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이라는 단어가 배제하는 ‘우리’
2015년 12월 28일, 누구도 원치 않았고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었던 한일 ‘위안부’ 합의가 졸속으로 채결됐다. ‘최종적 합의’라는 표현으로 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발목을 잡았던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50년이 지난 2015년, 오히려 ‘불가역적’이라는 합의의 강제성까지에 동의했던 이들은 채결 다음날 용감하게도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외교부 차관은 돌아가시기 전에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지침에 따라서 저희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라며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께 이해를 구하는 듯 변명을 했다. 당연히 너무나 자명하게 이해도, 용서도 할 수 없었던 할머니들께선 “먼저 피해자를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 아니었냐”고 소리치셨다.
2015년의 합의를 포함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둘러싼 국가의 시선은 ‘나름(대로)’라는 단어의 폭력성을 담고 있다. ‘나름’이라는 단어를 쓸 때에는 그 앞에 생각의 주체를 명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 단어는 듣는 이와 말하는 이를 분명하게 갈라놓는 역할을 한다. 언뜻 상대를 배려하는 말처럼 들리는 이 단어의 용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단어는 나는 너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표현을 완곡하게 돌려말 할 때 유용할 뿐이다. 그러니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우리’라고 생각했다면, ‘저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의견을 듣고, 모으고, 확정해 상대인 ‘저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며, ‘나름대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 그들이 본인들의 입장을 전달 할 때에나 써야 하는 말인 것이다.
이렇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늘 국가와 ‘우리’가 되지 못했다.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목소리를 담았던 <낮은 목소리-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하 <낮은 목소리)>(1995)에서부터 할머니들은 피해자 개인을 넘어 국가가 나서 힘을 실어주길 바랐지만, 국가는 그 옛날의 한일협정을 들먹이며 분명한 거리를 설정했다. 그래서인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다룬 영화들은 더 이상 이 무능한 울타리를 그리지 않는다. <귀향>(2016)에서의 국가는 피해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등록하라는 말로, 그 과정으로 할머니들에게 상처를 줄 뿐이었고, <눈길>(2017)에서는 그저 행정업무를 전달할 뿐인 차가운 공무원으로 대변됐다. 그리고 2017년의 <아이 캔 스피크>는 아예 ‘한국의 철새’처럼 중심 없고 자신의 입신을 위한 방편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정치인을 배치해 국가의 무용성을 부각시킨다. 위의 영화들과 <아이 캔 스피크>의 차이가 있다면 국가가 빠진 자리에 ‘우리’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는 점일 것이다.
아픔을 통한 공명(共鳴)과의 거리
<아이 캔 스피크> 이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그린 대표적인 두 영화 <귀향>과 <눈길>은 모두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는 방식을 취한다. 국내에선 처음 김학순 할머니께서 증언하셨던 1991년을 현재로 둔 <귀향>과 비교적 최근을 현재로 설정한 <눈길>은 현재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들을 영화의 중심에 둔다. 소녀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곳은 얼마나 참혹했는지, 또 그들은 얼마나 잔인했는지 등은 많은 이들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 영화들 이후, 많은 이들이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전국의 소녀상(像)이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다는 것 등은 소녀들의 과거 재현이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왜 진심어린 사과가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재현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은 공분(公憤)이 반드시 공감(共感)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만들어진 공감은 작위적인 만큼의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귀향>과 <눈길>은 모두 현재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내러티브에 아픈 사연을 가진 어린 소녀들과의 동행을 둔다. <귀향>의 영희(손숙)와 <눈길>의 종분(김영옥)은 늘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한다. 공방에서 묵묵히 괴불노리개를 만드는 영희와 반지하방에서 생활하며 과거 자신보다 먼저 죽었던 영애(김새론)의 환영과 마주해야 하는 종분은 그렇게 홀로 살아간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들의 삶에 끼어드는 것이 바로 자신들이 과거 일본군 ‘위안부’로 착취당할 때와 유사한 나이에 있는 소녀들이다. <귀향>의 은경(최리)과 <눈길>의 은수(조수향)가 끼어들면서야 영희와 종분은 말할 상대를 찾고 서로의 삶에 녹아들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소녀들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과 외로움에 공감할 수 있도록 ‘따로’ 설정된 피해자들이라는 점이다. <귀향>의 은경은 성폭행을 당한 후, 그 피해자에게 아버지를 잃었고 자살시도 끝에 무당을 찾아온 어머니로 인해 무당에게 맡겨졌다. 성폭행 후 신기(神氣)가 든 은경은 이후 영희의 과거를 보고, 환상 속에서 그 현장으로 끌려가 물리적인 폭력을 당하기까지 한다. <눈길>의 은수는 아무도 보살펴주지 않는 삶을 산다. 돈이 없고, 살 곳도 빼앗길 판이며, 폭행은 늘 그를 따라다닌다. 학교에서 조차 그는 자퇴를 강요당한다. 반항과 분노로 똘똘 뭉친 그의 삶은 종분의 외로움만큼이나 참담하며 누구도 자신을 돌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 속에 놓여 있다.
