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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영화평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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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우리는 무엇을 보았는가

 

 

 

 

 

 

 

 

 이 글의 시작에 앞서 분명히 전제되어야만 할 사실. 고백하건데, 나는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알지 못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아무것도 보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가 분명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았다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영화를 볼 때는 항상 부족하나마 쇼트의 의미를 생각하고 장면의 사유를 고민하려 노력했지만 많은 평론가들의 말마따나 연옥에서 날아온 듯한거장의 신작 앞에서는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영화가 시작되고 몹시도 고전적으로 느껴지는 그리스풍의 오프닝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윽고 정신을 추스른 뒤 영화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됨과 동시에 영화를 해석하려는 노력을 그만 두고 멍하니 알랭 레네가 선사하는 새로운 영화적 체험에 그저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알고 있던 상업영화의 문법은 이 자리에서 완전히 무효화된 듯 보였으며 시간과 공간과 인물과 삶과 죽음과 영화가 완전히 새로 창조되다가 결합하며 일전에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영화적인 순간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만 감각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 글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글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나는 이 영화가 닿는 곳이, 혹은, 닿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만큼 작품이 끝나고 나서 대체 내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만든 영화는 없었다. 나는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를 보고 온 그 날 대체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하루 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 동안 한 번도 접해 본적 없었던 종류의 영화를 마주하고 난 후의 당혹감. 나 같은 초보 시네필에게는 가히 일말의 독해조차 허용하지 않는 듯 보이던 거작 앞에서 <라이프 오브 파이>의 주인공처럼 호랑이와 함께 망망대해 위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영화의 핵심은 물론이거니와 대부분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쓰는 이유는 바로 써야만 할 것 같아서이다. 나는 내가 본 영화가 대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내야만 할 것 같다. 이 글은 당혹감을 이겨내고 내가 본 것에 대한 어떠한 식의 해석이든지 남기기 위한 발악에 가깝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작품이 끝난 후 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스쳐지나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사랑을 카피하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할 것 같다.

 

 

 

 

 <사랑을 카피하다><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와 강한 연관성은 없지만 그 모호함에 있어서 비슷한 구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두 주인공은 맨 처음에 작가와 팬의 사이로 만난다. 이 둘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러는 와중에 두 사람의 사이는 처음에 설정되었던 작가와 팬에서 점점 부부관계로 무게 축을 옮겨가며 영화는 진행된다. 두 사람은 초반부에는 자신이 얼마나 당신의 작품을 좋아하는 지등에 이야기하다가도 일순 아이에 대한 책임공방을 벌이기도 하는데 인물들이 과연 진짜 부부인지, 처음부터 부부였는데 모르는 척 역할극을 한 것인지, 아니면 원래 작가와 팬의 사이인데 갑자기 부부의 역할극을 시작한 것인지 관객들에게 혼란을 주며 인물 사이 관계도의 연속성을 완전히 뒤섞는 방식으로 영화를 진행한다.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극이 전개되는 영화로는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이 있다. <북촌방향>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연속으로 이어진 사흘간의 기록인지 하루에 있을 수 있었던 가능성의 세 가지 버전인지 분명 알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사랑을 카피하다>에서 두 인물 간의 관계를 완전히 모호한 것으로 설정하는 동시에 거울에 비친 두 개의 프레임, 혹은 마지막 시퀀스에서 보여 지는 완전히 동일한 모습을 한 두 개의 종 등의 도식을 통해 끊임없이 진짜와 가짜의 문제에 의심을 가지게 한다면 홍상수는 <북촌방향>을 통해 북촌이라는 공간에서 과연 이 일들이 연속된 사흘인지 혹은 존재할 수 있었던 하루의 가능성인지 회의하게 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변주하였다. 나의 비루한 영화적 식견으로 그나마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본 이후에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알랭 레네의 이번 실험은 분명 저 위의 두 영화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만 훨씬 더 복잡다단하고 거대하다는 사실이었다. 키아로스타미가 인물간의 관계를 진위 판별이 불가한 것으로 설정하고 홍상수가 공간은 묶어둔 채 시간을 변주했다면 이 거장은 온 우주와 현실, 꿈과 삶, 삶과 죽음, 인물의 동일성 등등 말 그대로 모든 것완전히 해체한 뒤 재조립했다가 다시 한 번 산산조각내었다면 너무 지나친 비약일까?

