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협회 3월 합평회: <위플래쉬> & <버드맨> 2부
날짜: 3월 20일
참석자: 안숭범, 정재형, 박태식, 이수향, 송아름, 민병선, 윤성은, 성진수
윤성은 : 그런데 작년 같은 경우에 아카데미시상식에서 <노예12년>이 꽤 많은 상을 탔죠. 사실 저는 그 작품을 그렇게까지는 좋게 보지는 않았는데, 그래서 또 거기에 대한 관심이 미국인들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좀 들어요. 약간 그 해마다 그 트렌드가 바뀌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어쨌든 저는 <버드맨>이야기도 나왔으니까 조금 더 하면 할리우드에 있으면서 이 사람들이 자기반영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되게 자기비하도 약간 있는, 자존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 같아요. 자기들이 예술한다는 생각을 안 하고, 예를 들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도 이미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인데 자기는 예술가가 아니고, 그냥 소설가가 되고 싶다, 소설가로 인정받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파리에서 위대한 예술가들을 만나잖아요. 그런 것처럼 <버드맨>도 되게 비슷한 정서를 느꼈거든요. 자기는 버드맨으로서 성공을 할 수 있었는데 속편을 찍지 않고 계속 뭔가 진정한 배우로서,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거대 상업주의적인 그런 영화의 주인공이 아니라 연극, 브로드웨이에서 배우로서 무대에 서면서 성공하고 싶고, 거기 나오는 실제 희곡 작가가 유명한, 미국에서 현대문학, 이름이 뭐죠?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가 정말 아주 뛰어난 문학가잖아요. 그런 사람의 희곡을 올리면서 굉장히 뭔가 할리우드에서는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예술의 지점이 있음을 자기비하와 자기학대로 .. 그래서 저는 <버드맨>이 그 할리우드에서 브로드웨이까지 30년 동안 정말 그 먼 길을 극에서 극으로 날라서 브로드웨이에 서는 꿈을 이루려고 하는 그런 부분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런 부분도 분명히 아카데미에서 좋아할만한 부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이수향 : <버드맨> 영화는 결국 그건 거 같아요. 예술가가 될 거냐 연예인으로 삶을 마감할 거냐는 기로에서 고민하고 있는 한 남자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거죠. 영화에 나온 톰슨이란 인물과 완전히 일치하진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전국민적으로 유명한 개그맨인데, 뭔가 생의 말년 쯤에 이르러 영화를 혹은 영화예술을 하고 싶어하고 자기가 돈과 열정을 투자하는 그런 경우.... 톰슨은 자기가 했던 그런 영역에서 되게 대중적인, 전 국민이 이 사람을 다 알아요,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영화를 하려고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왜 영화를 하고 싶냐 이거예요. 대중적인 팬덤으로 어느 정도 자리에 올랐고 인기 연예인이고 돈도 벌만큼 벌었는데. 근데 이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는 실존의 근원에는 나는 그냥 이렇게 한 시대 풍미하고 떠나가버릴, 그냥 말 그대로 bird(새) 같은 존재를 넘어서는 불멸의 어떤 걸 꿈꾸는 거예요. 그 불멸의 어떤 것의 의미에 이 사람이 생각한 층위로는 더 위에 배우가 있는 거죠. 연극배우가. 그러면서 자기를 데리고 연극을 시켜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자기가 제작을 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근데, 당연하게도, 이 사람이 생각한대로 전혀 되지 않죠. 배우들은 제멋대로, 돈은 되지도 않을 것 같고, 제작비도 딸리는데 돈이 더 들 일만 생기고, 평론가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억지로 유명 배우를 캐스팅했더니 맘대로 기계를 사서 들여서 선탠을 하고 있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 펼쳐지고, 딸은 자기를 원망을 하고. 