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동주』
우울한 근대의 빛나던 ‘감성의 시혼’을 찾아낸 걸작
영화 연출의 마술사 이준익 감독이 이번에는 우리 문학사의 커다란 일부인 시인 윤동주의 시와 시대, 지(知)와 사랑의 변주를 그린 『동주』를 한국 영화사에 상제했다. 이준익이 인간 윤동주(尹東柱)의 삶과 시에 올리는 경건한 헌사(獻辭)는 흐린 추억의 잿빛 빛줄기를 타고 스물여덟 삶에 이르는 후반부를 아련한 아름다움과 가슴 아린 슬픔으로 채우고 있다.
느린 흐름의 흑백필름은 윤동주가 살았던 시절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세로쓰기, 기타 음(音), 일본어 대사를 앞세운다. 1930년, 40년대라는 공간의 둔탁한 현(弦)위로 물방울 묘사(描寫)같은 동주의 시는 낭만가도의 앞선 정감을 띄우고 있었다. 발(:)처럼 내려앉은 공식, 동 시대의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자신의 활동무대의 가까운 곳에서 수인번호를 달아야 했다.
탄생 백주년을 앞둔 시인 윤동주는 지금은 남의 땅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하여. 연희전문을 졸업(1941년)하고, 일본 도시샤 대학 영문과 재학 중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광복을 여섯 달 앞두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별세했다. 대부분 1938~1941년에 쓰인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년 간행)에는 잎새에 이는 바람 같은 서른 편의 시가 실려 있다.
『동주』의 영화 기점은 1943년의 감옥 취조실이다. 수인번호 四七五(475)를 단 윤동주(강하늘), 기억의 실타래는 청년 윤동주의 고향을 타고 넘어, 윤동주의 정신이 이식된 가족, 종교적 배경, 고향 사람들의 민족성을 포착해낸다. ‘술가락’으로써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동갑의 고종 형 송몽규(박정민)가 순수로 자리 잡은 동주의 마음을 흔들어대는 불꽃이자 우상이 된다.
정신적 가치가 존중받던 시절, 소박으로 감싼 동주와 몽규에게 시인 정지용은 정신적 지주로서 지용의 시는 위안이자 도피처였다. 좌절의 늪에서 지용이 권한 일본 유학은 동주와 몽규에겐 또 다른 항일의 전장이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들을 학문에만 전념하게 만들지 않았다. 호롱불 밝히며 시를 읽고, 방앗간에서 시집 한권에 감동하던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학습을 받은 천재 독립운동가 송몽규는 조선 유학생을 중심으로 항일 투쟁을 하고 있었다. 몽규의 캐릭터는 용정에서 몽규가 동주와 세상을 대하던 행동과 대사, 동주가 몽규에게 “시를 쓰기만 하면 뭐하니? 발표를 해야지!”, 스승의 말에 몽규의 대답 “혁명가가 되고 싶나? -그 길을 알려 주십시오.”에 이미 나타나 있다. 여린 심성의 동주는 불안과 고독에 휩싸인다.
가리방 작업에 이은 내레이션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 ‘황혼(黃昏)이 짙어지는 길모금에서/하루 종일 시든 귀를 가만히 기울이면/땅거미 옮겨지는 발자취 소리, 발자취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나는 총명했던가요...’가 흘러나온다. 이후 그의 시는 사건의 전개에 따라 계속 삽입된다. 영화는 후쿠오카 감옥 고등계 형사(김인우)의 집요한 취조와 윤동주의 청춘의 삶을 교차한다.
취조 중에도 동주는 “몽규는 사람을 죽이지 못합니다.” 라고 항변하며 몽규를 끝까지 감싸 않는다. 이후, 북간도에서 서울행으로의 작별, 연희전문학교의 입학식의 기독교적 분위기, 문예지를 만들던 시절의 처중(민진웅), 동주를 설레게 한 소녀 여진(신윤주)이 열정과 순수의 분위기가 스치고, 이름 모를 주사제가 투입되는 감옥, 파파야 향 같은 ‘별헤는 밤’이 내려앉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장면은 동주와 여진의 정지용 선생 방문이었다. 당시의 두 사람의 교복 모습은 신혼여행 같은 정감이 느껴진다. 여진은 동주가 시를 사랑한 것처럼 세상을 사랑한 몽규의 마음을 헤아린다. 이본 유학시절 동주의 시를 사랑한 일본인 여학생 쿠미의 고운 마음씨도 감옥의 생체실험 분위기와는 다른 순수 영역의 빛나는 부분이다.
영화 『동주』에서 주발소리처럼 울림을 주는 시가 열편이 넘게 들어 있다. 과정이 아름다웠던송몽규와 결과가 아름다웠던 윤동주, 절망의 시대를 살면서도 희망과 용기로 현실을 극복하려고 무던히 애써 온 그들은 이슬로 쓰러져 갔다. 『동주』는 신파적 멜로드라마를 극복하고, 영화적 긴장감 조성을 위해 쿠미를 가공하고, ‘장발장’의 형사를 떠올리는 교또형사를 투입한다.
이준익은 윤동주의 ‘구슬 같은 시들은 암흑기 민족 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린’ 시들과 시대를 가로 세로 축으로 삼아 빛나는 흑백영화 『동주』를 만들었다. 『동주』를 품은 그의 시들은 여전히 빛나는 광휘(光輝)로써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2월 16일은 그의 기일이었다. 늘 가슴에 살아있는 그를 영화로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일 것이다.
장석용/영화평론가협회 회장역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