이 영화들이 따로 마련한 공감은 이처럼 의아하고, 그만큼 가슴 아프다. 거대한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은 그만큼의 고통으로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제, 또 그래야만 그들의 고통이 더욱 부각될 수 있을 것이라는 빈곤한 상상이 이 영화들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귀향>이 다큐멘터리를 지나 극영화로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중심에 두었다는 의미, <눈길>이 늘 그럴 것이라 상상해왔던 시골의 순수한 조선인 소녀뿐만 아니라 일본군근로정신대에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도 조선인이라면 ‘위안부’로 강제 분리됐다는 것을 알렸고, 쏟아지는 빛으로 과거 소녀들의 삶에 안도를 마련한 영화적 성취가 있음에도 결국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우리가 공분이 아닌 공감으로 만나긴 어려웠던 이유이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의 일상에 주목한 것이 평가되어야 할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옥분(나문희)과 함께하는 이들은 그저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우리의 이웃이다. 마음에 안 들면 싸우고, 자신이 불리해질 상황이 있으면 피하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허허거리는 어디에나 있을 것 같은 이들과 옥분은 함께 한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들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민재(이제훈) 역시 동생과 단 둘이 살고 있다는 외로움이 강조되기 보단, 그의 깐깐함과 경직성으로 인한 웃음에 인물의 방점이 찍힌다. 민재는 외롭다고 느낄 때 누군가가 알아주길 바라기보단 옥분을 찾아가 함께 하고,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땐 달려가 싸운다.
이들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는 옥분 역시 마찬가지다. 옥분은 좁은 옷수선집에만 머물지 않는다. 동사무소를 시작으로 영어학원, 외국인들이 많은 클럽, 시장의 골목 골목, 그리고 미국의 ‘위안부’ 결의안(HR121)을 위한 청문회장까지. 그는 행동반경이 넓어진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만큼의 감정을 표출한다. 조용히 홀로 공간을 지키던 이들과 다르게 옥분은 화를 내고, 웃고, 생떼를 쓰며, 소리를 지른다. 그들이 분명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아이 캔 스피크>는 옥분으로, 그러니까 나문희라는 배우의 얼굴과 목소리로 증명한다.
웃음으로 숨긴 비밀과 눈물로 내민 감정
나문희는 <아이 캔 스피크>가 아닌 다른 영화에서 먼저 ‘옥분’이라는 이름을 달았었다. 단편영화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2008)에서 그는 처음 운전을 시작해 남편에게 구박받는, 그 김옥분을 연기했었다. 끼익 끼익 어설픈 브레이크를 밟으며 한강 둔치 주차장으로 들어선 빨간 차에는 빨간 테의 안경을 쓴 옥분이 타고 있었다. 무슨 운전을 그렇게 하느냐며 화를 내고 차에서 내려버리는 남편의 등 뒤로 옥분은 날 때부터 운전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쏘아 붙였다. ‘동네 할마시들 다 데불고 벚꽃구경 가야’ 하는 옥분의 목표가 드러나는 순간, 고심 끝에 빨간 차와 빨간 테를 골랐을 신중함이, 보슬보슬한 핑크색 카시트와 핸들 커버를 끼우고 너구리 인형까지 백미러에 매단 후 뿌듯해했을 그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 장면을 보며 비죽이 새어나올 우리의 웃음은 배우 나문희 만을 위한 것이었다.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의 옥분이 10년이 지나 자신의 과거를 <아이 캔 스피크>에서 밝힌 것이라 해도 크게 놀랄 일은 없어 보였다. 톤이 올라가면 약간의 비음이 섞인 듯 카랑카랑해지는 목소리, 동그란 이마에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를 소복이 얹은 얼굴, 누군가에게 쉽게 말을 건네던 그 명랑함, 그리고 자신을 구박하던 이들에게 통쾌하게 날리는 한 방이 있는 그 말들.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의 검은 머리는 정말 10년의 세월을 반영하듯 <아이 캔 스피크>에서 희어졌지만, 이 생기 넘치던 모습들이 피해자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 배우 나문희는 바로 이렇게 고통을 그리는 배우였다. 무심함 뒤에 자신의 슬픔을 숨기면서도 툭툭 내뱉는 말들로 상대를 감싸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소리 높여 내지르고, 가끔 허공을 바라보며 눈물을 찍어내다가도 인기척에 웃음을 보일 수 있는, 나문희는 그렇게 개인의 역사에 다가갔다.