이런 저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이 사람은 분열증적인 자아이자 자기 내면에 있는 버드맨과 실제로 대화하며 혹은 싸우며 견뎌나가죠. 그런데 이 영화가 재밌는 건 그런 모든 것을 굉장히 진지하게 다루는 방식-이런 경우 진지하게 다루는 것이 일반적으로 적절할 것 같아요-을 회피하고 있어요. 도리어 영화는 그런 분열증적인 자기 고민을 되게 블랙 코미디처럼, 아무것도 아닌 척, 혹은 이상한 객기처럼 약간 조소하듯 그려내고 있는데 저는 그 부분이 좀 재미있었어요. 블랙코미디로 되게 진지한 문제의식을 담아내기가 되게 애매하고, 오히려 어정쩡하게 빠질 수가 있는데, 영화적으로 재미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그런 부분들을 잘 살려냈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그 연극 공연 뒷 무대에 그 좁은 길들 있잖아요. 미로같이 되어있는 좁은 길들을 정말 롱테이크로 따라가는 그 시퀀스들에서 이 사람이 진짜 원하는 어떤 좁은 길로 가고 싶은, 정말 몇몇 만이 살아남는 어떤 그런 진짜 근본적인 세계에, 예술의 세계라고 생각하는 그 쪽에 가기 위해 이렇게 노년에, 이런 늙은 정말 코미디 배우 같은 사람이 애를 쓰는 모습이 좀 뭐랄까 저한테는 나름대로 감동이 있었어요. 솔직히, 뭐 톰슨 본인 뜻대로 되겠어요? 자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고 수준이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근데 그런 애를 쓰는 모습에서 저는 나름대로 공감이 갔고, 진정성이 느껴져서 좋았어요. 세밀하게 연기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리건 톰슨은 이 연극을 올리기 위해서 처음에 프리뷰를 하고 그담에 본 연극에 들어가고, 진행되면서 연극을 계속 여러 번 반복을 하잖아요. 근데 처음 이 사람이 프리뷰 할 때는 이 사람 연기가 진짜 발연기에요. 그러니까 연극배우가 아닌데 연극배우인척 하려고 이상한 가발을 쓰고, 거기 대사가 그거예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사랑이란 이 세상에 존재해? 이런 얘기를 하는데 너무 그게 문어체잖아요. 근데 대사 연기가 너무 문어체에요 되게 인위적인 말도 안 되는 유치한 연기를 막 해요. 근데 상황이 지나가면서 이 사람의 어떤 내면적인 갈등과 고통이 심해져가면서 마지막에 가면 그 연기가 정말 대 배우의 연기처럼 깔끔하게 딱 맞아 떨어진 연기로 바뀌거든요. 그런 미묘하게 바뀌는 그런 지점들이 전 되게 재미가 있었어요.
이 영화에 대해선 할 얘기가 너무 많은데, 편집, 음악, 테이크, 뭐 이런 거 할 얘기가 너무 많아서 이 자리에서 다 못하겠네요.ㅎㅎ 감독이 이런 얘기를 했더라고요. “자아와의 싸움을 꼭 다루고 싶었다. 얼마나 성공을 거뒀든 부와 유명세를 거뒀든 그건 일시적인 환상에 불과하다는 개념 말이다.” 그리고 감독이 덧붙인 얘기가, “연극배우들은 영화는 막 여러 번 찍을 수 있으니까 좋지 않아? 이렇게 얘기하고, 영화배우들은 연극은 너무 과장된 연기야”라고 얘기를 하는 풍토가 있대요. 근데 그건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있는 통념이죠. 연극과 영화의 위계라든가 어떤 자기 방어적인 논리들이 미국에도 똑같이 있다는 게 저한테는 흥미로웠고, 그 뒷얘기를 이렇게 자세하게 잘 보여주면서 작품적으로 재미있게 꾸며낸 경우가 많이 없는 것 같아서 이 영화에 많은 점수를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재형 : 저는 사실 아까 나온 얘기 중에서 자기반영성 얘기하면서 할리우드가 대상이 되는데, 할리우드가 왜 자꾸 이렇게 자기들이 자책을 하고 자괴감을 가질까 하는 것에 대해 얘기를 듣고 보니까 나름대로 정리가 이렇게 되는데요. 사실 할리우드가 상업적으로 많은 욕을 먹잖아요. 유럽영화나 다른 나라 영화들과 비교해서 예술성이 없다는 측면에서. 그런 것들이 굉장히 강박증이 됐고 바로 그러한 징후가 아닌가. 그래서 할리우드 비판했던 자기반영적인 영화들이 있었죠. 대표적인 게 로버트 알트만의, 그가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영화화 한 바가 있는 그 영화는 아니지만요. 그 영화는 <숏컷>이라는 영화죠. 그것이 아니라 그 감독이 만든 <플레이어>라는 영화가 대표적으로 있었고, 코엔의 <바톤 핑크>인데 똑같은 갈등이 나타나죠. 브로드웨이에서 아주 서민의 살아있는 연극을 하던 재능 있는 극작가가 할리우드로 넘어가면서 레슬링,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레슬링 시나리오를 쓰면서 질식할 것 같은 상태에 빠지는, 마치 공포적인 상황까지 가는 그런 것이 이 영화인데, 이 영화(<버드맨>)를 해석할 때 느꼈던 부분과 아주 흡사하게, 자아비판적인 모습이 한 인간의 두 개의 자아를 정확하게 다루고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영화(<버드맨>)는 바로 그러한 공포 의식 같은 것들을 사실은 그리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맥베드의 캐릭터와 비슷하기도 하고요. 