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협회 3월 합평회 : <위플래쉬> & <버드맨> 1부
날짜: 3월 20일
참석자: 안숭범, 정재형, 박태식, 이수향, 송아름, 민병선, 윤성은, 성진수
지금부터는 <위플래쉬>에 대해 얘기 나눠 보겠습니다.
박태식 : <위플래쉬>는 어디 내가 영화평을 부탁받아서 한 달쯤 전에 무려 원고지 40매를 썼어요, 40매를. 힘들었어요. (웃음). 근데 이거 하나 가지고 40매를 쓰긴 힘들더라고. 그래서 다른 영화 하나랑 비교를 해서 썼죠. 비교를 하니까 오히려 좀 보이더라고요. 뭐냐 하면, 일반적으로 음악영화에서, <위플래쉬>같은 영화에서는 뭐에 관점을 맞추냐면 대체로 인물이 음악의 정수를 발견하는, 다시 말해서, 처음 시작할 때는 조금 허접하다가 점점 깊어지면서 음악의 달인이 되는, 달인보다는 그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깨닫게 되죠. 그렇게 해서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고 마지막에 적절한 연주장면 같은걸 보여주고, 그렇게 하는 게 일반적인 음악 영화의 틀이더라고요. 그런데 <위플래쉬>는 말하자면 지금까지 생각하던 틀을 약간 깼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수상한 걸 보니까 (아카데미에서) 조연상하고 음악상하고 편집상인가 세 개를 받았어요. 이 세 가지 상만 보더라도 글을 쓸 수 있겠더라고.
강력한 캐릭터가 하나 나오는 거예요.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그리고 편집을 잘 하지 않았겠어요? 편집을 잘해서 이야기에 쉴 틈이 없었을 거라고요. 아마 이 영화를 만들 때 감독은 생각을 했을 거야. 이 영화에서 관객의 생각보다 항상 앞서나가야 된다는 관념이 있었을 거라고. 앞의 일을 평범하게 만들어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겠더라고요. 특히 그, 어디죠? 클럽에서 연주하면서 둘이 얘기를 하잖아요. 그때 재미난 얘기를 했는데 재능 있는 사람들을 갖고있는 기대를 넘어서는 세계로 밀어 붙이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만일 그러지 않았다면 루이 암스트롱이나 찰리 파커. 찰리 파커 훌륭한 사람이에요. 찰리 파커 같은 위대한 재즈 음악가들은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여기가 끝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근데 마지막 장면에서 연주를 시작 할 때 보니까 완전히 허를 찌르더라고요. 그래가지고 애를 당황시키고 애가 나가고, 사람들한테 창피를 당하고, 그러니까 나는 막판에 어떻게 끝나게 될지를 전혀 감을 잡지 못했어요. 그런 편집이 좋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계속하게 하는.
음향이 좋다고 하면 결국 그 영화가 최고의 음악을 한번 들려주겠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러다보니까 드럼, 드러머를 여러 사람을 등장시켜서 보여주는 거죠. 나는 그 옆에 다른 브로스밴드 이런 사람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는데 거기 드러머가 몇 명이냐면 한명 두 명 세 명이 나와요, 세 명. 이 세 명이 각기 다른 특징을 갖고 있어요. 그런 특징들을 보여주고 결국 주인공으로 가는 거죠. 이런 것들이 이 감독이 영화를 진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캐릭터를 보니까. 이름 뭐더라? 아, 플렛처 교수, J.K. 시몬즈라는 사람. 제가 그 사람 얼굴이 많이 익어요. 그래서 생각을 해봤더니 저기 나왔더라고. 저기 그 어떤 여자애가 애기를 가진.
성진수 : <주노>요.
박태식 : 맞아요, <주노>. <주노>에서 아버지로 나왔던 사람이에요. 그때 난 이 사람 연기가 아주 좋았거든요. 이 사람이 마스크도 굉장히 좋아요. 그래서 이 사람을 딱 처음에 보는 순간 연기를 잘하겠다란 느낌이 들더라고. 또 난 그 영화를 보면서 나한테 저런 교사가 있었던가 생각을 해봤어요. 그랬더니 고등학교 때 중학교 때 꼭 그런 사람이 하나 있었어요. 별명이 대체로 ‘정신병자’, ‘미친개’, ‘싸이코’ (일동 웃음) 그런 사람이 아주 익숙한데, 미국이라고 왜 싸이코가 없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 사람이, 행인지 불행인지, 그 사람이 최고의 능력을 다 가진 사람이에요, 제자를 키워내는데 있어서는. 그러면 나는 제자를 키워내는데 어느 쪽에 방점을 둬야 할 것인가 이게 난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이런 스승이 멋진 제자를 키워내면서 내는 쪽으로 이야기를 잡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적어도 그렇지 않았어요. 중간에 부각되었던 건 뭐냐면 이 스승 때문에 자살한 아이를 부각시켰잖아요. 결국 그거죠. 이 <위플래쉬>라는 영화 제목이 채찍질이잖아요, 채찍질.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키우면서 채찍질을 막 한다고, 그런 스승상이 있는데, 그런 스승상에 대해서 이 영화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현하는 거예요. 나는 그래서 이 영화가 그냥 단순한 음악 영화라기보다는 교육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스승이란 무엇인가, 학생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어떻게 키워내야 하는가, 그런 아주 큰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말하자면 강압적이고 채찍을 휘두르는 그런 사람보다는, 그래서 내가 그 때 대조를 했던 게 <비긴 어게인>이라 영화에 프로듀서가 나오잖아요. 그 사람은 계속 거기에 그 악단에 나오는 사람들이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지 발견해서 키워주잖아요. 그러면서도 즐겁게 음악을 해서 갈수도 있어요. 그러면서 진짜로 좋은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 사람(플랫쳐)은 그 반대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에서 감독이 그런 걸 의도하지 않았을까, 육의 본질. 거창하지만 하여튼 그런 좀 깊이 있는 부분을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음악은 인간에게 기쁨을 줄 수도 있고 슬픔을 줄 수도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스승을 만나 혹독한 체험을 함으로써 좌절을 맞보죠. 플렛처는 채찍질이 주 무기에요. 그리고 그가 휘두르는 채찍에는 일말의 자비심도 없어요. 마지막까지 자비심이 없어요. 그렇죠? 심지어 학생을 자살하게 만드는 채찍이라면 나는 그거는, 이 감독은 위험한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려고 마지막에 그렇게한 것이 아닌가 해요. 물론 뭐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죠. 그렇죠.
