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이 멎을 때의 심전계의 소리는 마침표가 아니라 말줄임표 같다. 못 다한 이야기들이 미련처럼 남기 때문일 것이다. 끝은 말줄임표로 질질 끄는 것이 아니라 마침표 하나 딱 찍고 마무리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여주는 여자>는 펼쳐진 일기장에 꾹 눌러 쓴 마침표 같은 작품이다. 그래서 미련을 남기는 법 없이 단호하지만, 뒷장에 뾰족함이 지워진 뭉툭한 흔적을 남긴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해 꾹꾹 눌러 쓴 일기장 같은 작품들이 설파하는 삶은 대부분 지금 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도전적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겁먹고 움츠려든 채로 살지 말고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도전하는 삶을 응원하는 작품들은 ‘힘내라! 청춘!’이라는 카피로 응원하는 박카스 광고마냥 삶에 낙관적이다. 하지만 누구도 응원해 주지 않을 만큼 시시한 삶 속으로 쑥 들어가 보면 ‘삶의 의미’를 논할 여유 없이 생존으로 하루를 소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늘 우리 곁에 존재하지만, 늘 나와 상관없는 타인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 후미진 뒷골목 담벼락의 이끼처럼 끈덕끈덕하게 바닥에 붙어있다. 누구도 응원해주지 않는 자신들의 삶 속에서 생존의 의미이건, 그렇게나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건 박카스 한 병 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1998년 <정사>라는 작품은 사회적 금기를 깨는 파격에도 불구하고 감각적이고 철학적인 멜로로 기억된다. 쉽게 용인하지 않는 중년여성의 불륜을 정면으로 다룬 이후 이재용 감독은 주로 ‘여성’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다. 2003년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는 여성의 적극적 욕망을 중심에 두고, 여성의 욕망을 금기시하는 사회를 조롱했다. 나름 차세대 멜로 감독으로 인정받던 이재용 감독을 주춤거리게 만든 작품으로 기억되는 <다세포소녀>는 세련된 미장센과 감각적 멜로를 포기하고 장난스러운 이야기와 실험적인 장면들로 가득한 컬트가 되었다. 스스로 주류 상업영화을 포기한 듯한 이재용 감독의 실험은 2009년 <여배우들>에서 극에 달한다. 고현정, 김민희, 최지우, 윤여정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이 모였지만 허구인지 다큐인지 경계가 무너진 영화는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2012년에는 <뒷담화 : 감독이 미쳤어요>를 통해 보여주는 것과 보이는 것 사이의 경계를 실험했다. 이재용이라는 이름을 더 이상 상업영화에서 볼 수 없겠구나 하는 찰라 2014년 지극히 통속적인 <두근두근 내 인생>으로 돌아왔다. 그저 그런 상업영화는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빨리 늙어가는 자식을 둔 부모의 시선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덤덤하게 두런거리는 영화였다. 이재용 감독이 여성의 삶을 넘어 ‘죽음’을 들여다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재용 감독은 2016년 개봉한 <죽여주는 여자>를 통해 죽음의 문 앞에 가까운 한 늙은 여성의 삶을 우리 앞으로 끌어온다. 철퍼덕 소리가 날만큼 땅에 가까운 ‘박카스 아줌마’ 소영(윤여정)의 이야기다.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노인들에게 성매매를 하는 ‘박카스 아줌마’의 이야기는 꽤 오래전에 화제가 되었다. 매춘을 하는 할머니라는 충격적인 이야기와 더불어, 노인들도 섹스를 하냐는 사실이 화제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노인들은 생산성을 잃어버린 세대라는 인식이 강했다. 더불어 욕망이 거세된 세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충격이 더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하릴없이 공원 뒤쪽으로 밀려나 있지만, 여전히 그들은 살아있고 살아야 하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미래다. 이재용 감독은 엄연히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고 있지만 끝내 우리의 대기권 밖으로 몰아내고서야 안도하는 소외된 사람들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고 온다. 매춘 할머니 소영이 세 들어 사는 집에는 중년 트랜스젠더(안아주), 생산자로서의 청춘이 되지 못한 장애인(윤계상), 그리고 아비를 찾아 한국으로 온 코피노가 뒤엉켜 생판 남이지만 혈육처럼 서로를 안아주며 살아간다. 매일 매일이 생존이지만, 소영의 삶의 속도는 느리다. 박카스 한 병 따줄 노인을 찾기 위해 서울시내의 공원을 헤매는 소영을 따라 디디는 카메라의 발걸음은 느리다. 소영을 따라 관객들은 서울의 뒷골목과 노인들이 모이는 공원을 함께 걸으며 ‘서울’의 다른 풍경을 바라본다.
청춘들의 발걸음이 바튼 번화가에서 벗어난 소영의 삶의 궤적은 스산한 서울살이의 다른 표정을 비춘다. 나름 멋을 부린 청바지와 굽이 높은 구두, 매춘을 하는 현실에도 여성이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소영은 흔히 상상하는 닳고 닳은 악바리가 아니다. 삶이 신산하지만 그녀는 따뜻하고 여전히 온화하다. 양공주 시절 낳은 아이를 입양 보내고 평생을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살아온 소영에게 남아있는 것은 비루한 삶을 끝내 품어내는 뜨거운 모성이다. 그리고 그 따뜻함이 버려진 노년의 삶을 죽음으로 구원하는 성모 마리아 같은 이미지와 겹친다.
타인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지만 소영이라는 여성에게 도시의 삶, 남성들의 시선은 여전히 냉정하다. 남자들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한껏 풀어내기 위해 소영을 이용했고, 그녀를 따뜻하게 대하던 남성조차 그녀의 남은 삶을 걱정하기 보다는 자신의 고귀한 죽음을 앞세운다. 이재용 감독은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소수자들을 카메라 안으로 용케 끌어오지만, 그들을 위한 낙관적 관망에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마구 뿌려놓은 인생들의 뒷이야기는 수습되지 않는다. 이재용 감독은 주인공 소영의 삶에 대해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끝까지 유지한다. 끝내 헌신짝처럼 살아온 소영의 삶을 헌신짝처럼 버리고서야 마무리 짓는 그 차가움은 어쩌면 누구도 개인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 2016년 대한민국의 온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 죽여주는 여자 - 포토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2018년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텐아시아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