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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아름의 시네마 크리티크] 그 지긋지긋함에 몸서리치면서도 - <밍크코트>


어머니가 아닌 엄마랑 이야기를 하면 짜증이 솟구치는 때가 있다. 분명 나에게 이게 맞는데 아니라고 할 때, 그리고 아니라는 것에 아무런 이유가 없을 때. 셀 수 없이 많이 겪어왔고, 뒤돌아서면 내뱉은 독설에 후회하지만 앞으로도 그러지 않을 자신은 없다. 유치한 싸움이라고도 칭할 수 있는 이 반복적인 충돌은, 당연한 말이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 끝나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가족끼리는 서로의 말에서 아무런 이해를 찾지 못한다. ‘엄마가 살아 봤으니 더 잘 알아, 네가 뭘 알아.’라는 한 마디는 엄마의 말을 더 들어보자는 의지조차 지워버린다. 다시 언성을 높이면서 생각한다. 엄마가 왜 그러는지 알면서 화내는 내가 우습다고. 나보다 오래 살았다면서도 아무 이유 없이 땡깡 부리는 엄마가 어린아이 같아서 또 우습다고. 이럴 때마다 문득 생각나는 영화 한 편이 있다.

<밍크코트>의 현순(황정민)은 짜증을 유발하려는 사람인 듯 행동한다. 화창한 봄날 푹 눌러쓴 모자에 털까지 달린 가죽잠바를 입고, 넘치는 식탐에 자신의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은 채 언니에게는 고기를 사달라고 쉽게 말하고, 자신의 퉁퉁한 살은 튼튼한 거라며 자기보다 마른 올케를 타박하는 모습이 그렇다. 이단이라 불리는 못 믿을 것을 믿고, 남들이 보기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을 하지 못하는 모습도 그렇다. 눈을 부릅뜨며 형부에게 그리고 동생에게 자신이 받은 말씀에 따라 독설을 퍼붓는 그 모습은 눈치 없는 아이 같아 쥐어박고 싶은 심정까지 든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남의 것을 내꺼라고 우기는 아이를 혼내고 나면 집에 그것과 똑같은 장난감이 있기도 하고, 너무 먹는다고 혼내면 마음이 헛헛해서라는 이유가 발견되기도 한다. 현순에게 배어 있는 짜증스러움 역시 그렇다. 언니와 동생에게만 돌아간 재산과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 언니와 동생에 대한 미움 때문에 종교를 버려야 했던 허무함. 그래서 현순은 그들을 미워하지 않기 위해 혼자 꿋꿋해졌고, 누가 뭐래도 ‘그러니까 이현순이지. 괜히 이현순이냐?’라는 스스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안에서 사는 것으로 해소해야 했다. 남들 눈총이 따가워도 상관없다. 내가 옳으면 옳은 것이라 믿는 것이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순이 믿는 종교는 종교라기 보단 자신에 대한 믿음의 한 방식으로 보인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현순의 딸 수진(한송희)은 엄마의 이 지긋지긋하고 철없는 모습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안다. 다른 가족들이 엄마한테 어떻게 했는지, 또 엄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엄마가 왜 무시당하면서까지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지,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는 할머니를 붙들려고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 전화가 오면 한숨을 쉬고, ‘뭔데, 또.’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항상 날 짜증나게 하는 저 엄마가 오늘은 또 무슨 소리로 나를 답답하게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엄마니까 남들이 자기처럼 엄마를 대하는 건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엄마를 유일하게 이해해줬던 할머니가 준 밍크코트를 자신을 위해 팔아버린 엄마가, 그 경솔함이 불쌍하면서도 그렇게 또 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애증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엄마와 수진이를 엮어 주는 고리이자 또 그들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이들까지 묶어 버리는, 어떻게 해도 끊어낼 수 없는 사슬이다. 그래서 수진이는 할머니께 묻는다. ‘할머니 난 왜 우리 엄마 딸로 태어났어요?’

 

분명 알면서도 부딪힐 수밖에 없는 건, 그리고 또 아직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끌어안을 수 있는 건 지겨운 가족이기 때문이다. 종종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딘가에 ‘나를 알아주겠지’라는 암묵적인 동의가 잠들어 있을 것이라 믿고 함께 살아간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종교적 색채는 이 암묵적인 동의를 보여주는 질긴 끈이다. 현순이 다닌다는 교회에 다른 가족들이 이죽거리면서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이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에서 벗어난 현순에 대한 미묘한 배신감의 표현이자 복귀에 대한 소망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니까 현순은 언니와 동생이 미워 교회를 나갔지만 머리가 빠지도록 울며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래서 언니와 동생은 ‘형부가 불덩이 맞는다’, ‘훔친 것 좋게 말할 때 제자리에 돌려 놓아라’라는 말씀을 들었다며 현순이 눈을 부릅뜰 때, 뜨끔하고 두려우면서도 정말 자신들의 어머니가 살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것인지 현순에게 다시금 물을 수밖에 없다.

현순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 범주를 벗어났지만 그 끈은 현순을 놓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딸을 살렸다. 연장치료를 중단하려는 그 순간마다 사건이 터지고 쓰러진 수진이의 생명을 살려준 것이 결국 할머니의 피라는 전개는 어쩌면 작위적인 것이지만 또 그것이 가족이라는, 혈연이라는 굴레 안에서의 필연이기에 그 허탈함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한 명 한 명 각각의 프레임으로 끊어져 있는 그들의 대화도 왠지 안심이 된다. 이는 그들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결국 또 가족이기에, 현순과 그 가족들은 프레임 밖 어디선가 서로를 찌르며 만나고 있을 것이다.

<밍크코트>(2012)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글: 송아름
영화평론가. 한국 현대문학의 극(Drama)을 전공하며, 연극·영화·TV드라마에 대한 논문과 관련 글을 쓰고 있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View.html?idxno=9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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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2-31

조회수5,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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