맥베드가 인용되고 있거든요, 맥베드의 대사가. 뭔 소리들이 다 미친 소리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길거리에서 외치는, 배우 같은 사람이 외치면서 내가 좀 오버했지? 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요, 후반부쯤에. 그 대사가 맥베드에 나온 대사인데, 맥베드는 끊임없는 환청에 시달리면서 자기가, 사실은 자기의 욕망이기도 하지만, 외부의 소리, 자기가 왕이 될 거라는 어떤 소리만 듣고 스스로 왕이 되려고 뭔가 무리를 하는 거죠. 무리를 해서 결국은 엄청난 살육을 했잖아요. 그래서 그것의 어떤 저주랄까, 그런 것들의 환청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공포를 겪었던 인물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영화가 그런 맥베드와 아주 흡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 영화에서 두 개의 자아가 두 개의 이름으로 존재하죠, 리건과 버드맨. 그런데 굉장히 아이러니가 있어요. 버드맨은 실재했고 리건은 숨겨져 있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리건은 드러나 있고 버드맨은 숨겨져 있어요. 내면의 목소리로 나오고 내면의 환영으로 나타나고. 그런 아이러니한 겹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 두 개가 각각의 자아를 상징하죠. 사실 리건은 정말 이 남자가 버드맨 시절부터 자기가 숨겨왔던 내면이에요.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정말로 자신이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물속의 해파리 에피소드가 거기서 유성이 떨어지고 해파리들이 말하자면 물위로 나와서 전부 고갈된 모습으로 보이는 그런 환상, 그 초반부터 나오잖아요. 그것이 바로 리건이라는 내면을 상징하는 거죠. 그럴 정도로 사실 심각했던 것인데 결국 자신을 찾지 못했던 것이고 이 사람은. 그러면서 끊임없이 이 사람은 자기를 충동질하는 정말 메피스토펠레스처럼 버드맨이라는 존재가 있는 거죠. 버드맨은 사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대중적으로만 존재하는 사실은 이름일 뿐인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그 허명을, 굳이 이름 짓자면 허명인데, 허명 그것을 좇아서, 그게 사실 세속적 욕망 아닙니까, 아까 이수향씨가 얘기했던 불멸, 허명이고 세속적 욕망인데, 그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거잖아요. 버드맨은 환상 속에서 공중에 떠오르는 것 같고, 자기가 신이라고 또 말도 하죠, 대사로. 그런 것인데, 버드맨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런 부질없는 세속적인 욕망을 상징한다고 봐요. 그런데 이 사람은 끊임없이 그 상황에서 자기가 할리우드에서는 끝났으니까 이제 연극을 통해서 자기가 그 지위를 가지려고 하다보니까 에드워드 노튼하고 끝없는 갈등을 일으키게 되죠. 왜냐하면 노튼이 연기하는 인물은 연극에서 자기가 주인의식을 갖는 인물인데, 이것이, 소위말해서, 이 영화에 바로 주입된, 부여된 미국 사회에서의 지배와 마이너리티, 메이저 그룹과 마이너 그룹의 갈등을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연극판에서는 연극이 메이저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이 마이너가, 사실은 영화계에서 연극이 마이너겠지만, 바로 버드맨인 그런 상황에서 정말 힘겨운 싸움을 하는 거 아니겠어요? (웃음). 그러면서 자기가 그 헛된 욕망을 추구하는 버드맨과 리건 사이에서 끝없이 갈등하는 애기죠. 그래서 저는 이것은 자아를 찾는, 자아에 대한 이야기다. <위플래쉬>보다도 더 강렬하게 자아에 대한 얘기라고 봐요. 왜냐, <위플래쉬>는 상당히 드라마틱해요, 표면적으로. 그런데 이건 표면적으로 상당히 내면적이에요. 모든 기법과 이런 것들이 의식의 흐름이고요. 영화 자체가 의식의 흐름이고요. 사실 할리우드 역사상 이런 영화를 익히 많이 본적이 없어요. 그래서 역시 멕시칸, 스패니쉬 감독이 만들어서 이렇다. 그리고 그 감독은 이미 그 전작들이 그랬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정말 이거는, 정말 보기드믄 할리우드 영화다 이렇게 사실 전 극찬을 하는 편이에요.
