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NS의 시대
최근 우리 시대를 특징짓고 있는 핵심 용어 가운데 하나가 ‘소셜 네트워크’(SNS)라는 말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그 용어가 ‘인맥’이라는 한자어에서 ‘소셜 네트워크’라는 영어로 바뀐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해도 틀렸다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열람할 수 있는 소통-기술의 발달과 매체의 확산으로 인해 의견제시의 대중화가 이루어진 면이 있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여전히 특별한 사람들의 의견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오피니언 리더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의 발언이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는 있지만 어쨌든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또 아무나 거기에 접근하여 그 의견에 동의를 표시할 수 있다는 면에서 의견(doxa) 소통의 방법이 더 확산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그 이면에, 정확하지 않은 인터넷 루머가 마녀를 사냥하고, 개인정보 유출과 사생활 폭로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그것은 몇몇 부도덕한 유저들의 잘못으로 돌려지고 있으며 기술과 도구는 가치중립적일 뿐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이 기술과 매체, 이 소통양식은 앞으로도 더욱 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포털 사이트의 뉴스와 공식 사이트들의 정보 전달 뿐만 아니라 특히 개개인들을 중심으로 한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사적인 매체들을 통해 자신의 생활과 의견을 올리는 사회적 소통양식도 크게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사람들이 온라인에서도 서로의 생각과 생활을 주고받는다는 데 불만을 제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게 마련인 법,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소셜 네트워크>(2010)는 인터넷 소통양식이라는 것의 이면을 새삼 되짚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영화는 요즘 한국 사람들도 많이 사용하고 있는(2015년 기준 1,600만명) 페이스북의 창업자 마크 주커버그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것이 어떻게 탄생되었으며 전 세계 8 억명 이상의 사용자(2011년 9월 기준)를 가지는 등 오늘날과 같은 영향력을 갖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달리 말해 영화는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찾고 만나고 연결해 주는 사회 연결망 ‘페이스북’이 어떠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이 영화는 이 영화가 페이스북이라는 인터넷 네트워크의 특정한 소셜 프로그램에 관해 다루고 있긴 하지만, ‘소셜 네트워크’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사회적 그물망’, 인간 관계의 원리나 그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심리에 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때 사회적 그물망이란 인간들 사이의 관계 및 사회의 조직 원리를 뜻하기도 한다. 기실 사회란 이러한 관계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컴퓨터와 인터넷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것이며, 인간과 사회의 기본적 원리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는 그러한 페이스 투 페이스의 사람알기(관계 맺기)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인터넷이라고 하는 도구는 사람들을 전지구적으로, 실시간 연결하고 있기 때문에 그 규모와 양상이 질적인 변환까지 일으킨다는 판단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했다. 페이스북의 창업자에 얽힌 이야기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어쨌든 이 영화는 단지 성공담이 아니라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만든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며, 그 프로그램의 탄생과 기원에 얽힌 이야기를 법정 공방의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으므로 시선의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장면이나 서스펜스, 스릴 같은 긴박감은 선사하지 않으며, 휴머니즘 가득한 감동 같은 것도 없다. 차라리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소셜 네트워크 프로그램의 탄생과 그것의 성공 이면에 깔려 있는 인간의 욕망, 사회적 인맥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는다. 사회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 존재의 한계와 특성을 그려내는 드라마에 가깝다. 영화는 성공담인지 실패담인지 모호하게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기 때문에 관객들은 왠지 모를 씁쓸한 뒷맛을 안고 극장을 나서기 십상이다. 사회적 그물망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유령과도 같은 관계망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처지가 새삼 답도 없이 재확인되었기 때문일까?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밝혀 두어야 할 것은 이 글에서 언급된 마크 주커버그(Mark Eliot Zuckerberg, 1984~ )나 등장인물에 대한 언급은 모두 영화 텍스트 속에 그려진 모습에 대한 서술일 뿐, 실존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아님을 재삼 확인해 두어야겠다. 필자는 실존 인물 마크 주커버그나 에두아르도(Eduardo Saverin, 1982~ ), 윙클보스 형제(Winklevoss Brothers)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마크는 자기 전 재산의 절반을 사회에 기부했고 영화에서 그려진 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여자 친구(프리실라 챈)와도 현재까지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마크 주커버그 그 자신도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의 삶은 영화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았으며, 실연이 페이스북을 만들게 한 동기가 되지도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고 한다.
