무산일기>
성진수: 무산일기를 보면서 몰입을 하고봤던 측면을 이야기 하자면 단순히 탈북자의 이야기로 보이지가 않고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보였던 점이다. 주인공 전승철이 마치 지금 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착하게 살아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한다, 미덕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지키지 않는, 무시하고 살아가는 우리 이면의 모양처럼 보였다. 예로 노래방에서 딸이 나가라고 하니까 천승철이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되묻는데, “승철 씨는 승철 씨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죠? 그게 문제라고요.” 그게 어떻게 들리냐면, 네가 잘못한건 이 사회에서 어른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잘못이야. 그걸 모르는 인물이고 어른답게 살기 위해서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그 모든 것의 총체적 모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양식이 와 닿았는데, 인물을 뒷모습으로 담거나 유리창 밖에서 찍는 방식은 내가 잃어버린 누군가를 살피는, 관찰하는 대상으로 찍는, 내가 거울을 보고 나를 관찰하는, 대상화 된 양식을 가졌고, 내가 천승철이라는 인물을 보면서 서랍 속에 가둬 두었던 어떤 것들의 총아라고 받아드리게 한다. 저렇게 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지, 그런 사회를 느끼게 한다. 또 한 가지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양가성은 그 영화가 미덕으로 남았던 그 지점이, 전승철이라는 인물을 타자화 시켜서 얻게 되는 미덕이다. 탈북자에게 잃어버렸거나 무시하고 버려두었던, 그대로 탈북자를 타자의 지점에 놓아야만 가능했던 영화로 보여서 타자를 재현하는, 혹은 영화가 타자를 타자의 지점으로 놓았을 때 윤리적인가 라는 생각이 든다. 타자를 타자의 지점에 놓았을 때는 내 모습의 타자도 몰입시켜 놓았을 때, 과연 타자와 주변과 경계를 또렷이 하는가, 타자를 타자의 위치에 놓는 것이 과연 윤리적인가 양가적으로 느꼈다.
정재형: 참혹한 현실이다 감독의 의도가 객관적으로 보이기를 원했겠지.}
성진수: 객관적으로 윤리적인 미학이 갖는 힘을 거기에다가 놨는데 필라델피아 같은 영화는 흑인이 에이즈에 걸린 동성애자, 주변인을 다루는데 주변인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보는 사람들이 주변인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해서 보게 만드는데, 무산일기처럼 타자를 사실주의적으로 그린다는 방식과 차이가 난다.
정재형: 미학적 차이가 있다. 다르덴형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핵심적인 건 카메라가 거리두기를 안한다. 카메라는 유동적이지만 클로즈업 많고 접사를 통해서, 롱테이크가 많지만 접사를 통해서 관객을 동화시키면서 가기에 멀리 떨어져 대상화 시키는 객관적 리얼리즘이랑 다르다. 전승철도 그런 기법이다.
성진수: 똑같은 기법인데 무산일기는 동화가 안 된다. 미장센이, 동화가 되는데 대상을 미장센으로 메운다. 상징적인 미장센이 황량하고 황폐화 된 걸 통해서 마음의 상태를 미장센이 보여줬기 때문에 관객들이 동화되어 따뜻함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지 동화시켰다.
정재형: 다르덴은 그런 상징적인 장치보다는 인물에 집중한다. 무산일기는 상징적 장치가 많다. 탁월한 경지다. 마음의 상태를 환경을 통해서 계속 보여주는 기법이 상징주의적으로까지 보이기 때문에 두 가지가 결합이 되어서. 황폐한 정서에 동화되다 보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지, 동화시켰다고 본다.
성진수: 저는 그 지점을 반대로 보는데, 미장센에 그 인물을 놓다보니까 그 인물을 타자화 시키는 방식으로 미장센이 구축되어 있다.
정재형: 다르덴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런 점에선 다르다. 미장센에 대한 다른 분들의 평가를...
민병선: <혜화, 동>의 미장센과 <무산일기>의 미장센이 유사하다. 황량함이라던지 마음의 공허함을 그린다.
정재형: <혜화, 동>하고 <무산일기>는 메타포가 미장센도 그렇고 소도구도 그렇고 공간을 심리상태를 드러내기 위해 공간의 상징성을 활용한 기법은 똑같고, 개는 버려진 개나 팔려가기를 기다리는 탈북자의 개나 인간의 메타포에 비유해서 길을 잃은 개를 통해 동일시했다는 메타포 사연도 같다.
