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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전

행복한 사전

 

영화는 관객에게 범접하기 힘든 전문가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 영화가 갖는 중요한 장점들 중 하나다. 이를테면 <그녀에게2002>에서는 투우의 세계를 마치 이제 곧 성난 황소와 맞닥뜨려야 하는 투우사의 눈으로 그려내고 <초콜릿2000>에서는 어느 새 초콜릿 가게의 주인이 되어 다양한 맛을 내는 과정을 간접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심오한(!) 사전 출판의 세계를 알려면 <행복한 사전>(, 이시이 유야 감독, 극영화/코미디, 일본, 2013, 133)을 보면 된다. 일본 영화 특유의 섬세한 관찰과 전문적 묘사가 한껏 발휘된 멋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1995년 일본 어느 출판사의 사전출판부는 찬밥신세를 면치 못한다. 사전이라는 것이 지난한 작업을 요구하고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며 출판물의 질도 장담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큰 걱정은 사전 나름의 개성이 살아나지 않으면 판로를 열기도 어려운 출판물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전자 사전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판을 치고 있으면 더더욱 종이 사전은 경쟁력을 보장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사전출판부는 새로운 개념의 사전을 펴낼 계획을 세운다. 사전 이름도 거창한 대도해大渡海이다.

마지메(마츠다 류헤이)는 언어학으로 석사까지 마쳤지만 출판사 홍보부에서 고전을 하는 중이다. 사실 마지메의 사회성은 바닥에 가까워 늘 홀로 밥을 먹는 신세니 홍보 일이 적성에 맞을 리 없었다.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져 사전출판부 직원으로 옮겨 앉게 된다. ‘마지메라는 이름의 뜻이 원래 성실誠實이라니 그로서는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사전 출판부에서 그 나름의 화려한 삶이 시작된다. 마사시(오다기리 조)라는 멋진 친구도 얻고 카쿠야(미야자키 아오이)와 사랑도 이루고 13년을 걸친 긴 노력 끝에 드디어 사전을 완간하니 말이다. 마지메는 최고의 인생을 산 것이다.

이 영화에서 정말 재미있었던 부분은 마지메의 인생 역정 보다 사전 출판에 이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이었다. ‘대도해는 젊은이들이 만들어내는 신조어까지 모두 포함하려는 원대한 구상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식으로 하면 후지다’, ‘멘붕’, ‘대략난감등의 정체불명 어휘들과 방가’, ‘추카추카’, ‘등의 SNS 용어들도 포함시킨다는 뜻이다. 그렇게 새로운 어휘를 발견하고 메모하고 정리하고 뜻을 붙이는 작업 하나하나가 얼마나 보는 재미를 불러왔는지 모른다. 비단 마지메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사전편찬이 매력적인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또 한 가지 관심을 끌었던 내용은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대 형성이었다. ‘대도해의 개념을 세운 사전 편집장은 완간을 보지 못한 채 죽고 만다. 그리고 신입사원이었던 마지메도 어느덧 40을 바라보는 주임이 되었고 신입사원을 새로 배정받으면서 사전 편찬 작업은 또 하나의 전기를 맞게 된다. 말하자면 3대에 걸쳐 사전이 만들어진 셈이다. 필자는 무려 150년 전에 시작된 후 개정에 개정을 더해 완성된 36권 규모의 방대한 신학백과사전(Theologische REalenzyklopaedie, 약자로 TRE)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던 터라, 15년이란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대를 연결하는 전통의 계승은, 세대 간 소통 부재의 비극을 안고 있는 우리나라 실정에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준다. 그 점이 감탄스러웠다.

3만개의 단어를 담아내는 대도해’, 그러면서도 다른 사전에서 사용한 단어 정의를 반복하지 않는 전문가 정신. 이를테면 오른쪽의 정의는 ‘10’이라는 숫자의 ‘0’ 쪽이라든가, ‘사랑어느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머리에서 안 떠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 상태 성취하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 정의는 영화를 보면서 절로 마음이 푸근해지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이는 마침 천하의 숙맥 마지메가 카쿠야에게 자신의 진심을 고백하면서 만들어낸 정의여서 더욱 아름다웠다.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 상대방과 마음을 나누고 지식을 공유한다. 그런데 이 세상은 마치 큰 바다와 같아 어디서 출발해 어디로 가는지 알기 쉽지 않다. 사전을 그 거대한 바다에 떠다니는 배처럼 이 곳 저 곳을 연결해주고 사람과 사람을 날라다주기도 한다. 사전은 바로 세상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배인 것이다. 편집주간이 내린 사전에 대한 정의는 마치 신전神殿에 발을 들여놓은 듯 성스럽게 들렸다.

영화의 엔딩이 좀 늘어졌고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 아쉬웠지만 아직 생략의 묘미에 익숙하지 않은 젊은 감독의 작품이라는 생각에 필자의 평도 관대해지기로 했다. 그만큼 많은 생각거리를 얻은 작품이라서 관대해진 것이다. 오다기리 조는 언제나 믿음직한 배우고 미야자키 아오이도 이제는 만화 주인공 같은 풍모에서 많이 벗어나 맘에 들었다. <행복한 사전>는 좋은 영화다. 그리고 이런 고급스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일본 영화계의 저력에 감탄했다.

마지메의 앞날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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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박태식

등록일2014-05-29

조회수6,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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