2. 페이스북 비긴즈
영화의 첫 장면, 인터넷상에 떠도는 수많은 의견들처럼 와글거리는 술집의 소음 속에서 ‘마크 주커버그’는 자기 능력을 과시할 방법을 고심하며 ‘에리카’에게 차이는 중이다. 그는 쉴 새 없이 떠들며 에리카와의 위태로운 대화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은 주변의 소음이 아니라 파편적이고 즉흥적인, 즉 자기중심적인 그의 화법 때문이다. 마크는 생각의 속도만큼이나 말이 빠르고, 제멋대로 화제를 바꾼다. 그의 말은 자기 관심에 대한 즉흥적 뱉어냄, 잘린 말, 일종의 독백이다. 되돌아오는 것은 마크의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사고의 간격을 따라잡지 못한 에리카의 엉뚱한 질문 뿐이다. 혼란스러운 대화 끝에 기분이 상한 에리카는 마크에게 절교를 선언하며 “너랑 대화하는 건 런닝 머신 위에서 달리는 기분이야”라고 말한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두 사람의 관심사와 화법이 다를 뿐이라고 해야겠지만, 끝없이 화제를 바꾸어 가면서 자기 관심사로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은 이후로 그가 만들어내게 될 페이스북의 성격과 그것을 이용하게 될 사람들의 특징을 보여준다. 즉각적이고 잡다한 것들에 대한 일시적인 관심, 새롭게 제공되는 정보들이 펼쳐내는 재빠르고도 깊이 없는 표면의 변화들에 대한 순간적 몰두. 호기심의 대상을 찾아 그것을 소비하고는 재빨리 다른 곳으로 몰려가버리는 호모 디지털들의 특징.
여기서 마크 주커버그의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SAT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즉 자신)이 대학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하면 하버드 내의 인너 서클에 가입할 것인가’이다. 세계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모였다는 집단인 하버드 대학 내부에서도 또 다른 소셜 동맹, 하버드대학 내 엘리트 모임인 ‘파이널 클럽’(피닉스 클럽, 포셀리언 클럽 등)에 참가하고 싶은 욕동. 자신의 두각을 나타내는 방법, 타인들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소수그룹에 가입하고 싶은 것이다. 아,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에리카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들 모두는 결국 타인에게 관심을 얻고 싶은 인정욕망이다.
이런 열망 그 자체를 탓할 수만은 없다. 자신을 세상에 증명하고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 고유의 본원적인 욕구이며, 그를 위해 노력하려는 인간을 나무랄 수만은 없는 일이다. 더구나 자본주의 사회는 이러한 인간의 심리를 동력학으로 삼아 유지․발전되는 사회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그런 관심에 ‘왜?’라고 묻지 않는다. 에리카가 왜 파이널 클럽에 가입하려고 하느냐고 묻자 마크는 “특별하고 재밌고 바람직하다”라고 답할 뿐이다. 따라서 그의 동기에 문제가 있다면, 그가 자신의 욕망의 정체와 성격을 묻고 있지 않다는 것, 그의 욕망이 타인들 시선과의 관계에서만 추동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마크의 관심은 “자신의 두각을 드러내줄 소수그룹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증을 획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이다. 쉬운 말로 자신의 능력을 주위에 증명하고(인정받고), 그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누리려는 것. 결론적으로 말해서 ‘페이스북’은 바로 SAT에서 만점을 받은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기 위한 사고의 결과물인 셈이다. 물론 그 와중에 여러 요인들이 결합해 질적 변이를 초래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마크는 에리카에게 “너는 보스턴 대학에 다니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하버드 대학생이자 고등학교 때부터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던 그가 볼 때 보스턴 대학교의 학생들은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참다 못한 에리카는 마크에게 예언자처럼 말한다. “너는 컴퓨터 인재로 성공하겠지만 널 좋아하지 않았던 여자나 그리워하면서 살게 될 거야. 너는 공부밖에 몰라서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네가 차인 진짜 이유는 재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야.”
