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감이 가지 않는 영화들에는 한두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 영화들은 인간군상을 기능적으로 판단하여 편견 가득한 기계처럼 다룬다는 점이다. 이성적이고 혈기왕성한 청년이 있으면 연약한 피해 여성이 있고,(영화<청년경찰>) 자린고비식 노년의 시니컬 한 노인들이 있으면, 그 역시 연약한 피해 여성이 있다.(영화<반드시 잡는다>) 몇 몇 관습적 인물들이 서사 속에서 변주되고 호출될 때마다 그 중심에는 키 170을 상회하는, 겉보기에 강건해 보이는데도 여린 여성으로 돌변하여 피해자가 되는 여성이 종종 등장한다. 이런 영화에는 제 아무리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 척해도 보답을 마땅히 해야하는 가녀린 여성의 미소만이 그 결말을 대체할 뿐이다. 인간 존재 깊이나 사회적 해석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말 그대로 갑작스레 시작되고 갑작스레 끝나는 이러한 영화는 그런 결말로 향하는 서사에만 온 신경을 집중한다. 그렇다고 좋은 영화란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것도 버겁다. 문제는 좋은 영화를 설명하기 버겁다는 것이 아니라 호감이 좀처럼 가지 않는 영화가 이런 식으로 너무 많이 생산된다는 점이다.
영화 <반드시 잡는다>는 사회 편견 속에 갇힌 노인이 그 편견을 깨나가는 영화라고 읽을 수 있다. 물론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그가 그런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수 있으니, 너무 앞서 나간 견해일 수 있다. 게다가 이 감독은 얽히고설킨 이야기, 쫓고 쫓기는 긴박한 장면의 케이퍼 무비-범죄 과정을 상세히 다루며 그 성공과 실패에 집중하는 장르 영화-에 능한 감독 아닌가. 하지만 김홍선 감독의 그 장점은 이 영화에서는 거추장스러운 장애가 돼버린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독거노인, 치매 노인 그리고 자린고비 노인이라는 전형적 인물군상이 젊은 20대 여인을 구하려한다는 남성판타지 유형으로 폄하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몇 있지도 않은 연령계층 별 구별 법에 깊지 않은 인간에 대한 표피적 관점이 복잡한 서사구조를 유지하느라 결국 벌어지게 된 부작용으로서 편견 가득한 기계로 내몰리는 배우내지 인물 아니면 인간에 대한 몰이해 현상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러한 지적은 전적으로 감독의 능력 탓이라 할 수 없다. 우리라고 다른가라는 질문이 성립되기 때문이다. 젊은 청년과 젊은 소녀와의 관계(영화<청년경찰>), 늙은 노인과 젊은 여인과의 관계(영화<반드시 잡는다>)가 전형적인 이야기 문법이 되니 계층 간 간극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또한 여성은 피해자, 남성은(늙던 젊던) 보호자이자 가해자라는 문법에 갇히게 되니 인간에 대한 고민이 우리에게서 조차 설자리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노인과 청년, 기성세대와 청년세대, 여성과 남성이라는 대립각을 비정상적으로 생산하여 소모적 논쟁에 휘말리게 만들기도 한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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