많은 이들이 그의 모습을 눈에 깊이 담은 순간부터 그는 늘 엄마이거나 할머니였다. 그리고 보통 등짝 때리며 잔소리하는 엄마이거나 할머니였다. 그러나 속 깊은 곳에 늘 많은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어 그가 약해지거나 슬퍼질 때 그가 밝았던 것만큼이나 많은 눈물을 함께 흘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그이기도 했다. <너는 내 운명>(2005)에서 석중(황정민)의 어머니였던 나문희는 끊임없이 석중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석중 어머니는 도대체 나이 먹은 아들이 방에서 혼자 무슨 짓을 하는지 속옷을 빨아도 얼룩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큰 소리로, 벌컥 벌컥 문을 열며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그 눈으로 아들을 당황하게 했다. 석중 어머니는 내 자식이지만 늘 모자란 것만 보이는 듯 석중을 구박하면서도, 은하(전도연)의 진실이 밝혀질 때 오롯이 아들만 챙기는 그 억척스러움을 가슴 아프게 연기했다. 그가 아들 앞에서 함께 죽자고 약을 내 놓을 때, 충동적으로 그것을 먼저 마셔버리는 아들을 얼싸안을 때 그는 소리죽여 우는 것이 아니라 뱉으라고, 그리고 살라고 아들을 때려대며 상황의 고통을 내지르듯 뱉어냈다.
<열혈남아>(2006)의 점심 역시 같은 궤에 있다. 점심은 작은 시골동네에서 국밥집을 하며 어디서 깡패짓거리 하고 있을 아들을, 남극으로 떠난 아들을 기다린다. 그리고 마치 그들에게 했을 것처럼 무심하게 그러면서도 왜 얼굴이 상했냐며 자신의 집을 찾아온 재문(설경구)을 보이지 않게 챙긴다. 점심은 재문이 자신의 아들을 죽이러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피하게 할 뿐 재문을 다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점심은 다음날 재문을 찾아 재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무뚝뚝한 그의 태도를 받아낸다. 결국 죽음에 이르러 자신을 찾아온 재문에게 점심은 일어나서 밥 먹으라고, 뭐가 그렇게 서러웠느냐며 그를 잡고 흔들며 울부짖는다. <열혈남아>의 점심은 모두가 욕하는 아들을, 모두가 죽었다고 믿는 아들을 기다리며 자신의 아들을 죽이러 온 이를 보듬는 것을 솔직한 감정의 표출들로 설득한다. 그의 눈물은 그가 투박하게 던졌던 말들만큼이나 묵직하게 그리고 깊게 울린다.
나문희의 인물들은 <주먹이 운다>(2005)의 상환의 할머니에서, <권분순 여사 납치사건>(2007)의 권분순 여사에게서, <수상한 그녀>(2014)의 오말순 여사에게서 모두 속으로 삭히고, 기다리고, 그것으로 모두에게 아련함을 주었던, 우리가 예의 나이든 분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환상을 완전하게 부수어낸다. 생각해보면 나이가 먹는 것만으로 사람이 변하지는 않을 진데 우리는 늘 완고한 틀 속에 나이의 역할과 책임을 가두어 둔다. 나문희는 여기에서 자유롭기에 그만큼의 비극성을 고조시킬 수 있다. 그를 가장 대중적으로 알린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2006)에서 나문희는 며느리에게, 남편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소심한 듯 자신만의 복수를 행하고 고소한다. 이것에 공감했다면, 그리고 아마도 우리 엄마가, 할머니가 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종종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눈물이 나기도 한다면 우리는 늘 나문희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장소에 편안히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비단 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존자의 외침
<아이 캔 스피크>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바로 이런 나문희였기에 설득할 수 있는 장면은 어머니의 산소 앞에서 오열하던 바로 그 모습이다. <귀향>과 <눈길>에서 생존자들이 가지고 있던 죄책감과 그것에서 비롯될 자책을 완전히 걷어낸 것이 바로 이 장면이기 때문이다. <귀향>은 현재의 생존자가 영화의 전반을 이끌던 정민(강하나)이 아닌 그와 함께하던 영희였다는 것을 영화 종반에 가서야 드러낸다. 정민을 두고 갈 수밖에 없었던 영희의 죄책감은 정민이 지녔던 괴불노리개를 끊임없이 만드는 것만큼이나 쌓여간다. <눈길>에서의 생존자 종분은 고향으로 돌아와 근로정신대 명단에 등록되어 있던 영애의 이름으로 지원금을 받고, 그의 이름으로 살아갔다. 종분이 영애의 환영을 보는 것은 홀로 살아남았다는 것, 게다가 이름까지 빼앗아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책과 다르지 않았다.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은 과거의 그들이 아닌 돌아가신 어머니께 원망을 쏟아냈다. 그가 어머니에게 던지는 말들은 우리가 여태까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순간이 된다. “내가 더 소중하니까”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겠다고 “엄마랑 굳게 약속”했던 것을 “안 지키겠”다는 옥분의 말은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그렇게 망신스러워했느냐고, 아들 앞길 막을까봐 날 버렸냐는 그의 눈물 섞인 원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렇게 살아있고, 스스로 역사의 증인이 되어 많은 이들을 위해 나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에 대한 당당함까지가 녹아 있다. 눈물을 쏟아내는 이 장면을 보면서 후련할 수 있는 것은 <아이 캔 스피크>에서 옥분이 보여주었던 삶의 에너지가 와 닿기 때문이다.