술집에서 나와 기숙사로 돌아온 마크는 여자 친구에게 차인 낭패감과 상실감을 상쇄하기 위해 뭔가 몰두할 것이 필요했다. 몰두할 거리가 필요하다는 말은 씁쓸한 현실로부터 도피시켜 줄 놀이거리를 찾는다는 것과 동의어다. 자신의 현사실성으로부터 자기를 망각할 거리, 놀이 대상(하이데거의 용어로 “빠져있음Verfallen”)이 필요한 것이다. 문제의 상황을 반성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에 직면하기보다는 뭔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거리, 자신의 쉴 새 없는 관심(호기심Neugier)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줄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심심풀이용으로 하버드 여대생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점수를 매기는 프로그램(Harvard Mash)을 순식간에 만들어 유포한다. 그리고 몰려든 유저들 탓에 하버드 웹사이트는 새벽 4시에 다운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페이스북의 맹아다. 대상이 된 사람들의 의지나 동의 없이 다른 이들의 정보를 집약하고는 사람들의 경박한 호기심을 이용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기술. 그것이 바로 페이스북의 기원이자, 페이스북의 정신이다.
페이스북의 맹아는 기숙사에 돌아와서 자신의 블로그에 에리카에 대해 근거 없는 인신공격과 험담을 일삼은 다음, 술김에 혹은 심심풀이로 기숙사 여학생들의 얼굴에 점수매기기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대조시키면서 점수를 매기는 프로그램이라니… 거기에는 사실 사람들을 외모로 평가하는 루키즘(Lookism)은 고사하고 누군가의 얼굴에 점수 매겨도 된다는 생각이 허용되고 있다. 거기서 그 사람의 실제 인격이나 그의 존재 자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사람의 외모에 점수를 매기고 그것들을 인기투표에 부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사실 익숙한 모럴 헤저드의 일종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인줄도 모르는 일종의 “사회적으로 정향된 결점”(에리히 프롬)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토록 짧은 시간에 개인정보를 해킹하여 그것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능력만 있으면 모든 것은 용서된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북’이란 문자 그대로 ‘얼굴-책’이다. 눈 앞에서 타자의 ‘안면성(visage)’을 대면하여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서는 얼굴이 아니라 사람들의 얼굴을 모아 놓은 책. 이 때 얼굴은 그의 기분과 정신, 인격의 총체로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재미를 위해 동원된 얼굴, 즉 탈인격화된 하나의 그림,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 물신화 된 얼굴-기호들, 나의 광대한 인맥의 증거를 확인시켜 주는 인증서-책.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되찾게’ 해주고 ‘연결시켜’ 주는 사회 연결장치인 ‘페이스북’은 사람들을 책처럼 수집하여 전시한다. 물론 자신의 얼굴을 전시하는 진열장의 기능은 기본값으로 설정되어 있다. 자신의 생활과 감정들을 전시하고 진열하는 얼굴 진열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페이스북은 마이크로소프트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MS가 컴퓨터의 운용체제(OS)를 팔아 그것으로 이윤을 챙기는 방식을 구사한다면 페이스북은 자신들만의 소스라는 것이 없어 오픈할 소스 같은 것도 없다. MS가 프로그램이라는 상품을 판다면 페이스북은 사람들(의 모임) 자체를 판다. 더 정확히 말하면 페이스북의 가치는 사람들의 ‘운집’이다. 그렇게 그는 단지 자기의 프로그램(더 정확히 연결link이라는 아이디어를) 판 것이다. 어떻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프로그램과 사이트는 곧 돈이 되는가? 사람들이 모이면 그 자체로 돈이 된다. 링크가 곧 재산이요 힘이다. 사람들의 모임을 통해 기업은 사람들의 취향과 선호도를 알아낼 수 있다. 페이스북에 모인 사람들은 결국 자신들의 정보를 제공하는 셈이고, 페이스북 회사는 그런 데이터들을 통해서 이윤을 획득한다. 사람들의 운집 자체가 정보가 되고, 정보가 다시 이윤이 되며 개인들은 그 정보를 다시 소비하면서 유지되는 그런 구조다. 사람들의 모이는 ‘숫자’ 자체가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면 자본주의 미학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광고’ 효과는 더할 나위 없이 극대화된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주커버그는 하버드 대학 내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고, 하버드 인맥을 웹상에서 구현하려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던 윙클보스 형제의 클럽에도 가입되며, 그들과 공동 작업을 시작할 것을 약속한다.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크 주커버그의 아이디어는 윙클보스 형제가 개설하려던 ‘하버드 커넥션’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가 사용한 “비개방성이 핵심”이라는 말은 윙클보스 형제의 아이디어였기도 하다.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낸 ‘하버드 매쉬’에 사람들이 몰렸다는 것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얼굴 비교여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친구나 동료들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고 마크는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제 사람들이 자신과 관계있는 사람들의 생활이나 근황을 온라인에서도 확인하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런 심리와 욕구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인터넷 네트워크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그것을 운영하려 한다.