그 수법이나 이런 것들이. 두 가지 기법인데, 의식의 흐름, 현실과 환상이 왔다 갔다 한다든지, 경계를 허무는 기법, 그건 정말 놀랍죠. 인생과 연극, 인생과 극이라는 것을 넘나들면서, 문을 하나 열면 현실이 펼쳐지고, 문을 하나 열면 다시 극장으로 들어가고. 이런 기법들은 아주 놀라워요. 정말로 놀랍고. 하나도 편집되어지지 않은 것 같은, 인생의 어떤, 영어로 이야기하면 'flow of life‘ 아니겠어요? 생이 그냥 변곡점 없이, 단속점 없이 계속 흘러간다는 원숙한, 그런 것들이 상당히 놀랍죠.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기대하는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놀랍죠. 저는 그냥 작품상이라고 하면 과거의 <애정의 조건>이라든가,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같은 것들을 연상했죠. 그런 실내극 스타일의 소담한, 그렇지만 좀 진지한. 그런 정도의 극인가보다 생각을 했는데 이건 정말 파괴적인 실험의식이 가득 차 있더라고요. 그래서 흑인영화 <셀마>가 떨어짐에 있어 아쉬움은 있지만 작품성이 있어서는 상당히 좋은 작품이었다 평가를 하고 싶습니다.
윤성은 : <버드맨>까지 하니까 너무 길어지나요? 그래도 조금만 얘기를 하자면, 다들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고, 저도 보는 순간, 그 전에 <위플래쉬>도 봤고 여러 작품을 봤지만, 거의 대부분 봤죠.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들을 봤지만, 나 같으면 당연히 이 작품에 작품상과 감독상을 주고 싶다라고 생각을 했을 정도로 이 영화가 되게 재미있는 건 그건 것 같아요. 브로드웨이를 배경으로 한 영화로서 너무나 연극적이면서 영화적인, 그 두 가지의 성향을 어떻게, 제가 잘 표현을 못하겠는데, 다들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이게 분명히 진짜 핸드헬드로 계속해서 그 좁은 극장의 뒷 분장실과 의상실 이런 데를 따라다니는데, 그건 연극이라면 하나의 무대를 세팅해놓고 거기에서 어느 부분에 우리가 시선을 맞춰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미장센의 어떤 핵심인데, 이거는 그렇게 카메라가 계속 그 인물을 따라가는 롱테이크를 통해서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게 물론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 있어서는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이걸 참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나 굉장히 이 감독이 이때까지 사실은 되게 편집이라는 거를 영화의 자기는 정수라고 생각을 하고, 핵심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 롱테이크로 계속 긴 호흡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했다라는 인터뷰를 봤는데 정말 그 두 가지를 잘 성취했다라고 생각이 들었고요. 맥시코 출신이지만 어쨌든 <로프>라는 작품에 대한 강한, 고전에 대한 이해와 인식과 또 오마쥬와 그리고 또 저는 알트만 감독 영화중에서 <프레리 홈 컴패니언>이 더 떠올랐어요. 너무나 그 뒤에서 일어나는 일들, 대사 하나하나가 시시껄렁하고 시답지 않은 것 하는 것 같은데 그 작품에서처럼, 각본이 너무나 완벽한데, 알트만 특징이 그거잖아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해가지고 뭐라고 뭐라고 한마디씩 하는데 그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나 철학적이고 다 연결이 돼있고 그것처럼 이 작품도 역시 이걸 이렇게 하나하나의 대사가 다 연결이 되면서 그거에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으면서 그러면서 코믹한, 이런 것들을 어떻게 동시에 다 성취할 수 있을까, 되게 너무 놀라운 작품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어쨌든 관객들에게 있어서는 이게 진짜 약간 더블, 버드맨과 리건의 관계가 너무나,(웃음) 날았냐 자살이냐 진짜 이게 뭐 상상이냐 환상이냐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을 남기면서 좀 일반 대중들에게는 좀 어려워서 잘 안된, <위플래쉬>에 비하면 그래서 티켓이 안 팔린 것 같은데 좀 많이 안타까워요. 저는. 학생들에게도 많이 권했던 작품이고, 여기까지.