옥분은 한 번도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는다. 그를 이해시키려는 대충의 변명들, 곧 해결될 것이라는 기약 없는 약속들은 나문희의 트레이드마크인 카랑카랑한 목소리 앞에서 힘을 잃는다. 그런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 그러니까 나의 의지와 상관없던 이 과거를, 강제로 끌려가 모진 일을 겪었음에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당당하게 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삶을 숨겨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폭력적인 상황인지에 대해 소리 높여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8000여건의 민원을 접수하는 도깨비 할매로 불리고, 자신을 떼어내려는 민재를 쫓아다니며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조를 수 있던 힘은 바로 여기, 자신이 여기에 있고 자신의 삶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 목소리에서 매우 적확하게 강화된다.
엄마와의 약속 때문에 숨길 수밖에 없던 과거가 사라질 상황에 처했을 때 옥분의 활발함은, 그리고 나문희의 생생함은 빛을 발한다. 아마도 도깨비 할매가 해왔던 것처럼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위해 엄청난 항의를 하고, 이를 듣지 않는 이들을 쫓아다니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이렇게 기대되는 옥분의 에너지로 가득 찬 영화이다. 이 에너지는 박제된 것처럼 보이던 피해자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한 것인지를 일깨우면서,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존재를 굳이 상기시키지 않으려 했던 수많은 이들(비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뿐만 아니라)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한다. 옥분의 에너지, 고맙고 감사하다.
약 20년이 걸려서야 도착한 그분들의 일상
다큐 <낮은 목소리> 이후 <낮은 목소리2>를 준비하던 제작진은 자신들이 할머니들과 전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영화로 인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현재로 이끌어낸 것, 할머니들을 대하는 성문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것에 고무되어 있던 자신들과 다르게 할머니들은 비로소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본인들의 상황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영화를 찍게 된 할머니들은 따라다니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보기 좋은 상황을 만들고자 했고, 전보다 정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했다(<낮은 목소리2 제작노트>,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1997.). 할머니들은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 국가 덕에 난방이 되지 않는 마루와 주방을 제외한 방 한 칸에 모두가 모여 사는 삶이 아닌 각자 자신의 집 한 채씩을 가지고 편안하게, 그러니까 자신들의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들은 똑같이 살고자 했고, 똑같이 미래를 그리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가 변하지 않았고 그렇게 20여 년이 흘러 <아이 캔 스피크>에 도착했다.
사실 <아이 캔 스피크>는 설명되지 않는 잉여가 많은 영화이다. 왜 민재가 굳이 7급 공무원이 되려고 하는지, 재건축과 관련한 에피소드는 왜 흐지부지 되는지, 일반적인 장르영화의 하이콘셉트를 충실이 답습하는 것은 아닌지 등의 문제는 영화 전반에 떠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영화로 인해 어떤 경향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우리가 외면해 왔던 그 많은 일들을 정의감이라는 이름으로, 진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스크린에 폭로하는 것을 벌써 넘어서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그 부분에서의 겸손함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제 조금은 다른 시각과 전달 방법이 고민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아이 캔 스피크>는 그 시작에 놓여 있다.
<열혈남아>(2006)
<드라이빙 미스 김옥분>(2008)
<귀향>(2016)
<눈길>(2017)
<아이 캔 스피크>(2017)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다음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