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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영화평

<아무르>-트랜스포머의 시대에 맞서는 미하엘 하네케, 끝까지 기품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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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

 

트랜스포머의 시대에 맞서는 미하엘 하네케, 끝까지 기품을 잃지 않는다

 

 

 

 

 

<하얀리본>에 이어 다시 한 번 그에게 칸 황금종려상을 선사한 미하엘 하네케의-<아무르>를 보며-감독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나만의 감정이지만-현재 월드 박스오피스를 휩쓸며 그 와중에도 간간히 수작, 혹은 걸작들을 내놓는 헐리우드 영화들의 대척점에서 아직도, 여전히 영화라는 미학의 가능성을 탐구하며 일반 관객들이라면 치를 떨며 거부할 묵직한 주제로 필사의 사색을 펼쳐나가는 시네아스트로서의 감독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경외와 동시에 안심을 느끼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한 영화 당 쇼트의 수가 2000쇼트는 가뿐히 넘어갈 듯 보이는 현란한 트랜스포머의 시대에, 이 늙은 감독은 5분이 넘는 대화 장면을 편집없이 원 쇼트로 찍어내었고 수 백 수 천의 사람들을 극중에서 죽이고도 별 감흥을 주지 못하는 전쟁영화와 재난영화들이 차트를 점거하는 시대에 이 늙은 감독은 한 여자가 나이를 먹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이야기로 오롯이 러닝타임을 버텨낼 뿐만 아니라 한 순간에도 딴 길로 새는 법 없이 또렷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르>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언뜻 명백하게 하나로 모아지는 듯 했지만 곰곰이 되새겨보면 내가 생각하는 그것이 영화의 핵심이라 섣불리 단언할 수 없었다. 죽음을 마주한 노장이 죽음에 관해 찍어낸 영화는 그러했다.

 

 

 

 

 

<아무르>는 외재적으로도 섬뜩한 영화다

 

 

 

 

 

 

 <아무르>가 선사하는 감정들을 지탱하는 축들은 여러 개이나 가장 핵심적인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모아지는 데 하네케가 영화를 구성하기로 택한 방식이 하나이고 장 루이 트랭티냥과 에마뉘엘 리바의 연기가 다른 하나이다. 이러한 영화의 내재적인 요소 외에도 한 사람이 늙어서 죽는 다는 사실을 잔혹하리만치 미시적으로 관찰해내고야 마는 이 영화의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무슨 마음이었을까를 상상해보니 그 또한 나의 마음을 몹시 요동치게 했다.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생각하는 죽음은 몹시 다를 것이었다. <아무르>는 외재적으로도 섬뜩한 영화다. <아무르>를 찍는 내내 감독과 배우들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머지 않아 올 것임에 자명한 자신들의 죽음에 관해 상기했을 것이 분명했기에.

 

 

 

 

 

 우아하나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가 끝난 후 두 번째 장면, 조르주와 안느는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의 연주회를 보기 위해 나와있다. 연주가 시작되었지만 카메라는 결코 연주자를 비추는 법이 없다. 연주자를 바라보는 객석의 모습만 정면으로 응시할 뿐 이다. 이런 식의 연출은 영화 내내 계속되는 데 예를 들어 극중 조르주와 안느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좁은 복도에서 대화를 나누던 도중, 안느는 갑자기 방으로 들어감으로써 프레임을 벗어난다. 그러나 계속되는 대화, 이윽고 조르주도 카메라 밖으로 동선을 옮긴다. 그러나 조르주와 안느, 그 어느 쪽도 따라가지 않는 카메라. 영화의 중반부 조르주와 딸의 대화 장면. 하네케는 대화 장면을 구성할 때 흔히 사용되는 문법인 쇼트-바이-쇼트를 택하지 않았다. 그저 카메라를 완전하게 고정시켜놓고 어떠한 편집 없이 원 쇼트로 찍어내는 방법을 취했는데 여기서 카메라의 위치가 특기할 만하다. 대화의 주체(조르주)가 아닌 대화에 반응하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고 서있는 카메라. <아무르>에서 하네케의 카메라는 이런 식이다. 연주자가 아닌 연주자를 바라보는 관객을 응시하고 대화를 나누던 주인공이 프레임 밖으로 벗어난다 해도 그들을 따라가는 법이 없다. 액션이 아닌 리액션에 집중하는 그의 영화적 문법은 주제와 닿는다. 이런 식의 연출을 바라보며 나는 하네케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죽음그 자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죽음이 아닌 죽음을 마주하게 된 사람들’, 다시 말해 우리는 죽는 다는 사실 그 자체에 관해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삶의 어느 순간에서 죽음이 다가왔을 때  어떻게 그에 대처해야 하는가에 관해 말하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돋보기를 들이대듯 안느의 생의 마지막 일순,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조르주의 어느 순간을 직조하며 바라보는 <아무르>에서 중요한 것은 죽는 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는 다는 사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죽는 다는 것은, 취사선택의 영역이 아니므로.