민병선: 동물이라는 게 사람이 사람한테 상처를 받으면 짐승한테 집착을 한다. 배신을 당하거나 할 때 동물을 키우면서 보상심리 같은 게 생기는데, 동물은 배신을 안 한다는 전제가 있다. 동물에 대한 해석을 하자면 혜화는, 미스터리가 풀릴 때에 그 여자가 다시 성숙해질 수 있을 거야라는 모습을 이미 동물에 대한 사랑을 통해 보이고 있다. 그것만 극복하면 성숙해질 수 있겠구나, 다가오지만 무산일기는 상처 받고 관계성을 맺지 못하는 홀로 섬 같은 남자가 그 나마 정을 쏟을 수 있는 개를 죽인다라는 거죠.
성진수: 개라는 상징을 단순하게 받는데, 전승철이 자기의 예전 양복을 입기 전 모습을 개가 상징한다고 보았다. 개와 전승철이 같은 처지였는데 이 세상에서 어울리고 친구를 만들고 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버린 것이라는 상징으로 보았다. 혜화동의 개는 대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개를 자기와 동일시할 수 있겠다라고 보았다. 무산일기의 개는 본인의 자아로서의 개의 느낌이 훨씬 강했다.
이수향: 공간에 관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영화가 현실적 상황과 맥락에 영향을 받는데 용산 사태 후 재개발, 철거, 재건축 등의 공간이 문학과 영화에 대거 들어온다. 난쏘공 식의 단순 발전과 개발이 아니고 그 속에 살던 사람들이 하나의 하부구조로서 희생이 되고 그러면서 새로 쌓아져 나가고, 뿌리에서부터 새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있던 걸 부수고 재개발 한다는 다시 건립한다는 재가 <혜화, 동>은 감정을 움직이는 영화고 <무산일기>는 리얼리틱한 공간을 다루는 것이 당대의 조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고철처럼 나뒹굴어진 저런 공간, 개 한 마리랑 쓰레기처럼 놓인 사람, 이런 메타포를 많이 쓰는구나 생각했다.
성진수: <혜화, 동>, <무산일기>에도 폐허가 된 공간이 나오는데 영화의 미장센은 공간 안에 사람이 같이 들어있는데 혜화동의 폐허가 된 집과 무산일기의 폐허가 된 공간과 방식은 차이가 난다고 느낀다. <혜화, 동>은 인물, 실존과 심리 서사가 이끌어 가다보니까 미장센이 인물 안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데 반해서, 무산일기는 뒤에서 찍거나 측면을 보여주는 등 같은 미장센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미장센이라고 느꼈다.
정재형: 무산일기는 불안정한 구도를 만들어내고 일부러 잡은 거지. 그런 의도로.
성진수: 동화내지 동일시의 문제가 인물 세트는 같지만 인물이 들어간 미장센이 다른 역할을 한다. 하나는 동일시되기가 어렵고.
민병선: 혜화가 개인적인 심리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했다면 무산일기는 한 인물이 사회 속으로 동화되고 싶은데 들어가지 못하고 사회 구성원이 되지 못하고 폐허처럼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가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
이수향: <무산일기>를 보는 사람의 시선의 윤리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그런 걸 보며 느끼는 건데, 멀게 느껴지고 거리두기로 느껴졌다면 생존조건이 달라서이지 않을까,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탈북이고 이 사회 안에 동화될 수 없다는 지점이고, <혜화, 동>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개인적으로 느낄 수 있는 상황이고 그것과 실존 자체가 너무 다른 무산일기의 상황이 텔레비전을 보며 나랑 너무 다른 사건이라 안심하게 되는 그런 상황 자체가 경계에 있다는 것이 너무 달라서 거리두기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완전히 동화될 수 없고 그들의 고통이 눈요기에 그친다고 하더라도 얘기가 되서 수면으로 보여줘서 인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진수: <필라델피아>는 경계부에 있는 사람을 중심부에 가져와서 보는 사람들이 그 사람에 대해서 동일시하게 하는 요소가 많다. 엔딩이 그래서 기반을 하는 게 있으니까 정치적으로 가있다거나 하지만 중심부로 가져와서 끌어가는 양식과 <무산일기>처럼 타자화 시켜서 거리두기를 하는 양식과는 어느 것이 더 우위에 있는가는 논의가 필요하다.