민병선 : 아주 좋은 얘기들을 많이 해주셔서 저도 많이 동의하고, 이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저는 이제 <버드맨>같은 경우는 이게 상을 탈거다 생각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예전에 봤던 <아메리칸 뷰티>라는 영화가 있었는데, 그건 미 중산층의 몰락 같은 걸 다루죠. 저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메리칸 뷰티>를 보고 영감을 받은 사람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메리칸 뷰티>와 똑같이 할 순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 어떤 패턴과 정형성 안에 어떤 이야기를 넣어서 뭔가 새로운 걸 만들고자 하는 거죠. 그러면 저는 <버드맨>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다고 보거든요. 보통 우리가 어떤 영감을 받아서 하는 그런 경우들이 있는데, 이거는 한때는 스타였다가 몰락한 사람 등 그 패턴이 너무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메리칸 뷰티>에서 보면 그 친구가 이제는 내가 뭘 해볼 거야 할 때 경보를 하거든요. 대마초 피면서 막 하는데, 그런 장면들이 스쳐가기도 하고, 마지막에 자살하려고 총을 드는 장면도 스쳐가고 말이죠. 그래서 그런류의 영화들을 미국 영화가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상 주기 차원에서요. <버드맨>이 약간 그런 측면도 있고요.
또 연극과 영화라는, 같은 예술 같지만 어떤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까 연극하는 사람은 영화나 드라마, 카메라 앞에 서기 위해 굉장히 노력을 하죠. 그런데 카메라 앞에서 오래하신 분들은 다시 무대로 가려고 하죠. 무대라고 하는 순수성이 있고, 카메라 앞에서 하는 연기의 대중성과 상업성, 그 다음에 어떤 부와 명예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서로 배척하려는 것도 있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도 있죠. 그런 와중에 스타가 와서 제작을 하겠다, 그리고 내가 주연을 하겠다고 했을 때, 많은 조소와 비아냥을 받을 거라고는 봐요. 그런 상황 안에서 그 의식이 계속 분열하고, 그러다보니까 <존 말코비치 되기>라는 영화도 좀 떠오르더라고요. 그러니까 뭔가 의식, 미로 속에서 헤맨다, 자기 내면에서 헤맨다는 그런 느낌도 약간씩 들더라고요. 좀 전에 얘기 나눴던 <화장>에서는 그런 의식의 흐름을 저는 너무 의식으로 남기고 있다고 봤는데, 이 영화는 그걸 시각적 액션으로 바꾸더라고요. 그래서 영화적인 미덕이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웃음)
이수향 :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이게 원제목이 <버드맨 또는 무지에서 나온 예상치 못한 미덕> 이거잖아요. 이게 영화 속, 술집에서 맨날 글 쓰고 있는 여자, 뉴욕타임지 평론가가 리건 톰슨이 생각지도 못하게 성공하고 나자 쓴 글의 제목이잖아요. 제목과 관련된 그 부분에서 평론가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죠. 무슨 얘기냐 하면, 처음에 그녀는 리건 톰슨의 진의를 믿어주지도 않고 거의 무시로 일관하죠. 사실 제가 가장 많이 웃었던 장면이기도 한데, 에드워드 노튼은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배우니까 글을 쓰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쿨하게 질문을 던지면, 그녀도 이 사람을 예술가로 인정해주고 너무 존경하니까 서로 깊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되게 세련되게 웃으면서 넘기잖아요. 그런데 이를 지켜보며 둘의 세련된 대화 즉, 예술가-그를 알아주는 평론가의 포즈를 부러워하던 리건 톰슨이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평론을 쓰고 있는 그녀 쪽으로 가서 자기도 대화 좀 해보려고, 가서 쿨한 척 하며 말을 걸죠. 술을 한 잔 그녀에게 건네면서 “제가 사실은....이걸 드시고...”이러면서 접근을 해서 멋지게 대화 좀 해보려 하는데, 그녀는 거의 ‘저리 꺼져’ ‘넌 뭐야’ 이런 수준의 경멸적인 반응으로 응수하죠. 당황한 리건 톰슨이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사실 어렸을 때 레이먼드 카버를 만나서, 이게 내가 그때 받은 편지” 어쩌고 하면서 쪽지를 주는데도 듣지도 않고 막 구겨갖고 던져버리잖아요. ‘근데 어쩌라고. 나하고 뭔 상관이야’ 이런 반응을 보이면서 철저하게 무시하죠. 정말 처참하게 무시당하는 그 장면이 저는 너무 웃겼는데, 웃기면서도 리건 톰슨이 짠하게 느껴졌는데, 어쨌든 중요한건 이 영화에서 그런 비평가의 역할 혹은 그 몫을, 존재감을 확실히 부여하고 있어요. 그를 인정해주고, 제목에까지 그녀의 글 제목을 사용할 정도로 작품 속에서 존재감이 과시된다는 거죠. 최근 비평가의 현존이 그렇게까지 고평되고 있는 사례를 본 적이 없어서 인상적이었네요. 실제로 브로드웨이에서는 어느 정도의 비평가인지 모르겠으나.