그 영화 자체에서 보여주는 연주들은 진짜 뛰어나더라고요. 배우가 직접 했다 그러더라고요. 재능이 있는 친구인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런 연주들이 아주 좋았고 음악도 좋았고. 나는 전체적으로 음악영화로서는 손색이 없다고 봤는데, 그냥 보통의 음악영화, 보통의 그런 음악영화에서 보여주려는 아름답고 멋있고 이런 것보다는 좀 더 심층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다고 보고요. 특별히 조연을 했던 J.K. 시몬즈라는 배우의 연기가 난 그 영화를 딱 보는 순간 올해 아카데미 조연상은 저 사람이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난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오랜만에, 진짜 오랜만에 진짜 좋은 음악영화를 본 것 같아요. <사운드오브 뮤직>이후로 (일동 웃음). 농담, 농담(웃음). 이런 영화들이 좀 있었나 몰라요? 이런 영화들이 있었나, 음악영화들 중에서? 이게 그냥 평범하지 않고 뭔가 좀 있다라는 그런 영화들이 몇 가지 있을 수 있겠죠. 하여튼 거기까지 하고. 얘기를 보탤 수 있으면 보탤게요. 너무 길었나?
이수향 : 저도 이 영화 시사회에서 봤는데 별로 기대는 안하고 가서 봤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드럼을 치는 강렬한 사운드가 하루 종일 생각이 나더라고요. 리드미컬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좋았었나 봐요, 뭔가 정서적으로. 그런 개인적인 소회를 남기고 싶고요. 영화는 앞에 얘기 하셨지만 크게 두가진거 같아요. 하나는 음악이 드러머와 하나가 되는 그 경지가 용어로 ‘player’s high’라고 하는데 음악이 곧 내가 되고 내가 그 음악이 되는 그런 단계를 영화에서 우리가 스펙터클로 보기가 쉽지 않잖아요. 이 영화에선 그 장면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게 되게 신기했고, 그걸 또 다른 대역이 손으로 해서 하고 이런 건 영화에서 좀 많이 있죠. 그런데 그 배우가 직접 그 장면까지 이르는 장면을 우리 눈에서 딱 현존하게 되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데 이 영화에서 그 점이 저한텐 재미있었고, 두 번째는 완벽한 연주나 더 나은 삶을 살기위해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가기 위해서 누군가 채찍질 하는 것에 대한 윤리적인 시선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맞느냐 옳으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보도 자료에서 봤을 때도 감독이 되게 유명한 드러머였대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밴드를 하고 굉장히 많은 좋은 상을 받고 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그런 압박들이 너무 많아서 구토도 하고 정말 막 자살 충동도 느끼고 그랬다고 해요. 본인이 그 극한의 경지에 가보니까 이러한 상황이 가진 문제의식이 좀 있었던 거죠. 본인 감독이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이 정말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거였던 건데, 개인적으로 저도 고등학교 때 밴드를 했었어요. 근데 이런 밴드는 아니고, 저흰 약간 음대진학반이라고 해가지고 오케스트라가 있었어요, 근데 그 중에서 저처럼 음대 진학을 하진 않지만 취미로 그걸 하는 학생들이 있었어요. 동문인 윤성은 선생님이 잘 아시겠지만 저희 학교가 그 밴드부가 되게 유명해요. 일반계 고등학교인데 되게 좋은 음대를 많이 보내는 걸로 유명한 학교였고 제가 거기서 색소폰을 불었어요. (이여, 다들 감탄)
흐흐. 어쨌든 제가 그걸 했었는데, 거기 담당 선생님이랑 이 영화의 플레처선생이랑 굉장히 비슷했어요. 거기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저희는 진짜 죽음이었죠. 예체능계가 되게 고리타분하고 위계질서가 철저한 게 있거든요.
윤성은 : 그분 별명이 에이즈였어요. 걸리면 죽는다 그래서 ..
박태식 : 별명만 들어도 짐작이 가네.
이수향 : 그래서 저희는 하다가 삑사리 한번 나잖아요? 듣는 귀가 너무 좋으니까 “야! 때려쳐!” 소리 지르면서 “야 방금 누구야, 나와” 막 이런 식으로 저희한테 맨날 욕하고, “오늘 집에 가기 싫지? 다 무릎꿇어” 맨날 이런 식이었어요. 그런 걸 제가 경험을 해서 정말 이걸 너무 잘 알아요. 진짜, 사람을 정말 코너로 몰아요, 되게 자존감이 낮아지고, 조금만 실수해도. 그래서 저는 이 심경을 알겠는데, 어쨌거나, 그래서 어떤 스승이 어떤 단계를 이루기 위해서 몰아붙이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허용이 되느냐에 대한 방금 좋은 해석을 해주셨듯이 그런 부분이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제가 이 영화에서 약간 훌륭하다고 보는 부분은 그 앞부분 배우가 실제로 음악적으로 굉장히 고양되는 부분을 현존시켰다는 것이죠.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 영화가 노미네이트도 수 십개가 되고 상도 수 십 개를 받았어요. 그런데 주연인 마일즈 텔러가 직접 드럼을 치잖아요. 그 부분이 좀 놀라운데, 영화적인 연기가 아니니까 상을 하나도 못 받았어요. 이 영화와 관련된 연기상은 전부 조연상이에요. 보도 자료에도 상이 몇 십 개가 써있는데 전부 남우조연상이예요. 좀 안타까울 정도로. 이 남자배우가 실제로 손에 피가 날 정도로 연습을 했대요. 그렇게 고생고생했는데... 플렛처는 솔직히 손만 조금 이렇게 흔들고 화만 내고 .. (웃음) 아, 그러니까 단순히 육체적 고생의 강도만 따지자면 그랬단 거죠. 고생은 누가 하고 상은 누가 받았나 (웃음) 이런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면서, 어쨌든 저에게는 이 영화가 굉장히 재미있었다는 소회를 남기고 싶네요.