 

 

 

 

 

 

 

비둘기는 이제야 제 때에 왔다

 

 

 

 

 

 

 

 유럽의 예술영화 등등을 즐겨보는 시네필에게는 그다지 당혹스럽지 않겠지만 일반 관객이라면 낭패라고 느껴질 법한, 하네케의 롱테이크도 인상적이었다. <아무르>의 쇼트 수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그 수가 현대영화의 평균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는 것 만큼은 알 수 있었는데 영화는 편집을 가급적 배제하고 롱테이크를 사용하며 쇼트 수를 줄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거장의 손을 거친 이 연출은 흡사 고전적인 비극을 보는 듯한 우아함과 기품을 지니게 되었는데 보는 내내 어떤 귀족적인 느낌을 받는 듯 했다. 하네케가 이런 식의 연출을 안심하고 구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두 주연배우인 장 루이 트랭티냥과 엠마뉘엘 리바의 덕도 있었을 것이다. 두 주연배우와 더불어 이자벨 위페르까지. 연기력에 있어서 경외의 감정까지 불러일으키는 세 배우들은 5분이 넘어가는 대화장면마저 완벽하게 소화하며 하네케의 롱테이크를 안정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이런 식의 연출은, 감독이 배우를 신뢰하지 못한다거나 배우가 자신의 연기에 완벽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방식이었을 거라 생각된다.

 

 

 

 

 

 중반부 조르주의 악몽, 비둘기, 밀레의 그림 등 <아무르>는 수많은 읽을거리가 존재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비둘기에 관한 부분은 평화와 생명의 상징인 비둘기를 정 반대의 개념인 죽음으로 치환하여 새로운 영화 언어를 만들어내었다고 보는 쪽인데 비둘기가 등장한 첫 번째 장면이 밤이고 조르주가 그 비둘기를 내쫒았다는 점을 보면 비둘기는 밤을 틈타 몰래 찾아왔지만 아직 찾아올 때가 아니었다. 조르주 또한 비둘기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쫒아내었다. 비둘기가 등장한 두 번째 장면, 환한 낮에 들어온 비둘기. 조르주는 이미 안느를 보낸 뒤였다. 조르주는 잡으려 했으나 잡아지지 않는 비둘기를 겨우 붙잡은 뒤 하염없이 보듬는다. 안느가 죽는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조르주의 자세도 그러했으나 그는 이미 결단을 내린 뒤였다. 그는 이제 죽음을 보듬을 줄 안다. 그 자신도 머지 않아 따라가야할 길이기에. 비둘기는 이제야 제 때에 왔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망자의 집에서, 죽음은 환영받았다.

 

 

 <아무르>는 추한 영화다. 죽는 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질 수 있는 지를 떨림 없이 직시하는 영화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다시 태아처럼 돌아가 버린,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동반자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볼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렇게 될 것임이 멀지 않은 노인의 일상을 카메라 역시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아무르>는 아름다운 영화다. 나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간단하게 죽여버리는 할리우드의 시대에서, 고작 한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처연하고 무시무시하게 파고들 수 있다는 점에서 번쩍 눈이 뜨였다. 마지막으로 다는 사족, 영화가 이렇게 우아할 수 있다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귀족적인 기품마저 지니며 홀로 설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놀라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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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박웅

등록일2013-01-31

조회수24,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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