박태식 : 탑이야, 탑
이수향 : 현재 한국과 비교해봤을 때 우린 그런 평론가 있나요? 누구 한명이 써주면 확 뜨고,
박태식 : 우린 우리지(웃음)
이수향 : (웃음) 그래서 약간, 뭐랄까, 아카데미가 좋아할만한 어떤 맥락 중에 하나는 그들 심사위원들 자체가 분명히 비평이라는 가치에 중점을 두는, 평론을 할 수 있는 그런 입장을 가진 사람들인데, 이 작품에서는 확실한 존재감을 각인시킬 정도로 평론가를 높은 존재로 고평 시키고 있죠. 이 영화 속 설정에는 혹은 주인공에게는 분명히 가치의 위계가 있다고 그랬잖아요. 할리우드라는 상업과 버드맨의 세계가 있고, 연극의 세계가 있고, 소설의 세계가 있고, 비평가의 세계가 있고... 그런 여러 가지 위계들 중에서 확실한 건 평론가를 높은 쪽에 놓고 있는 편이라는 거죠. 그런 점이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 중의 하나인데, 한국의 현실과 비교가 되면서 저에게는 흥미롭기도 하고 다소 조소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그랬네요.
정재형 : 그건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죠. 그러니까 그 부분을 이야기 할 수도 있는 테마인데, 한국 현실은 왜 그렇게 됐냐하면, 사실 요즘에 흔히 SNS가 발달해서 평들이 이미 많아졌다, 어떤 기자 평론가 신문에 나오는 어떤 이런 것들에 대한 권위가 우리나라에는 없어졌다, 다 평론은 누구나 인터넷에다 올리고 해서 그런 권위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그럼 미국은 어떤가 하는 거죠. 미국은 사실 그게 살아있는 거예요. 여전히 우리나라의 예를 들면 조?중?동 등 리딩 신문이 있는데, 미국에는 ‘뉴욕타임즈’라든지 이런 신문들이 여전히 연극평을 싣는 거고, 우리는 연극평 안 싣거든요. 조중동에 연극평 싣지 않은지 오래됐고 영화평도 벌써 없어진 거고요. 또 연극평과 영화평이 어떤 차이가 있냐면, 영화평보다도 연극평이 더 파워풀한 이유가 이것은 서울에서 하면 지방에선 못 보거든요. 그러니까 평을 통해서 명성이 나는 거예요. 그 연극이 끝나도 그 평 때문에 그 연극의 배우와 연출가가 작품이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평의 위력이 거의 그냥, two thumbs up이러면 끝나는 거고, two thumbs down 그러면 그 연극은 막 내리는 거죠. 그건 한국도 마찬가진데, 한국도 그래왔는데 지금 연극평 지면이 다 없어졌기 때문에 영화에서처럼 권위 있는 평은 사라졌으니까, 그러니까 영화보다 연극평은 더 심할 정도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 같아요. 현실적으로 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영화를 저는 세 번을 봤는데, <화장>하는 날 이 영화를 보게 돼서 <화장>을 못 봤어요. 그런데 그 시간에 저는 <버드맨>을 세 번째 보고 있었는데, 그 세 번째 볼 때에는 저는 두 분을 초대해서 보여드리면서 또 같이 봤는데, 그분들이 과거에 연극에 전설적인 분들이었어요. 두 분이 연출가들인데 그분들이 보고 너무 좋아하면서 ‘왜 이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안보고 모르지’ 라는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분들에게 지루하고 복잡한 스크린 독과점에 대한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라고만 얘길 했고, 저도 그 순간 문득 그런 걸 느꼈어요. ‘내가 평론가로서 이 영화를 정말로 많이 소개 해야겠구나’, 이런 책임감을 느꼈고, 그러면서 지면 부족의 서글픔을 통감하면서 오늘 트위터로 <버드맨>과 <위플래쉬>를 간단하게 올렸습니다. 9시간쯤 됐나보네요.