송아름 : 저는 영화를 보면서 그냥 많은 생각을 한 것 같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제가 어떤 이런 식의 영화를 볼 때 내 나름대로의 기대하고 있던 뭔가 상이 이렇게 있구나, 그러니까 어떤 찌질했던 아이가 이렇게 해서 성장하게 되는 고런, 근데 약간 거기에서 이제 벗어났기 때문에 약간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그런 것들이 아, 내가 뭔가 영화를 볼 때 틀을 가지고 보는구나, 나름대로 이런 장르일거다 라고 근데 그런 거에 대해서 약간 좀 나름 반성이라면 반성을 하게 됐는데, 근데 그게 아니라고 해도 저는 약간 불편한 점들이 좀 있었어요. 어떤 매체든 간에 천재성을 이끌어내는 방식이 과연 늘 그런 식이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되게 인격적인 모욕과 되게 친절하게 와서 집안 사정은 어떠니, 어쩌구 저쩌구 물어보고 나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그래 니 엄마는 언제 나갔고 그런데 니가 이따위고 막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그리고 마지막에 가면 사실 그 악보를 아예 주지도 않고 나서 연주를 해버리는 거거든요. 공개적으로. 게다가 자기도 얘기 하죠. 여기서 제명되면 음악을 앞으로 못 할거야 그렇게 해놓고 그렇게 연주할 수 없도록 만드는 방식이나, 그리고 중간에 말씀하셨지만 자살까지 밀어붙이게 하는 그 아이를 내가 너무나 사랑하던 제자가 어제 교통사고로 죽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그런 방식들이 과연 적절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영화가 전체적으로 음향이나 편집이나 다 되게 좋았는데 그걸 말하는 방식, 그래서 아까 앞에 선생님께서 해피엔딩 이었다라고 마지막을 말씀하셨지만 저는 사실 별로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거든요. 그러니까 마지막 연주를 하면서 이 교수가 이 아이를 바라보는 눈빛과 이 아이가 그 교수를 바라볼 때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거리고 이러한 액션, 리액션이 있긴 했지만 그게 정말 아, 이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이만큼 발견했다는 느낌보다는 약간 악이 바쳤다고나 할까? 좀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영화가 오히려 광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에 상당히 공을 들이고 있다라는 생각이 좀 들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보면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는, 그런 영화일거다라고 생각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남학생이 사실 거의 처음에 시작할 때는 거의 왕따처럼 시작을 하는데 나중에 가면 이 자리는 내꺼다, 내가 따낸거다라고 다른 사람들을 밀치면서까지, 그리고 차 사고가, 전복사고가 나거든요. 피투성이가 돼서 거기까지 뛰어가서 선생한테 달려들어서 그 사람을 막 찍어 누르는 데까지 그렇게 변하는 건, 그 사람을 그렇게까지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 그거를 이끌어 내는 게 그리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고, 저도 평화주의자 이런 사람도 아닌데 약간 어느 부분에서 아,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서 그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게 과연 좋을까? 약간 그런 거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조금 더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네, 이상입니다.
민병선 : <위플래쉬>에 대해 이렇게 얘기 할 거라고 생각도 안하고 와서. (웃음) <화장>만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영화를 본 지 좀 되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웃음)
예술이라는 건 뭘까 이 생각을 많이 들게 했던 것 같아요. 꼭 음악이 아니어도 예술과 스포츠도 그렇고, 저렇게 인간의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이 있어야 성적은 좋잖아요. 그리고 예술이면 예술적인 성취도나 수준이 올라가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잘해주면, 착하게 잘해주면 솔직히 올라가진 않잖아요. 그러니까 예술이란 굉장히 가학적으로 많은 반복된 훈련과 고통과 통증을 주는 거죠. 체조선수, 발레리나는 하루에 수백 수천 번 똑같은 동작을 다시 해야 하고, 발가락뼈가 다 휘고. 모든 예술이 그렇죠. 그래서 여기 두 인물이 좀 비슷한 사람인 것 같거든요. 교육적이거나 이렇게 보진 않고 광기에 휩싸인 두 사람이, 어떻게 보면 서로가 서로를,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자기의 자아상을 보듯이 하는 그런 느낌으로 봤어요, 저는. 보통 예술가나 운동 선수가 극한으로 했는데도 실패한 사람이 나중에 가르치는 사람이 되면 저렇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 둘의 광기라든지, 서로에 대한 굉장한 시기와 질투가 보이는 거 같았어요. 아주 못되게 구는 걸 보면요. 처음에 이 영화 보고 싶었던 이유가, 감독이 제작비를 못 구해서 계속 영화를 못 들어가고 있어서, ‘어떻게 하면 제작비를 구할까, 제작사들이 왜 이 영화를 안 만들려고 할까’를 고민하다가, 유투브에 17분짜리인가를 만들어서 해가지고 화제가 되니까 겨우 이렇게 해가지고 제작비를 끌어 모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서 하여튼 예술의 길은 뭘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영화감독들도 그렇잖아요. 영화감독들이 현장에 가서 보면 정말 플렛처 교수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한 사람을 본적이 없는 것 같아요. 너무, 인간적 학대와 (웃음) 모욕감과(웃음) 그런걸 보는데, 그렇게 해야 (현장이) 돌아간다고 하거든요. 저렇게 해야 영화가 돌아간다고. 그래서 그 예술이란 뭘까란 생각을 많이 하는 찰나에 이런 영화를 보니까 결과론이 중요한 건지, 과정이 중요한 건지, 그런 걸 감독은 얘기를 해보고 싶었던 거 같긴 해요. 근데 예술가로서 성공하고 싶고 성취를 하려면, 또 이런 악마성을 가져야 하고, 이것도 학습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그랬습니다. 그런 생각을 많이 들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윤성은 : 저도 제가 이걸 단평으로 실은 적이 있어서 그걸 보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요(웃음). 지금 기억이 잘 안나가지고 ... 앞서 두 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는 일단 다른 어떤 음악영화든가 다른 영화들에서 봤던 그런 캐릭터들이랑은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 것 같아요. 