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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섭의 시네마 크리티크] 콜롬비아 마약왕에 대한 또 다른 클리셰 - <에스코바르>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 신화(神話)를 다룬 또 하나의 영화

파블로 에스코바르(Pablo Escobar: 1949~1993). 생전에 포브스(Forbes) 지(誌)에 의해 7년 연속 전 세계 최고 부자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콜롬비아 출신의 마약왕. 콜롬비아의 유명 마약밀매조직인 메데인 카르텔(Medellín)의 설립자. 당시 그의 재산이 최대 300억 달러(현 시가로는 560억 달러)로 추정되었다고 하니 가히 마약계의 스티브 잡스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미국이 주도한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해 왕좌에서 물러나 죽음에 이르는 길에 접어들었지만, 국가를 상대로 전쟁까지 선포한 그의 전설 같은 행적들은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래서 그를 다룬 영화 리스트들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고, 넷플릭스에 의해 <나르코스> 시리즈가 제작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스페인 출신의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Fernando León de Aranoa) 감독이 작품 하나를 추가했다. 우리나라에는 <에스코바르>로 번역됐지만, 이 작품의 원제는 <러빙 파블로 Loving Pablo>다. 그와 내연관계였던 비르히니아 바예호(Virginia Vallejo)의 회고록인 『러빙 파블로, 헤이팅 에스코바르 Loving Pablo, Hating Escobar』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회고록 제목의 절반만을 제목으로 사용함으로써 에스코바르에 대한 비르히니아의 주관적이고 사랑스러운 시선을 기대하게 한다. 잔인하고 냉혹한 것으로 알려진 코카인 황제 에스코바르를 사랑했던 여인은 어떤 비밀을 누설할 것인가?

 

2. 러빙 파블로?

유명 TV 앵커인 비르히니아는 비행장과 동물원 등이 갖춰진 에스코바르의 저택에 초대됨으로써 그와의 인연을 시작한다. 그녀는 어마어마한 그의 재력에 압도당한다. 그녀가 파블로를 사랑했다면, 그건 아마도 에스코바르가 그녀에게 제공해 주었던 금품과 거짓으로 드러난 그의 자선 사업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하세계의 통치자인 에스코바르는 명예로운 훈장처럼 지니고 다닐 성공한 워킹 우먼이 필요했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에 암묵적인 계약이 성사된다. 이를 사랑이라고 믿을 사람은 누구일까? 

 

영화가 시작되면 비르히니아는 미국 마약국(DEA)의 전용기로 콜롬비아를 떠나 미국에 도착한다. 생명의 위협을 피해 조국을 등진 그녀는 그렇게 파블로 에스코바르와의 러브스토리(?)를 고백한다. 그러나 영화의 주된 회상은 그녀가 알 수 없었던, 혹은 나중에야 알게 됐던 뻔한 사실을 토대로 한다. 그래서 에스코바르의 연인으로서 그녀가 지니고 있던 시선의 장점은 은폐되거나 희석된 후, 소멸한다. 뜬금없이 마약국 요원을 유혹하는 그녀에게서 유명 여류인사의 도도함은 찾아내기 어렵다. 그리고 작품 전개에 결정적인 에스코바르의 체포에 그녀가 기여하는 방식은 실소를 자아낸다. 그녀가 미국 요원 수준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고, 미국 마약국 요원들이 수준 이하의 아마추어라는 전제하에 가능한 스토리다. 가족을 미끼로 하는 것은 수사 전략의 기본 아니던가? 결국, 이러한 내러티브의 황당함 속에서 비르히니아의 역할은 스스로를 설득하지도, 스토리를 지배하지도 못한다.