저는 마지막으로, 지금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정리가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게 서브텍스트가 기본적으로 <로프>, 장 르누아르, 이런 어떤 과거에 롱테이크를 정말 영화 역사상, 우리가 연극적인 기법이라고 알려진 롱테이크와 연극적인 미장센의 대가인 히치콕의 <로프>와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법칙>이라든지 이런 영화들의 계보 속에서, 레이먼드 카버의 그런 소설의 양식인가요, 일상, 소시민들의 다양한 삶을 집적해놓은 것과 같은 그런 소설의 세계에 그것을 영화적으로, 다중인물로 다루는, <내쉬빌>이후로 아주 다중인물을 유려하게 구사한 독특한 영화감독인 로버트 알트만의 세계 등을 거쳐서 온, 어찌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폴리포니, 다성화음의 세계가 아닐까. 자기반영성과 다성화음과 이런 어떤 세계인데, 그런 서브텍스트가 아주 완벽하게 녹아있는 걸작이 아닌가 생각이 드네요.
윤성은 : 컨텍스트적인 맥락에서 방금 얘기했던 배트맨과 마이클 키튼의 관계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정재형 : 배트맨은 민병선 선생님이 계속 주장하시던 바잖아요. 이게 왜 버드맨이야, 배트맨이지(웃음)
이수향 :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나요? 마이클 키튼이 마지막 장면에서.
박태식 : 죽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정재형 : 이수향 선생, 나는 거기에 대한 대답이 있어. I don’t care, 나는 관심이 없어(웃음).
박태식 : 저는 이 영화에서 처음에 이게 기본틀이 코미디잖아요. 코미디라는 게 고대 그리스에서는 삶의 모순, 그런 것들을 표현하는 게 코미디였는데, 그래서 아주 코미디적인 캐릭터를, 고전적인 것을 아주 잘 살렸다고 생각을 했는데, 거기다 재밌었던 부분이 세 개의 무대가 나와요. 하나는 무대 위, 하나는 무대 바로 뒤, 그리고 극장 밖 이 세 개를 롱테이크로 계속 쫓아가면서 하는데, 이야(감탄) 진짜 기가 막히더라고요. 왜 이런 생각을 아무도 못했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정재형 : 철학이 없어서.
박태식 : 에드워드 노튼하고 나오미 왓츠하고 뒤에서, 그리고 나서 둘이 사람들 앞에서 커튼, 커튼콜 해서 인사를 하고 나오면서 싸우고 나가면서 다시 웃고 하는 그런 것들은 참 재미있더라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하면 막판에 버드맨이 얘를 장악을 해버리잖아요. 마지막 순간에. 얘는 그 사이에 계속 버드맨인가 리건인가에 대해서 중간쯤 있어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애가 꽉 장악을 해버리고 갑자기 그때 헬리콥터가 날라 오고 버드맨의 모습이 도시에 나타나고. 그런걸 보고 히치콕의 <사이코>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지막에 엄마가 주인공 아들을 완전히 장악을 해버리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러니까 마지막에 리건이 자살을 했어야 옳지 않나요?
정재형 : 리건이 버드맨을 장악을 했다 이거죠?
박태식 : 아니, 버드맨이 리건을 장악 했다. 마지막에. 그리고 올라가서, 그 때 보니까 버드맨이 화장실에 앉아 있잖아.
정재형 : 그런데 무시하잖아요.
성진수 : 화장실에 두고 뛰어내리지 않아요?
윤성은 : 잘가라고 완전 굿바이 인사를 하고,
박태식 : 나는 막판에 그렇게 봤는데. 그동안 버드맨의 암시만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버드맨이 날아오고 헬리콥터 뜨고 굉장한 버드맨의 파워풀함을 보여주잖아요. 그때 버드맨으로 장악이 됐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정재형 : 그건 보기 나름이겠지만.