정재형: 할리우드 방식보다는 훨씬 객관적이다. 할리우드의 한계가 모든 걸 사회문제를 주관화 시키니까 주관적으로 몰고 간다. 이거는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 냉정한 시선, 마지막 장면에 긴 응시 그런 것들이 할리우드가 거세하는 부분이다. 빈공간과 응시를 메우려고, 빨리빨리 사고해서 관객이 응시를 충분히 하지 못하게. 단적으로 빈 공간을 많이 두고 공간을 상징화 시켜서 인물을 될 수 있으면 해석을 하게끔, 공간과 인물의 관계가 뭐냐, 다른 리얼리즘 영화들이 공간을 상징적으로 활용하거나 하는데 다르덴 같이 인물에 대한 팔로웡을 하면서 정서적으로 동화시키고, 현대영화가 여러 양상이 있는데 조합을 한다.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이 객관적으로 제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중심에 둔 건 사실이다. 인물에 동일시를 시키지만 할리우드처럼 스토리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을 하려는 태도를 자제하고 상황논리를 강조하려고 하는 게 보인다. 남한 사회의 이질감, 야수적인 모습으로 튀게 보인다든가 생경함을 많이 제시하려고 했다. 탈북자가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보여주려고 어눌한 캐릭터라던가, 뭔가 조화되지 못하는 면을 강조한 면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거리를 두고 관객이 천착하게 하려고 하는 낯설음, 객관성, 할리우드는 매끄럽게 주관적인 해석을 하려는, 양심이 됐든 건강한 리얼리티를 드러내려고 하더라도 주관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관객에 사고의 민주성을 전제적으로 보여주니까 방식의 차이가 있다. 많은 부분에서 동의한다하더라도 방식에 있어서는 주관적으로 유도하기 때문에 차이가 있다. 방식이 무산일기는 유럽영화나 아시아 영화의 현대영화에서 나오는 객관적인 방식, 반헐리우드 방식을 쓴다.
성진수: 방식의 차이가 위계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정재형: 결국은 그 기준이 관객이 생각을 하게 하느냐,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관객이 스스로 현실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을, 이게 진실이야 부여하느냐, 무산일기는 유럽영화적인 방식이죠. 인디영화들이 그런 점을 추구하니까.
민병선: 한국의 제작자들도 이제는 할리우드식으로 되면서 해석을 자꾸할 수 있게 하거나 그러면 쉽게 해달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게 하지 말고 심플하게 해달라, 한 남자가 탈북을 해서 문화적으로 적응을 못하는 얘기,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이 남자를 통해서 우리 한국사회가 모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인공은 이해를 못한다. 그러기에 이 남자가 틀린 건 아닌데 모순 되어 있다보니까, 교회를 열심히 가지만 노래방에서 불법을 하는 이중성,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한국사회를 보여주면서 한 남자가 동화 될 수 없는 관계성을 역설적으로 뒤집는 이중적인 의미가 나온다.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한국 사회를 포진해가지고, 한 남자가 어떻게 동화될 수 없는 굉장히 이중적인 의미들이 나오더라구요,
성진수: 만약에 그게, 저도 비슷한데 그런 방식으로 그 영화를 보면 거기서 전승철이라는 주인공은 타자로, 우리의 다른 면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된 도구처럼 되게 느껴지는 그런 면이 있다.
이대연: 아- 근데 제목이 무산일기잖아요. 이게 무슨 정보가 있나요?
성진수: 무산에서 왔죠.
이대연: 중국에서 보면 북한의 제일 잘 보이는 지명이라고 하는데, 또 우리가 생각할 때는 무산자를 생각할 수가 있잖아요.
정재형: 그걸 같이 노렸을 수도 있죠. 중의법적으로...
이대연: 근데 여기서 계속 그 얘기만 하는 건 아니고, 중간에 가보면 막 교회가 등장을 하잖아요. 저는 되게 이상하게 봤던 게 뭐냐 하면, 계급의 문제하고 구원이나 타락의 문제를 같이 겹쳐놓니까 되게 이상한 영화가 되더라구요. 중간에 보면 노래방 장면이 되게 충격적이었는데, 그 무슨 찬송가 뭐 부르다가 갑자기 디스코 버전으로 확 넘어가잖아요.