 

 

 

 

 

?레네의 영화적 우주

 

 

 

 

 

 <당신은...>은 키아로스타미와 홍상수가 앞서 행한 위 실험들과 유사하지만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기에는 극도로 거시적인 동시에 다시 한 번 미시적이다. (내용이 정말 두서없고 말도 안 되게 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무시무시한 영화를 어떻게든 독해해보겠다는 노력으로 이해해주시기를) 거시적이라는 말은 이 영화가 다루는 주제가 나로서는 도무지 우주 그 자체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할 굉장히 거대한 것이라는 의미고 미시적이라는 말은 이러한 테마를 완전히 분해한 뒤 자신의 방식으로 영화를 찍어낸 자세에 관한 말 일 텐데 실로 대담하면서도 매혹적이다.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페이드 인/아웃으로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그러나 신비롭게 처리해버리는 거장의 태연함과 동시에 스크린 속 인물들에게 말을 거는 영화 속 인물들. 이윽고 다 함께 어우러져 펼쳐지는 알 수 없는 몽환의 한 바탕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바로 보다라는 동사이다.

 

 

 

 

 너무나도 기본적인 명제. 우리는 영화를 본다.’ 극중 앙트완느 오투악의 소환으로 한 자리에 모인 12명의 주인공들은 과거 자신이 연기했던 연극 에우리디케의 현대판을 본다.’ 그리고 그 현대극의 등장인물들 또한 몹시 묘하게 작동하는 것이어서 그들은 결국 궁극적으로 보여지는 대상으로 설정된다기 보다 도입부부터 리버스 앵글 (reverse angle)의 입장에서 우리를 마주보는 듯 느껴진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제목과는 역설적으로 보다라는 행위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영화 속 12명의 주인공들은 연출가인 앙투완느 토투악이 관람을 간청한 그 연극을 보다가도 (카메라는 에우리디케의 현대판을 스크린 속에 그대로 투사해 보여주기도 하는데 그때 우리는 12명의 주인공 시점을 차지하게된다. 결국 관객들은 알랭 레네가 초대한 그 주인공들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레네에게 초대되었다. <당신은...>은 내가 본 영화중 가장 관객의 자리를 적극적으로 비워놓고 끌어들이는 영화다.)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연기를 시작하고 보여 지는 대상또한 그에 호응하며 한 순간에 보다보여지다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이 둘의 경계가 무너지는 지점은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는 극장에서 자리에 앉아 상영되는 영화를 보고있다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당신은 이 거대한 연극에서 우리가 온전히 관람객의 입장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보는 것보여 지는 것의 경계가 무너지며 시작되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괄호들의 연속에서 최종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바로 관객이다. 어쩌면 이 영화는 아무도 없는 빈 방에 틀어놓는 다면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영화이다. (모든 영화가 그렇겠지만) 반드시 관객-다시 말해 보는사람-이 있어야만 기필코 완성되는 영화다. 우리는 연극을 보는 인물들을 영화를 통해 보는 위치에 서있으며 그와 반대되는 리버스 앵글 (reverse angle)의 자리에선 연극 속 인물들이 한 차례의 중첩을 걸러 우리와 마주한다. 이것이 맨 처음의 설정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러닝타임에서 마주하는 것은 중첩의 파괴. 세 개의 층위는 한 데 뒤섞이며 영화와 연극, 그리고 현실을 극장 안에서 완전히 하나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결국 <당신은...>은 우리가 평소 아무렇게나 해오던 영화를 보는행위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할 것을 요구하는 영화다.

 

 

 

 

 

 이 와중에 대담해지는 요소는 평소 익숙하던 영화의 문법들이다. 신묘한 이중분할과 아이리스 인/아웃, 앞서 언급한 등장인물들의 등퇴장 방식, 도중에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시공간의 개념과 인물들의 테제. 그 외에도 내가 도저히 잡아내지 못했을 수많은 의미들. 내가 본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내야만 하는 것들.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는 몹시 정확하면서도 알맞은 제목이다. 나는 분명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았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 (나의 짧은 소견으로는) 적확하게 풀어낼 여력이 없다. 나는 결국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일까.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조차도 여기서는 중요한 명제가 아닐 것이다. 레네의 손에서 불쑥 튀어나온 새로운 영화적 우주. 나는 정말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조만간 이 당혹감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다시 한 번 영화관으로 향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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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박웅

등록일2013-02-11

조회수3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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