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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한국 공포영화가 과거를 망각하는 법



장르영화에 있어, 과거의 영화들은 컨벤션을 깨뜨릴 수 있는 무궁한 소재로 자리한다. 어떠한 장르적 특성이 반복되어 왔는지, 그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것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지, 그렇게 깨뜨린 것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장르적 발전을 이루어내며 현재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 등은 모두 과거 장르영화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무엇보다 애정에서 비롯된다.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장르영화들이 의외로 그 컨벤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을 때 영화적 재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장르적 쾌감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장르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낼 때, 게다가 그것이 공포영화라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수많은 질문과 의아함에 대처할 준비를 해야 한다. 여기에 그 장르가 현재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장르로 전락해버린 상태라면, 추천해 줄 수 있는 영화가 이미 10년을 훌쩍 넘어버린 영화들만 손꼽힌다면 해당 장르에 대해 입을 떼는 것 자체를 고민하게 된다. 현재 한국 공포영화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드문드문 만들어지긴 하지만 정확히 어떤 영화가 있었는지는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는 영화. 특별한 기대 없이 거르는장르가 되어버린 영화. 본다 해도 무엇이 공포인지를 알 수 없는 영화.

공포영화를 단순히 매니악 한 장르라고 넘기기엔, 이제 더 이상 공포영화에 대한 수요가 없다고 하기엔 <컨저링>(2013)과 그 이하 시리즈나 우리나라에서 공감하기 쉽지 않았던 <겟 아웃>(2017) 등의 흥행은 늘 공포영화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개봉한 <속닥속닥>(2018), <여곡성>(2018) 등 한국 공포영화는 줄줄이 흥행 참패를 맞았고, 그나마 흥행을 했다는 <곤지암>(2018)은 페이크 다큐에 익숙해진 세대를 교묘히 피하는 정치적 알레고리들로 관객을 끌어 모은 데에 만족하고 있었다. 결국 한국 공포영화는 식상하며, ‘망한다는 것은 2018년의 공포영화들이 슬프게도 너무나 명징하게 증명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의 원인을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 작년 말과 올해 과거의 한국 공포영화의 정전처럼 불리던 두 작품을 소환한 영화들이었다.

<월하의 공동묘지>(1967)에 등장한 기생월향지묘라는 묘비가 실존했을 것이라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페이크 다큐 <월하>(2017)<여곡성>(1986)의 리메이크작 <여곡성>(2018)은 처참한 평과 함께 금세 극장에서 사라졌다. 처연한 귀신을 등장시키며 한국공포영화의 원형이라 불리던 <월하의 공동묘지>와 산속 별장이나 저택 등에서 벌어지는 젊은 여성의 괴물성을 내세웠던 1980년대의 공포영화와 다르게 다시 조선시대로 회귀하여 한 서린 혼에 빙의된 시어머니를 중심에 두고 그로테스크한 공포를 보여주었던 <여곡성>은 한국 공포영화의 커다란 줄기로 자리하는 작품들이었다. 이 두 작품은 약 50, 30년의 차이를 두고 현재에 도착했고, 그 결과는 장르적 몰이해 속에서 매몰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월하><여곡성>(2018: 이하 1986년에 개봉된 <여곡성>에만 연도를 명시하기로 한다.)은 현재 한국 공포영화가 그저 재미없어서라는 이유를 넘어 무의미한 강박과 장르에 대한 무관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를 화날 만큼 투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가장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 두 작품이 상정하고 있는 공포가 예상 가능한 서프라이즈에 그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음향이나 카메라 워킹에 따라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등장인물이나 환영 등은 이 영화들이, 그리고 최근의 한국 공포영화들이 꾸준히 사용해 온 방식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서프라이즈를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비판으로 국한 시키는 것을 넘어 관객에 대한 예의의 문제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점이다. 식상하다는 판단, 결국 예상가능하다는 것은 현재의 공포영화가 다양한 매체를 통해, 다양한 경로로, 다양하게 등장하는 괴물을 접했을 관객에게 어떠한 쾌감도 줄 수 없는 방법만으로 영화를 구성하려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서프라이즈는 결국 공포가 마련하고 있는 자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의 부재를 보여준다. 내러티브가 상실된 채 서프라이즈만으로 구성된 에피소드의 나열들은 결국 공포가 가지고 있는 인식적 충격에 대한 단순한 해답조차 내밀지 못한다. 자신을 내몰던 공포의 이유와 그것의 발견, 그리고 그로 인한 충격이 보여주는 공포는 서프라이즈에선 실현 불가능한 영역이다. <스크림>에서 범인이 밝혀졌을 때 그것이 왜 기존의 공포영화를 뒤흔든 것이었는지, <>의 사다코에 내재되어 있던 바이러스의 의미가 왜 동양 귀신에 대한 공포를 뒤집은 것인지 등은 서프라이즈의 영역에선 설명할 수 없다. 슬래셔나 고어물로 공포영화를 위치짓지 않는 한국 공포영화에서 서프라이즈는 공포영화의 몰락과 닿아 있다.

두 영화가 고전 공포영화를 소환했다는 것은 장르의 현재성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을 전제한다. 그러나 두 영화는 이를 그저 소재적인 측면에서 잠시 끌어왔을 뿐, 시간의 흐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시금 문제점을 노출한다. <월하><월하의 공동묘지>에서의 묘비명이 실존할 것이라는 상상력에서 시작하면서 일제시대, <월하의 공동묘지>에서 귀신이 살리고자 했던 아들의 존재 등을 잠시 언급하긴 하지만 그것이 현재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여곡성> 역시 대를 잇는다는 것, 며느리들끼리의 갈등, 귀신과의 물리적인 대결이 2018년에 어떠한 의미로 읽혀야 할지에 대해 역시 아무런 답을 하지 못한다. ‘지렁이 국수30년 후의 리메이크작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으로 언급되는 것은 1980년대의 그로테스크함에 대해 2018년은 그 무엇도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월하의 공동묘지><여곡성>(1986)이 당시 어떠한 이유로 공포가 될 수 있었고 이것이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어떻게 현재의 공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답할 수 없다면, 사실상 현재의 한국 공포영화는 어떠한 장르적 컨벤션도 마련하지 못했다는 허무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여고괴담>(1998)의 진주가 지겹게 반복되어온 슬픈 귀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공포영화의 재기를 알린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진주가 속해 있는 곳이, 시간이, 공간이 당대와 맞물려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르적 컨벤션과 그것의 일탈, 여기에서 비롯될 쾌감이 현재의 한국 공포영화에선 한 마디도 더할 수 없을 만큼의 부재 상태이다.

감정의 영역에서 쉽사리 공식화 되지 않는 것이 공포의 영역이지만,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존중은 늘 바닥을 친다. 승리의 쾌감, 고통과 슬픔 등이 공식화하여 감정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것과 다르게 공포의 영역은 사실상 미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는 괴음과 몇 번의 깜짝 등장, 혹은 맥락 없는 그로테스크함으로 그 공포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는 장르영화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일 테지만 현재의 공포영화들이 만들어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적어도 한 번쯤은 낭창한 컨벤션의 유희판이 한국 공포영화에서 벌어질 수 있기를.

 

<월하>(2017)

<여곡성>(2018)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1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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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조회수32,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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