되게 반전이 계속 있고 예상치 못한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게 되는 걸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그 두 캐릭터가 되게 전형적인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다른 느낌을 주고 그게 이 극을 이끌어가는 큰 긴장감이 됐다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좀 두서가 없는데요, 일단 쓴 걸 참고해서 말씀드리면, 이런 정말 드럼 한 세트랑 몇 곡의 악보 또 두 명의 독특한 캐릭터만으로 강렬한 드라마를 만들어낸 것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생각이 드는데 일단 여기의 질문은 저는, 아까 교육이란 무엇인가 스승이란 무엇인가라는 그런 주제가 강하게 들어갔다고 말씀드렸는데 대부분의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그들이 목표를 성취할 수 있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데 있다고 생각이 들거든요. 이 영화를 독특하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그래서 그 질문은, 어떻게 성취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은 최고가 될 수 있다면 어떤 방법도 용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죠. 그래서 대답이야 솔직히 거기서 아니다, yes or no, 그러니까 교육 방식에 대한 부분에 있어서 밀어붙이는 게 좋은 방법이다, 아니다 이렇게 갈 수가 있겠지만 이 영화는 그 과정이 정말 예측불허이기 때문에 거기서 주는 긴장감이 정말 좋았던 것 같고요.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거의 100분 넘어가죠. 그런데도 너무 짧게 느껴졌어요. 영화 한 80분대나 진짜, 그래서, 맨 마지막에 연주도 9분정도가 계속 두곡이 이어져서 되는 건데 진짜 그 깔끔한, 마지막에 끝나고 나서, 저도 시사회에서 봤거든요, 저희 시사회장에서는 끝나자마자 박수가 나올 정도로 그 호흡의 어떤, 호흡이 주는 감동이 있었던 것 같아요. 끝날 시점을 딱 알고 끝나는 그런 감동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도 너무 좋았고. 플렛처 같은 경우에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관련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는데 일단 저는 이 사람의 밴드에 모두가 들어가고 싶어 하잖아요. 그리고 그 사람이 그렇게 인격모독을 하고 혹독한 방식으로 해도 그걸 용인하는 학생들이 있단 말이에요. 자기도 최고가 되고 싶으니까. 그리고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채찍질을 견디고 나면 최고가 될 거란 어떤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런 것들이 용인이 됐는데, 이 마일즈 텔러는 그러지 않았다는 거죠. 이 사람도 거의 같이 광기로 가고, 사고가 났을 때 거의 기어가서 그 자리에 앉지만, 거기서 너 나가라고 했을 때, 너 끝이라고 했을 때, 저는 만약에 일반적인 학생이라면 나는 안되나 보다 나갔어야 했는데 거기서 정면으로 돌진하잖아요. 그리고 그 두 사람이 제일 많이 나오는 장면은 드럼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대치하는 장면인데, 그 장면 장면마다 그 긴장감이라든가 그 장면이 의도하는 바라든가 그런 게 너무 다른데, 거기서 결정적으로 마일즈 텔러가 드럼을 무너트리면서 그 사람한테 돌진하면서 이 두 사람사이에 어떤 그 광기가 완전히 폭발하는, 만나는 그런 지점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또 이 영화에서 우리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지점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플렛처가 마치 나는 그래도 훌륭한 학생을 만들기 위해서 그랬어 이야기를 하고 마치 회개하는 듯한 고해성사하는 듯한 느낌을 주다가 나중에 결국 또 뒤통수를 치면서 도대체 이 사람의 캐릭터를 우리가 어떻게 정립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의문을 마지막까지, 아 이사람 끝까지 나쁜 사람 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다면 아까 송아름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결말부가 정말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편하고 이게 결과적으로 그런 교육방식이 먹혔다는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가 있는데 저는 그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생각을 했냐면요, 어쨌든 간에 마일즈 텔러가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와서 그 사람을 다시 철저히 짓밟았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이 사람이 큐를 주기 전에 자기가 먼저 시작하고, 이건 지휘자의 권한을 완전히 빼앗으면서 자기가 오히려 지휘를 한 거죠. 모든 악기들 옆에서 너 뭐해, 내가 큐 사인 줄게, 내가 사인 드릴게요 이러면서 자기가 지휘를 하면서, 완전히 주도권을 가져가면서, 그래서 그 교수랑 눈빛을 보면, 이 교수가 맨 마지막에는 되게 인정한다는 눈빛을 보내거든요. 왔다갔다 클로즈업으로 편집이 되는 장면에서. 그래서 이 사람은 결과적으로 좀, 이 사람이 물론 교육방식이 맞았다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이 영화도 분명히 저도 비판하고 있다고 보는데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 사람과의 맨 마지막에 9분간의 연주를 통해서 분명히 이 사람도 깨닫는, 교사도 깨닫는 부분이 있고, 이 마일즈 텔러도 성장하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고, 그래서 좀 윈윈하는 식으로 끝났다고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게 명쾌하진 않지만, 찝찝한 부분은 물론 있지만 교육방식에 대해서, 저도 나름의 해피엔딩이라는 부분에 좀 더 무게중심이 가게 되는데요. 어쨌든 플렛처도 역시 자기가 그토록 원했던 제2의 찰리 파커를 이 마일즈 텔러를 통해 얻었고 앤드류도 역시 플렛처라는 사람이 밀어붙인 것들이 기반이 돼서 또 자기만의 성장을 이뤄가고, 그래서 이 두 가지가 같이 같은 성공으로 이어졌다라는 부분에 있어서 이 영화가 마지막 장면이 저는 나쁘진 않았고요, 한 가지 더 질문을 던지자면 천재는 과연 만들어지는 것인가, 이렇게 밀어붙이는 사람에 의해서, 아니면 정말 그냥 타고나는 것일 뿐인가. 뻔한 질문이지만 이런 질문이 남았는데 저는 이 예술을 완성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과 대가가 필요하다고 하는 게 하나의 현대적인 신화인 것 같아요. 이것도 역시 신자유주의적인 영향일 수 있고. 약간 모순되는 바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아요. 플렛처 교수의 말에 찰리 파커같은 사람이 나오기 위해서 내가 밀어붙여야 된다라는 것 자체가 천재를 만들어낸다는 얘기잖아요. 