이수향: (웃음)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대연: 그게, 근래 봤던 장면 중에 손톱만큼 충격적이었거든요. (일동 웃음) 성에서 속으로 확 떨어지는 어떤 지점인데 승철이가 가지고 있는 스탠스가 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고지식할 정도로 막,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되게 착하잖아요. 중반 지나가면서 돌출되는 행동을 보이는데, 자기가 붙였던 그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던 벽보들을 확 뜯어버리는 순간부터, 그전에는 벽보들을 붙여도 붙여도 안 붙어있었는데, 벽보를 뜯어버리면서 자기 때리던 놈들도 다 제압을 하고, 친구가 되게 부당하게 하는 행위에 대해서도 저항을 하고. 교회에 가서 고백을 하고... 그러고 보니까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가 그 노래방 딸의 태도가 변하잖아요, 그게 뭐냐면 한국사회가 받아들여주는 어떤 분위기들...이런 것들이 보이더라고요. 거기다 결정적으로 사기까지 치고. 친구 돈을 훔치고. 이제 남한 사회에 살 준비가 된 느낌. 그게 어떻게 보면 타락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구원과 타락의 문제 같고, 아까 강아지가 승철의 이전 모습 같다고 하셨는데, 저는 비슷한데 좀 다르게 얘기하면, 일종의 종교에서 보면 속죄제 같은 거 있잖아요. 승철이 저지른 큰 범죄, 예를 들자면 친구의 돈을 훔친 거라든지 이거를 대신해서 죽은 느낌도 들기도 하고, 또 가장 억압했던 문제는 남한사회의 문제도 있지만 배고파서 친구를 죽였던 그게 제일 억압적인 일이었던 것 같은데, 죄의식들이 분노를 계기로 해소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남한사회의 부조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지점까지 온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어가지고, 계속적인 타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재형: 계속적인 타자는 아니다?
이수향: 저는 그, 방금얘기하신대로 승철이가 굉장히 고지식할 정도로 너무 착하고 사람들에게 맞는데도 너무 참고 꾹꾹 누르고 이런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근데 그런 행위 자체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불만이나 열등감을 반동 형성으로써 과잉되게 자신을 선한 위치에 놓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여러 가지 착한 일이 있고 나서 바뀌어서 사실 나중에 양복입고 바뀌었다고 했는데 사실 그 전에 한 번 더 바뀌었다고 봐야 되는 게 원래 북한에서 친구를 죽인 게 가장 큰 문제잖아요, 사실은, 그게 굉장히 사로잡고 있는데, 남한에 넘어와서 친구한테 "우리 이러려고 넘어왔니? 목숨 걸고 넘어왔는데 지금 뭐하는 거니?" 이런 식으로 친구한테 말하잖아요, 사람도 죽이고 바꿔보겠다고 넘어와서 되게 반동적으로 행동을 하는 거죠. 자기는 손에 때를 묻히지 않겠다는 듯 행동을 하지만, 말씀하신대로 그것이 남한에 동화되는 그런 지점 중에 하나겠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의식을 지키고 싶었던 사람이 결국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오는 일종의 폭주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저는 그래서 세 번 변화했다고 보는데 저는 그런 게 재미가 있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 문제가 재미가 있었는데, 사실 근래에 들어서 기독교에 대한 담론이나 그런 것을 영화 같은 데서 다루는 방식은 속된 말로 까야지 굉장히 쿨하고 진보적인 것 같은 느낌을 주잖아요, 근데 이 영화에서는 되게 특이하게 종교적인 부분에 있어서 그 사람들에 대해서 되게 크리티컬한 것을 최대한 자제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그 노래방 여자도, 사실은 이런 살인 고백을 했을 때 그런 자리에서, 더 일반화된 반응은, 교회 목사라든가 다른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좀 자제했으면 좋겠다라든가 여러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줄 수 있다든가, 이런 식이 좀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저는 들었거든요. 근데 사람들이 그걸 너무 막 이해를 해주고, 성가대도 막 들어오라고 하고, 그 여자는 그걸 듣고 갑자기 난 당신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이해하게 됐다고 얘기하는 부분이 저는 굉장히 어색했는데...
이대연: 다 거짓말이에요. (일동 웃음)
성진수: 굉장히 아이러니한...
이수향: 되게 어색했는데! 왜 감독이 이렇게 한사코 종교적인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의도한 게 뭔지는 사실 전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너무 크리티컬한 그런 관점을 오히려 구원의 모티프를 가져오면서, 그래도 이 사람을 풀어 준 유일한 곳으로 좀 얘길 하고 싶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반어의 반어처럼 그리고 싶었던 건지... 전 사실 그 부분이 되게 어색했거든요.
이대연: 구원은 없다...(웃음) 그런데 그 캐릭터가 어떻게 보면, <가시꽃> 캐릭터와도 좀 비슷한 것 같고.
성진수: 종교얘기 나왔으니, 자연스럽게 사이비로 넘어가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