인터넷의 특징이기도 한 ‘누구나’와 ‘아무나’가 아니라 특정 인물들과의 관계를 온라인으로 옮겨 구축하려는 작업인 셈이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의 소통을 인터넷에서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링크를 생각해 낸 것이다. 그 자체로 대단히 뛰어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그런 생각과 시도를 한 것이 마크 주커버그 무리가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하버드 대학 내에서 현실화되고 있을 무렵 실제 한국에서는 이미 ‘싸이월드’라는 소셜 네트워크 프로그램이 대중화되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미국상품, 그것도 하버드에서 개발된 상품이라는 것 외에 다른 점이 무엇일까? 그러므로 어떤 점에서 보자면 페이스북이 대단한 확장력을 가진 이유란 그것이 하버드 대학 내에서 시작되었다는 점과 그러한 프로그램이 적절한 시기를 맞았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페이스북만의 독특한 특징과 장점이 없지 않겠지만 그 자체로 대단한 아이디어라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었다는 사실에 고무된 마크 주커버그는 그의 친구 에두아르도 세버린을 찾아가 자신의 아이디어에 관해 이야기하고 그 자리에서 동업관계를 형성한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에두아르도가 그 일에 필요한 돈을 대고, 그 작은 공동체의 최고 재무책임자(CFO)의 역할을 맡기로 하며, 구두로 수익의 배분까지도 결정한다. 이 순간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는 하나의 벤처 기업이 탄생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들도 자신의 아이디어와 링크 프로그램이 이후로 그토록 많은 회원들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수많은 돈을 벌어다 줄줄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얼마 후 그들이 법정에서 서로를 고발하고 싸워야할 처지가 될 줄도 물론 몰랐으리라. 영화 포스터의 문구처럼 ‘5억명의 친구를 갖기 위해 진짜 친구들은 적이 되어야만’ 할 것이었다.
3. 다수의 친구냐 소수의 적이냐
이들의 아이디어와 그것을 웹상에 구축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더 페이스 북’은 하버드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점차 하버드 대학을 중심으로 한 주변의(아이비 리그) 대학들에게로 퍼져 나간다. 자신과 현실에서 무관한 사람을 사귀는 장이 아니라 현실에서 알고 있던 사람을 웹상에서 교류하는 아이디어가 이제 그 범위를 넓혀 점점 미국 내로, 그리고 대학사회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그러나 학생들이자 아마추어인 이들이 소규모의 인원과 자본으로 그처럼 광대한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전문적인 기업과 대규모의 자본이 필요하다.
이 시점에 등장하는 인물이 ‘숀 파커’(Sean Parker, 1979~)라는 인물이다. 자신들의 아이디어와 웹상의 프로그램, 그리고 거기에 가입해 있는 회원들(가입한 회원들 자체가 재산인 셈)을 무기로 투자자를 유치하려던 중 인터넷에서 무료로 음악을 공유하는 프로그램(냅스터)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던 숀 파커를 만나게 되고 이제 마크 주커버그는 그에게 이끌린다. 자신의 네트워크 프로그램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회사를 더 크게 운영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마크에게 숀 파커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회사가 제대로 커나가기 위해서, 혹은 페이스북의 아이디어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숀 파커와 손을 잡는 것이 필수적인 것처럼 보인다. 숀 파커는 에두아르도보다는 투자자들을 훨씬 더 많이 알고 그들과 연결해 줄 수 있어 보인다. 결정적으로 그는 마크에게 ‘빅토리아 시크릿’의 창업주 이야기를 해주며, 회사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마크로서는 페이스북을 키워나가려면 숀 파커가 필요하다. 그런데 회사의 창립멤버인 에두아르도는 숀 파커가 편하지 않다. 숀 파커와 에두아르도는 대립적이고 둘 다 끌어안을 수는 없다. 양자택일 해야만 한다.