근데 사실 천재의 정의는 그게 아니거든요. 원래의 의미는. 그러니까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의 질문은 제가 정리하기로는 현대의 어떤, 바르트가 말하는 신화적인 것, 노력으로 인해서 뭔가 정점을 찍을 수 있고 최고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좀 비판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성진수 : 매우 흥미진진하게 봤어요. 극의 구성이 상당히 뛰어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물도 아주 단순한 구도이고, 특별한 사건들을 외부적으로 만들어내지 않으면서도 극의 구성을 아주 탄탄하게 전개해갔고, 편집상을 받을만한 것이, a라는 사건이나 장면에서 b라는 사건으로 넘어가는 타이밍도 좋았고, 전반적인 만듦새도 굉장히 훌륭했고, 보는 내내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고, 모든 면에서요. 인터넷을 보니까 현재 <위플래쉬>가 예매율이 1위더라고요. 그만큼 대중들에게, 보는 내내 긴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호흡을 가진 영화인 것은 확실히 맞는 것 같아요.
지금 여러 분들이 플렛처와 주인공 사이의 관계를 교육을 하는 자와 교육을 받는 자의 관계로 보면서 이 영화에 대해 말하셨는데, 저는 이걸 다르게 봤었어요. 저는 이걸 보면서 <블랙스완>이 되게 많이 떠올랐었거든요. 플렛처라는 사람이, 물론 극중에서 지금까지 말씀하신 것처럼 교육을 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교육방식이 옳은가 틀린가에 대해 얘기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이 플렛처라는, J.K. 시몬즈가 연기한 인물이 흥미진진했던 이유가, 마치 <블랙스완>에서 화이트 스완인데 블랙스완을 해야 하는 주인공에게 환영처럼 나타나는, 자기 강박,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강박에서 나타나는 주인공의 환영처럼, 이 플렛처라는 인물이 보였기 때문이에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목표, 꿈, 그 과정의 고통, 이런 것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인물이 매우 괴팍한데, 또 한편으로 매우 아름다운 음악처럼, 아름다운 모습들이 보이는 인물이었던 거예요. ‘저 캐릭터는 어떻게 해석을 해야 되나’ 싶은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캐릭터로 그려지고 있죠. 그것이 주인공이 가진 꿈하고 굉장히 많이 동일시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꿈꾸는 것 혹은 내가 목표 한 게 나에게 한계를 깨닫게 하고 그로인한 고통과 좌절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 플렛처라는 인물도 주인공에게 선망이면서 동시에 좌절을 주는 인물이고요.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가 어떤 교육방식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어떤 인물이 강박적으로 목표를 이루어가려고 했을 때 부딪히는 한계와 그 한계를 넘어가야 되는 상황들, 그 사이의 인물들을, 아까 이수향 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단계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또 이 영화가 좋았던 점은, 한 인물의 내적인 측면을 다른 캐릭터와 상황에 반영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얼굴을 표현해주는 캐릭터를 저는 흥미로워 하는데, 플렛처가 그런 인물이라고 여겨지거든요. 그리고 영화에서는 플렛처 뿐 아니라 주인공의 가족도 그의 목표와 꿈에 사실은 방해가 되거나 장애가 되는, 좌절을 주는 그런 대상이죠. 그 가족들의 실제 의도와 상관없이 주인공에게는 그런 존재인 듯 보여요. 플렛처 교수가 가족 중에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을 때 주인공은 아무도 없다고 하죠. 주인공이 느끼기에 음악을 하고 있지만 자기의 꿈에 대해서 이해해주는 사람이 그 가족 중에는 아무도 없어요. 그리고 플렛처 교수가 일부러 심어놓은 것 같은 경쟁자 드러머들도 사실 주인공의 꿈에 계속 좌절을 주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 모든 캐릭터들, 즉 주인공이 한명이 있고 그를 둘러싼 모든 인물들은 이 주인공의 목표이자 동시에 그 목표를 갖는데 좌절이 되는 것들로 다 반영이 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런 구도들이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그런 의미에서 아까 민병선 평론가께서 말씀하셨지만, 드럼을 중간에 두고 플렛처 교수와 주인공이 클로즈업으로 대결하는 장면들은 마치 거울이미지처럼 비춰지는데, 그런 장면들 또한 인물의 내면에 있는 꿈의 달콤함과 그것을 이루려는 집념과 도전, 또한 그 가운데 스스로 느끼고 있는 좌절감, 완벽한 음악이라는 목표가 던져주는 좌절감 등, 주인공의 내면이 플렛처 교수에게 반영되어 비춰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플렛처 교수가 클럽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장면이었어요. 주인공이 학교에서 쫓겨난 다음에 우연히 길을 가다 카페 같은 곳에 들어가잖아요. 그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그 교수의 모습은 이전과 너무나 상반되는 거예요. 평화롭고, 그 전에 정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싶도록 괴팍했는데,(웃음) 평화롭기 그지없고, 연주하는 음악은 너무나 아름답고 말이죠. 그 플렛처 교수의 모습은 음악을 관둔 주인공에게 너무나 유혹적이었을 거 같아요. 연주가 끝난 후에 플렛처 교수가 주인공에게 자신의 밴드에 와서 연주해 보겠냐고 했을 때, 주인공이 얼른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유혹에 넘어갔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너무나 바랐지만 좌절을 많이 해서 이제 안하려고 했던 어떤 것이 달콤하게 다시 유혹하는 그런 순간인 것이죠. 플렛처 교수는 악마가 유혹하듯이 피아노를 치면서 아름답고 완벽한 음악, 주인공이 그토록 원하는 그 순간을 선물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인공은 덜컥 그 기회를 잡고 클라이막스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이죠. 그 클라이막스가 자신을 죽음의 직전까지 밀어 넣을 것이라는 걸 상상도 못하고 말이에요. 물론 주인공은 그것을 극적으로 극복하죠. 카페 장면과 연주회 장면의 극적인 분위기 연출은 정말 뛰어났다고 봐요. 저는 외국영화를 보면 한국영화랑 비교를 해요. 한국영화에서도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라든지 희망을 가지는데, <위플래쉬>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정말 많이 들었어요. 상투적이지 않으면서 독특하고 다양한 층위의 의미를 담고 있는 플렛처 교수 같은 캐릭터를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하게 들었어요.