안숭범 : 제가 영화를 보지 못했는데, 이게 약간 다중인격 장애나 해리성 장애 이런 건가요? 버드맨이랑 대화하고 이런 게?
정재형 : 다중인격까지는 아닌데 자아가 두 개로 분열 되서,
이수향 : 이게 정신병리학적 느낌은 아니고요 약간 극작술적인 장치인 거죠.
윤성은 : 초현실적인 코미디같은,
성진수 : 근데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에 시체를 내가 잘못 봤나요? 그런 거 아니었죠?
박태식 : 그런데 엠마 톰슨이 나와서 아빠 없네, 하늘 보면서 웃잖아. 맞다. 그거는 관객의 몫이야. I don’t care가 정답이지 뭐.
정재형 : 나는 아까 이수향 선생의 질문에 그래서 I don’t care,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했던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해서. 그렇게 내가 항상 대답을 준비한 것은 극장에서 그런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정말로 그건 답이 논리적으로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일단 이게 현실과 환상을 왔다 갔다 하면서 전개되는데 마지막에 환상적으로 끝나는 거죠. 현실적으로 보면 자살한 거예요. 그러나 딸이 웃잖아요. 애가 웃는다는 건 자살한 것은 아닌 거예요. 그럼 애는 무엇을 봤는가, 라는 문제로 추궁이 되는데 거기에 대해서 답을 얻기가 되게 어려워요.
박태식 : 딸이 처음에 밑을 봐요. 밑을 봐서 시체를 확인했는데 안보여, 그러니까 하늘을 보더니 웃잖아.
정재형 : 그럴 수도 있죠.
이수향, 윤성은 : 시체는 안 나와요.
민병선 : 딸이 마약을 하잖아요(웃음)
박태식 : 마약이 해결이야
정재형 : 그럼 더 복잡해지네, 딸의 견해도 믿을 수가 없는 거네, 걔도 마약을 하는 애니까(웃음)
이수향 : 근데 대마초 한 상태라서, 아빠 죽음까지 웃을 수 있는 상황으로 간 거예요? (웃음)
정재형 : 대마초 떠나서, 내가 신부님 말씀을 조금 아주 유려하게 해석을 해볼게요. 신부님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지만 내가 오버 해석을 해볼게요. 처음에 시체를 본거예요. 시체를 보고 아버지가 죽었다, 돌아가셨다 그렇게 느꼈는데 갑자기 하늘을 보면서 아버지가 승천을 했구나, 아버지가 드디어 버드맨이 됐구나 라고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이렇게 오버해석을 할 수는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이게 I don’t care라는 거예요. 나는 별로 이게 많은 해석의 몫을 남겨둔 것을 왜 구지 하나로 정확하게 몰려고 하느냐라는 의미에서 나는 거기서 해석을 안하고 싶었던 거야.
윤성은 : I don't care가 맞는데, 죽었든 안 죽었든 이 영화가 중요하지 않는데, 아, 또 중요할 수도 있어요(웃음), 근데 저는 이 영화가 더 가치 있으려면 안 죽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왜냐면 만약에 죽어서 비장미나 이런 걸 남기면서 사람들한테 회한을 남기면서 죽으려고 했으면 자살하는데서 끝나서 죽었으면 깔끔했을 것 같아요. 총으로 쐈고 그래서 그냥 이 사람이 진짜 몸을 바쳐서 죽었다 그러면 그걸로 주제가 딱 명확해 지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을 살렸잖아요. 살렸고, 그렇다면 이 사람이, 또 그 거의 비슷한 장면이잖아요. 이미 그 전에 옥상에서 떨어지려고 했던 장면이 나왔었거든요. 그런데 그 장면을 또 반복하면서 거기서 죽어버리면 이 영화는 뭔가가 반복이 되면서 의미가 떨어진다고 생각을 해요.
박태식 : 근데 코가 나오는 걸 보니까 옛날 코가 아니라 버드맨의 코가 돼있지 않아요?
이수향 : 아뇨, 그냥 성형수술 했다고만 말로 나오잖아요.
성진수 : 그 마스크랑 조금 비슷하긴 해요, 약간 ...
박태식 : 그러니까 버드맨이 된 거라니까 (웃음).
정재형 : 저는 뭐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봐요.
성진수 : <버드맨> 까지 이어지다보니 시간이 많이 길어졌네요. 아쉽지만 시간 관계상 이만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