이제 그들은 급기야 갈등을 겪게 된다. 경영학을 공부했지만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한 에두아르도를 속여 형편없는 몫의 지분으로 낮춘 다음 회사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이에 분개한 에두아르도는 결국 마크에게 소송을 걸어 그 둘은 법정에서 진실 공방을 펼치게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한편으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마크가 훔쳐가 하버드를 비롯한 유수의 대학 사회에서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누리는 데 화가 난 윙클보스 형제들은 마크에게 네트워크를 운용하지 말 것을 경고하기도 하고, 대학 내에서 해결하려고 총장을 만나보기도 하지만 끝내 영국의 대학가에조차 페이스북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을 보고는 마크를 법정에 기소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이로써 마크와 관련된 두 건의 소송을 중계하며 사이 사이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소송 중 하나는 마크(와 숀 파커)가 페이스북 회사로부터 쫓아낸 에두아르도가 제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크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주장하는 윙클보스 형제로부터 제기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흔한 할리우드 법정 드라마처럼 진실이 밝혀지고 정의가 승리하는 식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윙클보스 패거리들은 마크가 자기들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들의 아이디어란 별게 없다. 내부인들끼리만 소통할 수 있는 폐쇄적이고 선택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웹상에서 구축하려고 했던 것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스스로를 구별 짓고 구별지음에서 오는 즐거움과 이익을 향유하기라는, 그들이 현실에서 이미 하고 있는 일을 인터넷에서 구현하려 한 것 뿐이다. 마크가 그들보다 더, 주목을 받게 되는 상황은 그들에겐 그 자체로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자신이 최고여야 하고 최고의 선망을 받는 ‘로얄 소사이어티’여야 하는데 이름도 없는 한 가난뱅이 청년이 영국에서 열린 조정대회 사교모임에서까지 거론되고 있는 현실을 참아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윙클보스 형제들이 소송을 제기하는 건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명예’란 타인들의 인정망 속에서만 획득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마크가 어떤 마음으로 에두아르도를 퇴출시켰는지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어쨌든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마크의 모습은 그런 윤리나 도덕, 정리(情理) 등에 얽매이지 않는 ‘쿨’한 모습이다. 심지어 마크는 자신을 고소한 윙클보스 형제도 이해한다. “그들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은 건 처음이기 때문일 거야.” 이것은 그의 이해심이 넓거나 상대의 입장과 심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가 인간들 사이의 어떤 의무나 윤리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조금 아이러니하다. 인간들 사이를 연결해주고 서로간의 네트워킹과 유대를 촉진하는 프로그램의 개발자가 정작 그 자신은 그런 관계들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프로그램 개발자나 운영자에게 네트워크에서 발생하는 인간 간의 문제에 책임을 지라고 요구할 수 없으며 인간 사이의 연결(유대가 아니라 연결만!)를 촉진시키는 프로그램의 개발자라고 해서 그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덕망과 높은 식견, 실천을 요구할 수도 없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웹상에서 서로 연결시켜 놓는 프로그램의 개발자가 주변의 친구나 사람들과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음미해볼만한 대목이다.