플렛처 교수를 연기한 J.K. 시몬즈라는 배우가 <주노>에서 인상 깊었다고 하셨는데, 사실 대중적으로 가장 큰 인상을 남긴 건 <스파이더맨>이 아닐까요? 편집장을 하잖아요. 만화 속에서 바로 나온 것 같은 인물로 보이는데, 이 영화(<위플래쉬>)에서는 헤어스타일도 다르고, 전혀 다른 범접할 수 없는 캐릭터를 흠잡을 데 없이 연기해서 조연상을 받을 만하다고 봤어요. 연기, 배우의 변신, 관객을 몰입시키는 영화적 힘 등등 인상적인 영화였습니다.
박태식 : 독일의 한 잡지가 있어요. 거기에 영화평론가들이 글을 많이 쓰는데, 그때 어떤 영화평론가가, Erfindung, Erfindung des charakters, 독일말로 Erfindung은 발견이라는 거예요. 뭐냐하면, 아카데미 영화제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그 사람이 아카데미 영화제의 특징 중 하나가 인물의 발견이래요. 그러니까 우리가 평범하게 넘어갔는데 그 인물을 발견해내서 쫙 부각시켜주는 이런 게 있더라고. 그래서 내가 이 영화평을 쓸 때도 썼는데 그런 사람이 있어. 플렛처 교수같은 사람이 있어요, 진짜. 그런데 나는 그 사람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냥 평범하게 넘어가는데 감독이 찾아낸 거야, 그 사람을. 그 사람을 쫙 부각시켜서 ‘야 진짜 저런 놈이 있지’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아까 악마적인, 너무나 평온하고 그런데 속에는 악마적인 욕망 같은 게 있고 파괴욕심이 있고. 그렇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이상한데 거기다 마침 실력이 있어. 아무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그런 경우. 그래서 그 인물 하나를 딱 부각해서 발견, 아까 캐릭터 얘기를 하셔서, 그런 것도 아마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장점 중에 하나가 아닐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정재형 : <위플래쉬>가 제목인데 채찍질이라고 하면 결국 이 영화는 그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고 보죠. 첫째, 채찍질은 나쁘다 (일동 웃음), 두 번째는 채찍질은 자기를 단련시킨다. 채찍질은 나쁘다는 게 어떤 면에서 (이 영화의) 표면적인 구조로 작용했다면, 채찍질은 자기를 단련시킨다는 건 바로 앤드류의 주제가 되겠죠, 내면적인. 지금 바로 악마성을 가진, 어찌 보면 메피스토펠레스, 이게 어떻게 보면 <파우스트>의 세계를 담고 있네요. 그렇게 보니까. 저는 생각을 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굉장히 많은 서브텍스트를 생각하게 하는 영화인 것 같아요. 메피스토펠레스를 통해서 뭔가 완성되어 가는 <파우스트>의 주제처럼 보이네요. 저는 이 영화를 그래서 내면의 어떤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뭐냐 하면 아까 성진수씨 얘기에 저는 동의를 하는데, 윤성은씨 얘기와 어떤 마지막 엔딩에 서로 교감을 하면서 드럼을 사이에 두고 교감을 하면서 끝났다. 그 장면에 저는 사실 성진수씨가 얘기한데로 저도 똑같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말하자면 이게 더블(double)이라고도 보여지죠. 분신. 어찌 보면 앤드류가 자신(플렛처)의 과거와도 같은, 어찌 보면 같은 존재인데, 그런 엔딩의 모습. 죽은 자도 있지만 그것을 극복해서 자기도 교사의 입장에 섰고 자신도 마스터가 된 건데, 그런 입장에 섰다라면 바로 그런 입장이 되기 전까지는 이제 끝없이 채찍질을 자신이 해왔던 것이고, 죽은 친구는 좌절한 것이지만 끝까지 살아남았을 때에는 정말 자기가 미소를 보낼 수밖에 없는, 어찌 보면 자기의 분신과도 같은 그런 모습이 저도 좀 있지 않았을까, 그런 구도 속에는, 그런 미장센 속에는, 그런 생각도 들고요.