 

한편, 콜롬비아 출신인 실제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당연히 스페인어를 사용했다. 비르히니아도 날마다 스페인어로 TV 방송을 하던 방송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영어를 사용한다. 스페인 출신의 감독은 어떤 이유로 자기 작품의 핍진성을 외면하는 언어를 선택했을까? 짐작이 안 가는 바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스페인어권 최고의 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과 페넬로페 크루즈(Penélope Cruz) 부부를 기용하고 싶었다는 사실이다.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언어와 이를 배반하는 배우의 기용. 바르뎀과 크루즈의 연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지만, 그들의 어색한 영어 억양은 전체 영화마저 괴이하게 만들었다. 더 나쁜 것은 간혹 사용되는 스페인어 표현이 욕설과 비속함의 언어들로 구성됐다는 것. 결국, <에스코바르>는 페넬로페 크루즈의 남아 있는 요염함과 명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의 카리스마를 소비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3. 미국이 주체가 된 시선의 수입

<에스코바르>는 마약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콜롬비아의 마약 산업에 대한 본원적인 진실에는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콜롬비아가 왜 마약 재배국이 되었는지, 미국에서 마약이 소비된다고 미국 정부가 다른 나라에 와서 소탕작전을 펼치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지, 마약 산업에 깊숙이 관계하고 있는 미국의 은행과 화학회사들은 왜 은폐돼 있는지 등등. 

 

한때 주요 밀 생산국이었던 콜롬비아는 1950년대에 밀 산업이 무너졌다. 미국의 농업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여 다른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에 식량을 의존하도록’ 유도하는 미국의 ‘평화를 위한 식량 원조’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미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던 콜롬비아의 농민들은 파산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수익성 높은 마약 재배에 내몰렸다. 더욱이 전 세계 마약 자금의 절반 이상이 미국 은행에서 세탁되고, 미국의 화학기업이 라틴아메리카에 수출하는 화학제품의 90% 이상이 마약 생산에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에스코바르>를 포함한 많은 마약 관련 영화들은 이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에스코바르가 죽은 1993년 이후에도 콜롬비아의 마약 산업은 청산되지 않았다. 2000년 미국의 클린턴 정부는 또다시 콜롬비아 플랜이라는 이름의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였지만, 이는 마약 거래자들을 색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콜롬비아를 미국 주도 하의 신자유체제 하에 끌어들이는데 방해가 되는 콜롬비아 농민 게릴라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영화가 이런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마이클 무어 감독이 콜롬비아에 관심을 가질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인가? 

 

<에스코바르>가 불편한 이유는 더 있다. 이 작품에는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이 교묘하게 존재한다. 에스코바르의 제어되지 못하는 본능과 폭력은 야만의 콜롬비아로 확대되고, 이에 맞서는 미국의 입장은 문명의 탈을 쓰고 있다. 그래서 콜롬비아의 여류 인사는 미국의 일개 마약국 요원을 유혹하고, 그나마도 성공하지 못한다. 콜롬비아 최고의 유명인도 미국의 평범남 앞에서는 싸구려 요부로 둔갑한다. 그리고 비르히니아를 대하는 태도에서 에스코바르와 셰퍼드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린다. 노골적인 그녀의 유혹을 셰퍼드는 “난 결혼했어요.”라는 말로 밀어낸다. 페넬로페 크루즈라는 유혹의 대명사를 견뎌내는 그의 중심에 도덕과 윤리와 법, 그리고 이성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남편을 협박해 그녀를 이혼시키고 권력과 금품으로 그녀의 마음을 빼앗아버리는 에스코바르는 부도덕과 비윤리, 본능과 야만의 중간 즈음에 위치한다. 그래서 알몸의 에스코바르가 야생 동물처럼 밀림에 뛰어들고, 수렵자들이 헬기로 그를 추적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에스코바르 역할을 위해 체중을 늘린 하비에르 바르뎀의 프로 정신은 이 야생의 질주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에스코바르>는 결국 내용이 의욕에 부응하지 못한 영화가 되었다. ‘에스코바르’라는 매력적인 영화적 소재가 클리셰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각별함이 필요했는데, 감독은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자기부정이라는 이율배반의 시선 역시 못마땅하다. 라틴아메리카는 영화적으로도 그 고유의 시선을 회복해야 한다.

 

* 사진 출처: 네이버 - 영화 – 에스코바르 - 포토

글: 정동섭
영화평론가이자 영화연구자. 현 전북대학교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20세기 스페인 시의 이해』, 『영화로 보는 라틴아메리카』등의 저서와 『바람의 그림자』,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돈 후안 테노리오』, 『스페인 영화사』등의 번역서가 있음.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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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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