페이스북을 둘러싼 갈등에 대한 조정은 결국 법에게 떠맡겨진다. 아니 법이 떠맡는다. 그러나 법 역시 인간의 진실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것은 있었던 일, 사실들을 재구성해내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정말 윙클보스 형제로부터 나온 것인지, 마크가 에두아르도를 내쫓은 것이 정당한 절차를 통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낼 수 없다. 법은 진실을 찾아내지 않는다. 다만 타협을 이끌어 낼 뿐이다. 법은 최종판결을 할 뿐이고 선언을 통해 그것을 고정불변의 사실로 만들어버리는 최후장치일 것이다. 법정 공방에서 지난 과거의 모든 일이 증언을 통해 재구성되고 구술된 내용이 영화의 서사를 이루지만, 어쩌면 진실이란 그 사태의 핵심을 가리기 위해서는 법에 호소해야만 한다는 것, 오직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법정에 출두했다는 것이 사실이고 그들의 갈등을 끝내 법정으로 가져가야만 했다는 것, 그들의 우정과 상호 신뢰(즉 인간관계)가 박살났다는 것과 그것을 법이 최종판단 해준다는 것 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되지만 끝내 알 수 없는 것은 마크가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이다. 의문은 두 건의 소송과 관련된 두 개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마크는 왜 윙클보스 형제(포셀리언 클럽)과 함께 일하지 않고 자신만의 다른 페이스북 사이트를 개설했는가? 둘째, 마크는 왜 에두아르도를 페이스북 회사로부터 쫓아냈는가다. 답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물을 필요도 없이 자명한 상식적인 이유들, 독립적으로 이익을 독식하거나 자기 사업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혹은 둘 다 일수도 있겠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판단도 내리지 않고 말해 주지도 않는다.
영화는 법과 달리 사태의 진실을 생각해 보도록 하면서도 사태의 사실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판단을 우리에게 떠넘김으로써 우리를 시험에 부친다. 마크라는 사람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에서 우리의 도덕적 기준을 작동시키는 것이다. 그가 뛰어난 컴퓨터 천재이자 돈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고,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억만장자가 된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하는 이라면 그가 그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어떤 동기로 어떤 행위를 했든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반면 그의 절친이었던 에두아르도와 법정에 서고, 정작 그 자신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이끌지 못한 채 재산 다툼을 해야 하는 그 씁쓸함을 주목하는 사람, 인간관계의 덧없음과 부박함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인간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영화이자 우리의 가치관을 작동시켜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게 해주는 그런 영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영화는 페북의 원리에 충실하다. 영화는 페북의 창시자 마크와 관객이자 페북의 사용자인 우리를 연결(링크)하지만 그것의 내면은 보여주지 않는다. 즉 마크가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페북을 발명했는지는 말해주지만 그가 도대체 왜, 페북을 발명했으며, 왜 친구들을 배신했는지, 왜 윙클보스 형제를 배신했는지는 직접 말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연결만 해준다. 페북이 사람들을 연결만 할 뿐,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하고 왜 그렇게 살아가는 지에 대해 아무런 것도 알려주지 않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묻자. 마크 주커버그, 그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자기의 정신적인 아이디어를 구현시키기 위해서 그는 숀 파커와 동업을 하고, 친구 에두아르도를 회사에서 쫓아냈다. “5억명의 온라인 친구, 전세계 최연소 억만장자, 하버드 천재가 창조한 소셜 네트워크 혁명!” 이라는 수식문구들을 제거하고 본다면, 페이스북을 만들어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고 큰 돈을 벌었다. 그 와중에 친구를 잃었다. 그렇다면 그가 만든 것은 무엇인가? 아니 그가 페이스북을 통해서 창조하고 실현시킨 것은 과연 무엇인가?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고 돈을 벌었다. 당시 페이스북의 기업가치는 58조원이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마크가 말하는 그 아이디어의 가치는 도대체 ‘시장’이 아니면 어디에서 그 가치의 평가를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모여 들어 그것이 시장에서 자산 가치를 갖는 것 외에 도대체 페이스북-도구장치의 이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환금가능성이 아니라면 그의 능력이나 가치는 인정되고 검증될 수 없는가? 소셜 네트워크는 그래서 철저히 타인들의 인정망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기능한다. 마크가 여자 친구에게 차인 심리를 상쇄하기 위해 고안한 프로그램에서 그것은 태어나고, 그녀가 여전히 자기의 가치를 몰라주자 페이스북을 하버드 내에서 주변 대학들로 확장시키기 시작했던 것처럼….