저는 사실 많은 서브 텍스트들이 떠올라요. 예를 들면 인간의 광기 이런 걸, 줄거리와 별개로, 그런 광기적인 캐릭터를 통해서 뭔가 광기가 분명히 인간에게는 있는데 그걸 선악개념으로 표면적으로는 판단하지만 그게 단순히 선악을 넘어서 어떻게 인간의 본성, 본질과 같다는 것 말이죠. 그게 아주 심하게 국가적으로 나타나자면 파시즘, 독재 이렇게 갈 수도 있데, 이게 다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예술가를 만들기 위해서, 교육을 잘 하기 위해서, 훌륭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내가 채찍질을 한다는 것이 정당화되고 합리화된다고 할 때, 저는 어떤 영화가 떠오르냐면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의 아귀레(Aguirre, Der Zorn Gottes 1972)
박태식 : 거기 누구 아버지가 나오죠?
정재형 : 클라우스 킨스키, 나스타샤 킨스키의 아버지가 나오죠. 거기서 많은 대원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결국은 다 죽고 끝까지 혼자만 살아남고 결국 엘도라도를 가야되겠다고 하죠. 이렇게 광기와 집착과 권력과 채찍질을 한 그런 아귀레 장군을 떠올리게 되고, 그게 헤어조크의 주제였는데, 그런 측면을 이 영화가 분명히 느끼게 합니다. 물론 그렇게 단순하게만 해석하긴 어렵지만요.
또 천재에 대한, 즉 천재 혹은 예술, 예술가가 흔히 천재의 어떤 모범으로 보는. 칸트도 그렇고 많은 철학자들도 그랬지만, 칸트가 특히 그런 식으로 봤죠. 칸트, 아도르노 이런 사람들이 그런 맥으로 내려오잖아요. 소위 말해서 예술의 중요성, 예술이라는 게 정말 천재들만이 이 시대를 끌고 나가는 굉장히 중요한 사명을 갖고 있는, 그래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그런 측면에서 이런 단련, 채찍질이라는 것이 정당화 되고, 그것은 또 적자생존이죠, 어떻게 보면. 이 영화에 나오는 죽은 졸업생, 음모가 밝혀지는 그런 순간에, 그렇게까지 평이한 사람은 할 수 없고, 인간적인 고뇌를 하는 사람은 그 예술의 경지에 갈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까지 대단한, 어떻게 보면 엘리티즘이잖아요, 그런 것들이 영화 속에서 사실은 비판되어져 왔다고 저는 생각하거든요. 대표적인 것이 <아마데우스 >같은 거고요. 밀로스 포먼이 결국 모차르트 보다는 살리에르에 어떤 강조를 했죠. 세속적으로는 이 영화에서 보이는 채찍질의 준엄함, 위대함이라는 것을 충분히 현실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예술가들의 견해에 있어서는 밀러스 포먼같이 분명히 살리에르, 평범한 사람들의 질투와 속물성, 그런 부분을 예찬했단 말이죠. 또 가장 대표적으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 정말로 민중의 삶의 낮은 데로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술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할 수 있고, 그런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가 고민을 했던 화가의, 성화를 그리던 화가의 고통을 그렸단 말이죠. 지금 이러한 미국에서 감독이 얘기하는 어떤 이런 거는, 영화보다는 저는 드라마 중에서 옛날에 했던 <베토벤 바이러스>에 나오는 강마애 이미지를 어찌 보면 닮았다는 생각도 좀 들었어요. 그래서 알고 보면 이 사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라는 식의 결론을 이 영화도, 그렇게 또 해석이 되더라고요. 마지막에 서로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저는 거기서 좀 그런 부분을 보죠. 적자생존이라는 것. 적자생존해야 된다는 그런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예술이나 권위적인 어떤 것이.
또 다른 서브 텍스트들을 생각하면서 저는 이 영화를 좀 설명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한국영화의 <서편제>에서 주인공 유봉이 그렇게 딸의 눈을 멀게 하면서까지 예술을 추구하려고 했는데, 그러나 그것은 사실 광기죠. 왜냐하면 본인의, 당사자의 의사보다는 본인의 어떤 입장으로 예술의 중요성을 강제화 시키고 하는 것인데, 그런 것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하는 데에서는 <서편제>는 그것을 정당화시켰지만 다른 영화에서는 사실 좀 비판하는 시각도 많단 말이죠. 그래서 제 견해는 그렇습니다. 이게(<위플래쉬>)가 많은 주제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끔 하는 굉장히 좋은 텍스트다. 저는 이게 단순한 오락영화는 아니구나.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상당히 재미있는 영화라고 봅니다. 그 의미들을 풍부하게 해주는 영화라는 점에서 굉장히 좋게 봤고요. 특히, 제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저는 자아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 해석을 하고 싶기도 해요. 그래서 결국 저는 채찍질을 무수히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이 그걸 극복해내는 앤드류의 입장에서 이 영화의 주제가 해석되어지지 않는가. 그건 다시 말하면, 결국은 예술이라는 것도 강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어떤, 물론 오기라고 해도 좋지만, 결국 자율적인 것에서 나오지 않았나 하는 거죠. 이 주인공이 극복해냈던 힘은 과연 무엇일까? 어찌 보면 그것은 자기와의 싸움이죠.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거라도 보이는데, 저는 그런 것들이 채찍질을 비판하면서도 우리 안에 숨겨진 신성, 정말로 천재성이라고 해도 좋은 그 어떤 것이, 결국은 천재성이라는 것이 자기를 극복하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교훈을 전달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렇게 봤거든요. 그래서 그 평범한 사람의 안에 숨겨진 천재성, 혹은 평범한 사람의, 일반사람들의 내면에 숨겨진 신성, 이런 것들을 드러낸다고도 저는 보여져요.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남는 약간의 혼란스러움은 이런 거겠죠. ‘그 자체도 플렛처가 만들었단 말인가’, 라는 식의 혼돈은 있어요. 그것이 정당화되는 듯한. 그것조차도 플렛처가 없었다면 과연 앤드류가 됐겠냐고 질문한다면 당혹스럽긴 하지만, 저는 분명히 그것은 차치하더라고, 그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본질적이고 우주적인 질문이라서,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플렛처에 또 다...... (웃음) 파우스트도 결국 메피스토펠레스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어떤 계기를 주어졌다는 그것조차도 마치 선지자처럼 플렛처가 마지막에 씩 웃으면서 넌 내가 만든 피조물이야 이렇게 얘기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그거를 떠나서라도 저는 앤드류가 진짜 그 강압을 싫어하고 자기는 자기 안에서 플렛처와는 다른 자기를 깨닫고 극복하면서 플렛처의 지위에 올라왔다는 거, 저는 그 부분을 굉장히 해석하고 싶고 그렇게 읽고 싶은 거거든요, 이 영화를. 그래서 역시 이 영화도 플렛처를 정당화시킨다기 보다는, 인간의 어떤 자유와 자율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아이러니적인 엔딩이 있지만 플렛처를 정당화시킨다고 보고 싶지는 않고, 앤드류의 어떤 극복, 저는 그런 쪽에 상당히 감동 같은 게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마구 얘기하시죠(웃음). 순서와 상관없이.