마크 주커버그가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방식은 그가 사람들을 연결시켜 놓는 업적으로가 아니다. 대체로 그것은 마크가 페이스북이라는 프로그램을 발명하여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며, 그것도 아주 젊은 나이에 하나의 아이디어를 구현하여 얼마나 많은 자본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 모았는가다. 사실 마크가 한 일은 하나의 도구―사람들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웹상의 프로그램(이른바 인맥 교류 사이트)―을 만들었다는 사실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이 대단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사회적 그물망이란 결국 자신의 가치를 그물망 속에서 확보하려는 하나의 사교계 놀이에 불과하게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고, 그들 간의 소통을 증대시키며 유대감을 돈독히 해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순기능이다. 그렇다면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잘못인가? 아니면 도구 자체가 그런 식의 소통을 생산해 내는 것인가? 도구는 언제나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소통의 양식은 소통의 발신자와 수신자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당하는 미디어 자체에 있다는 것은 이미 마셜 맥루한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밝혀낸 바 있다. 어떤 점에서 보면, 미디어는 항상 자기 지시적이다. 미디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자신을 확장한다. 그것의 사용자, 유저에게 봉사한다고 하면서 우리 삶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하며, 우리의 삶과 사회를 발전시킨다고 말하지만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 자신을 확장하고 증진시켰을 뿐이다. 다만 사람들이 그러한 미디어에 달라붙어 자기 삶을 영위해왔을 뿐이다.
마크는 윙클보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에두아르도와의 우정도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 우정이란 것이 과연 있기는 했던 것인지 사실 의심스럽지만 페이스북이 아니었다면 좋은 친구로 남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그를 옭아매는 어떤 정리, 정분, 의무, 규칙이 없다. 천재는 그런 것에 얽매이기에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이기 때문일까? 여자 친구에게 차인 기분을 잊기 위해 잠깐 사이에 서버를 다운시킬 정도의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그는 그것의 파장과 결과를 고려하는 면모가 없다. 기숙사의 자료를 해킹하는 순간에서도 그는 전혀 고민이나 갈등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그것을 프로그램과 웹상에서 구현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영화 속 인물들이 갖는 만남은 대단히 피상적이다. 영화 속의 에두아르도가 그렇고 숀 파커 또한 그렇다. 그들의 리얼한 인간관계상과 웹상의 관계는 닮아 있다. 그들의 인간 관계에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 즉각적인 만남과 서로에의 탐닉, 그것뿐이다. 즉각적인 현재만 존재하고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 그것은 웹페이지의 속성과도 같다. 웹상에서는 새로운 페이지들이 쉴 새 없이 생성되며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간 소식의 페이지를 열람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달린 ‘얼굴 없는’ 누군가의 의견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서 댓글에서는 ‘1빠’만이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의견의 내용이 아니라 그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웹에서는 실시간, 업데이트가 중요하다. 그만큼 속도가 중요한 것이다. 아주 빠른 순간에 인기검색어가 상승하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 왔다가 순식간에 다들 어디론가 또 사라진다. 네트는 광대하며 새롭고 또 그만큼 덧없기도 하다.
4. 네트워크와 영혼
사실 페이스북은 변화했다. 이 변화가 진보인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처음에 페이스북은 하버드대학 내의 사람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도구-장치였다. Harvard.edu라는 메일 주소를 가진 사람들만이 회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와 시스템이 시장으로 나오자마자 이제 모든 사람이 무료로 페이스북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생들만이 가입하고 자신들만의 네트워크였던 것이 이제 전 세계 사람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페이스북은 본질적으로 변화된 것 아닐까? 특정한 그룹 구성원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연결해 주던 장치가 모든 사람이 가입할 수 있게 되었다면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차별화의 특권도 없어지는 것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가치가 발생한다. 이제 가치는 소수 그룹 내의 제한된 인맥과 사교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그룹을 만들고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교제를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사실 페이스북은 싸이 월드와 별로 다른 점도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이 싸이 월드가 아니라 페이스북이라는 점 뿐이다. 새로운 소셜 네트워크 ‘상품’이 나온 것일 뿐이다. 그것이 새로운 것은 그것이 진정으로 새로워서가 아니라 새롭다고 여겨져서 상품으로 출시되기 때문이다.