성진수 : 저희가 <버드맨>과 함께 하려다가 시간 관계상 <위플래쉬>를 중점적으로 하게 되었는데, <위플래쉬>하고 <버드맨>하고 어떤 의미에서 비슷하게 맞물리는 지점이 있더라고요. 드럼이라는 것도 있고, 제가 <위플래쉬>를 보면서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 앤드류의 내면적인 상징으로 해석을 했는데, <버드맨>도 비슷하거든요. <버드맨>도 주인공의 내면이 외적으로 반영된 인물들로 여길 수도 있잖아요. 물론 그 인물들 하나하나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요. 이 영화의 제목인 <버드맨>이라는 제목 자체가 대표적으로 그렇죠. 인물 내면의 목소리, 또 다른 자아로써 목소리를 내준다는 측면에서 이 두 가지 영화가 공통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민병선, 윤성은 : 그리고 둘 다 아카데미를 목표로 했다는 ...... (웃음)
민병선 : 상 받기 좋죠.
성진수 : 근데 잠깐 다른 얘기를 하자면, <버드맨>이 작품상을 수상하는걸 보고, 아카데미는 영화에서 헐리웃 얘기를 하면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수향 : 저는 그거랑 좀 비슷하게 아카데미에서 <버드맨>이 탈 줄 알았어요. 탈 수 밖에 없어요. 왜냐면 아카데미는 약간 예술가를 다루거나 정말 진지하게 그런 소재를 다뤄서 어느 정도 작품이 나오면 점수를 더 주는 경향이 있거든요. 자기기반영적인 면이 있어서 예술가, 비평가라든가 하는 존재를 제대로 다룬다면 확실히 점수를 좀 더 주는 것 같아요. 자기를 극한까지 밀어붙여서 뛰어넘거나 그것이 조금 새로운 방식이거나 그러면 고평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는...
윤성은 : 주연상은 좀 희귀병에 걸려야 돼(웃음)
이수향 : 약간 좀 메소드로 가야해요(웃음) 극한까지 본인을 막 끌어서 ...
윤성은 : (웃음) 체중감량 20kg 막 그렇게 ..
안숭범 : 아카데미상이, 전 잘 모르지만, 감독협회, 작가협회 이런 사람들이 참여하잖아요. 그러니까 전통적으로 영화를 만들어 보고 참여 해 본 주체들이 의해서 심사가 되어져 오다 보니까, 둘 영화다 안 봤기 때문에 말할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아카데미상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자면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윤성은 : <아티스트>라는 영화가 탔을 때도, 그러니까 <버드맨>이 탈거라는 걸 예상하게 해주는 그런 ......
정재형 : 그러네요. 아카데미는 나는 실패한 영화제라고 항상 생각을 하지만, 특히 올해 굉장히 실망을 안겨준 게 원래 <셀마>라는 영화가 굉장히 화제가 돼서 타임즈나 이런데서 특집으로 다뤘고 했는데, 하나도 받지 못했죠.
박태식 : 노미네이트는 여러 군데 됐죠.
정재형 : 그런데 하나도 받지 못하고 이미 비판을 많이 받았는데, 그렇다고 <버드맨>과 <위플래쉬>가 형편없었다는 얘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흑인을 하나도, 마이너리티를 반영을 못했다는 거죠. 다행히 <버드맨>의 그래도 감독 이냐리투가 맥시칸이고 그 영화를 보고 미국적인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은 ‘아 이건 굉장히 이방인적이다’ 라고 얘기를 하거든요. <비우티풀>이라는 그 전작도 그랬죠. 그래서 감독의 그런 멕시코적인 개성, 마이너리티적인 개성, 미국 내에서도 멕시칸들이 많이 살잖아요, 그런 구성, 확실히 마이너리티 적인 개성이 ......
박태식 : <비우티풀> 배경은 스페인이지, 스페인.
정재형 : 그러니까 스패니쉬, 통칭해서 그런 미국 내의 스패니쉬 마이너리티들이 이제 사실은 좋아하죠. 어떤 의미에서 마이너리티 정서가 있고 한 것에 대해서. 어쨌거나 그런 점들을 제외하고는 올해, 얼마 전에도 오바마가 셀마 행진도 참석하고 했는데, 아마 몇 십 주년인가 그랬을거예요, 그래서 기념하는 의미로도 영화를 만들고 그랬는데, 흑인 인권운동을 사실은 상징적으로 재조명할 수 있는 영화였는데 수상을 못했죠. 모르죠. 영화의 완성도가 없어서 떨어졌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거는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흑인 배우가 한명도 되지도 않았고, 그 외에도 그렇죠. 대표적으로 마이너리티니까. 그런 부분에서 실망을 줬죠.
<버드맨>하고 그런 점은 지금 와서 드럼의 존재를 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그러고 보니까 <버드맨>의 드럼도 인상적이었지만 <위플래쉬>와 그것이 그렇게 연결된다는 것은 또 굉장히 흥미로운 지점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