페이스북은 물론 잃어 버렸던 사람을 찾아주기도 하고, 새로운 이들과 연결시켜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기존에 그러한 기능을 행사하던 사이트들은 무엇인가? 저 추억 속의 이름인 하이텔과 천리안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이 러브 스쿨’, 싸이 월드는 어떻게 된 사정인가? 다른 나라들은 차치하고 한국에서도 그런 것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구리 전화선 모뎀을 사용하던 시절에서부터 통신기술이 발전해 사이버가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싸이 월드의 미니홈피를 경유해 블로그와 트위터에 이른 지금 도대체 바뀐 것은 무엇일까? 휴대폰으로 개인의 의견을 사회망에 올리고 거기에 추종하는 팔로워들이 나타나고 그것을 공유하는 것이 그처럼 우리와 사회를 바꾸는 일일까? 그런 것이 없던 시절에 사람들은 어떻게 4.19에 거리를 메웠으며, 1987년 서울역에 모여들었을까? 그들은 어떻게 정치와 사회에 관한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웹상의 관계와 현실(오프라인)의 관계 가운데 어떤 것이 더욱 인간적인가라는 문제가 아니며, 사이버는 리얼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복고주의적인 향수만은 아니다.
네트워크의 정체? 그것은 ‘돈’이다. 사람이 모이면 돈이 된다. 많은 사람들을 중개하고 연결하면 그 자체로 돈이 된다. 인맥을 사회적 자본이라고 명명한 사회학자도 있다. 웹상에서의 조회수는 힘이고 권력이며 돈이다. 이 때 가치란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이고 이 ‘집합’은 곧 환금가능성과 권력(여론)을 의미한다. 네트워크는 바로 비즈니스 그 자체다. 인터넷의 조회수를 나무랄 필요는 없다. 이미 인간이 개성이나 영혼보다 숫자로 존재하기 시작한 지는 한참 되었다. 모든 것은 ‘돈’과 환금가능성으로 가치평가 된다. 개성은 오로지 자본 하에서 자본과 소비 속에서만 표출되는 것이 되었고, 존재는 소비, 상품 속에서만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의 척도는 오로지 상호척도이다. 그것의 가치가 외재적이거나 어떤 초월적인 것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관심도, 그리하여 사람들이 몰리면 그것에 가치가 부여되는 그런 구조다. 그것이 좋은 것이며 그것이 대중사회, 민주사회, 평등사회의 모델이고, 그것에 엄호사격을 가하는 담론들도 적지 않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자신들의 ‘빠져 있음’의 상태로부터 구원해 줄 모델은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이미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즐거우면 그만이다.
인터넷은 좁다. 시공간적인 면에서 대단히 협소하다. 사람들은 인터넷이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했다고 말하지만 거꾸로 시공간의 제약이 극복되면서 그곳은 시간의 회기도 짧고, 순간적이고 무책임하다. 또한 그 공간은 대단히 균질적이다. 누군가는 근대성이 공간을 균질화 시켰다고 말하지만, 인터넷만큼 동질적이고 균질적인 공간도 드물다. 거기는 히말라야나 몽골의 대초원 같은 그 공간-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와 특색 따위는 이미지의 배경 화면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 환경이 인공적인 환경이기 때문이다.
개인휴대용통신장치(이른바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사용하고 여러 기능들을 사용한다 한들 도대체 달라진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람들을 연결해 준다는 것은 우편과 전화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그것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상품이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내서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는데 있다. 스마트폰이 나오고 태블릿 PC가 나온다고 해서 우리 삶이 변하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것이 바로 소셜 네트워크가 우리의 영혼을 담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네트워크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도 아무 것도 담아내지도 못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또 하나의 새로운 필드에서 똑같은 삶을 펼쳐내는 하나의 도구-장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회란 본디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장치, 새로운 상품이 계속 해서 나타나지 않으면 자본주의 사회는 더 이상 그 심장 박동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좋다. 자본주의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야만 한다면 좋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누군가 물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글·이호
200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한국문인 인장박물관> 학예실장.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