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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랑의 시네마 크리티크] 영화 ‘거룩한 분노’ ㅡ “짙은 암흑 속에서 핀 작은 불씨, 점점이 타올라 어둠을 삼키고, 마침내 제 얼굴을 배꼼이 들이밀다”

* 스포일러가 약간 포함돼있습니다. 해외에선 작년에 개봉됐고, 호평 받은 작품임을 밝힙니다. 비평문의 의도는 먼저 본 영화를 소개하고 나아가서 그 가치를 입체적으로 고찰해봄으로써, 다가올 국내정식개봉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관객들의 관람을 권하고자 하는 데 있습니다. 

  
 
“서설: 주추를 꿰뚫기까지, 계속해서 몸을 내던지는 낙숫물에 대해서”

어쩌면 점점이 끊이지 않은 낙숫물이 새겨놓은 섬돌의 흔적보단, 단 번에 움킨 악력에 의해 거칠게 바스러트려진 서벅돌의 자취로부터, 혹자는 보다 더 강열한 혁명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머잖아 악패듯 바람이 이는 순간이면, 급하고 강한 충격이 남긴 잘은 흔적들조차 어느덧 공기 중으로 비산해버리게 되고야 말 터이다. 잠시잠간 후엔 적요함만이 그저 휑뎅그렁하게 감돌고 있을 뿐임을 분명 확인할 수가 있으리라. 반면 패인 흔적들에 의해 느슨히 풀어진 주변의 성긴 조직 사이로 습합된 열망의 수적(水滴)덩어리들은, 댓돌의 조직 내에 전혀 새로운 동세를 머금은 짜임의 운동을 구축해가게 될 것이며, 그 팽창의 끝에서 마침내 본래적 견고함을 완전히 내파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될 테다. 물론 그 뿐만은 아니다.
 
  
▲ <낙숫물에 패인 자국들>, ▲< 힘주어 단번에 움키면 쉽게 바스러질 서벅돌> 
 
흔적을 아로새기고 또 그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아내는 삶이란 건, 스스로를 나타와 안정에 정주하지 못하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계속해서 혁명을 위한 실천에 자신을 기투하도록 이끌 것이다. 더 나아가 이처럼 끊이지 않는 반복적 시도들의 열기로 인해 데워진 땅덩이는 연접하고 인접한 주변지형들의 온도마저 아울러 바꾸어버릴 테며, 더불어 가열작용과 함께 활동이 왕성해진 그네들의 분자체계들 역시도 역동의 움직임에 연대하여 동참하도록 견인하게 될 터이다. 끝끝내 목적한 변화의 종착역에 가닿기까지 말이다. 

먼저 간단히 일러두자면 영화의 결말과 잇닿은 엔딩 크레디트의 영상이 바로 그 종착지점을 그리기 위해 헌정되었다고 할 테다. 다소 상징적인 압축요약의 성격을 띠고 있긴 하지만, 이 영상은 투쟁의 결과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어낸 이후로도 계속해서 지난하게 이어진 부대낌의 시간들 끝에서, 비로소 능준한 숫자의 동성 정치 관교들(여성대표자들)의 수를 확보하기에 이른 어느 시점의 스위스를 비추고 있다.

  
▲ <투쟁중인 스위스의 여성들>, ▲ <남성 정치인과 대등하게 대화하는 여성 정치인>

“영화에 대한 옹호, 진정으로 진보적이란 것의 의미는?” 

어떤 이들은 여전히 이 영화가 그려내는바 작중인물들의 정치성의 뜨거움이 기대에 꽤나 못 미친다고,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격렬한 주체투쟁의 형세를 여실하게 담아내지 못했노라고 불만을 표할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한국의 일부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겐 그다지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리라는 점도 어느 정도는 예견해볼 수 있는 측면이라고 할 테다. 그러나 한 번 즈음은 진지하게 질문을 던져 볼 필요도 있다고 하겠다. 이를테면 다음과도 같이 말이다. 진정으로 진보적이라는 것, 내지는 급진적이라는 것의 의미란 과연 무엇일까?

사실 규정하기가 무척 까다로운 영역이 아닐 수 없다. 암만해도 기계적으로 도식화하거나, 구조적으로 정식화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이와 관련하여선 정말로 허다한 수의 석의(釋義)들이 존재한다. 기중에서 정언격의 대답을 확연히 분별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담 어쩌면 소위 진보란 건 어떤 개념이 아닌, 차라리 정도성을 매기는 대략적인 채색의 바림(gradation)을 지칭하는 언어일 수도 있다고 말해보는 건 또 어떨까? 난해하다. 그러니 조금 더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신뢰할만한 우회로 중 하나는 언어의 원의에 다가서보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그 기원을 거슬러 추적해보는 일 말이다. 

어원을 곱씹어보는 작업은 적어도 한 가지 선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게끔 도와준다. 설령 그 움직임의 양태가 매우 과격해 보인다 할지라도, 때로는 진보를 향해 내어딛는 발걸음과 굉장한 거리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반면에 심지어 외견 상 온건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무시무시한 변혁의 잠재성을 머금고 있는 경우 역시 상상해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기실인즉 급진(radical)이라는 말의 본령은, 그 유래(radix)를 따져볼진대, 맹렬한 공세로 뿌리영역에 가닿기까지 안팎으로 거추장스럽게 들러붙은 한 점의 불필요함이나 모호함마저 남기길 용납하지 않으려는 끈덕지고 날선 추동력에 놓여 있지, 결코 밖으로 드러나는 요란함과 관계하지 않는 까닭이다(하지만 실제 현실 속에선 순도 높은 돌파의 운동일수록, 세계의 강렬한 지각변동을 수반하는 경우가 잦은 게 사실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진보의 징후는 거칠어 보이나 실상은 공허한 말들로 그득한 진공상태에서가 아니라, 삶의 무대에서 일어나는 실존적인 변화의 조짐들로부터 현상되어 나온다. 금지를 금지한다는 슬로건으로도 좀처럼 금지시키지 못했던 완고함을 뒤흔들어 놓은 ‘이변의 궤적’을 그려내고 있는 게 본 영화 텍스트임을 전제해두고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면, 아무래도 영화의 태도가 미온적이란 말을 그리도 쉽게 뇌까리긴 좀 어려울 터이다. 이제, 즈음하여 사변적이고 실체 없는 말들의 주절거림일랑 그만 마무리 짓고, 영화의 맨살로(1) 나아가 볼 필요가 있겠다. 

대체 영화텍스트 속에 형상화된 세계의 부정적 양상이 과연 어떠하단 말인가? 당대 스위스의 상황적 진실이란 게 정말로 어떠하였기에 유럽 일대를 도가니 삼아 지핀 68혁명의 불길마저도 능히 지워버릴 만큼의 냉담함을 넉넉하게 확보하고 있었다는 말일까. 끈덕진 실천의 여로에서 마침내 작중인물들이 극복해내기에 이르는 그 지난한 어둠의 깊이와 너비란 것은, 도대체 어느 정도라는 말인가?

“끈끈하게 들러붙어, 쉽사리 떨어질 줄 모르는 어두움”

그 수준을 따져볼 요량으로 세파에 잔뜩 물든 기성세대를 구태여 거론할 필요는 없을 테다. 층층이 오염된 대기를 오래도록 들이마신 이들에겐, 존재를 어둡게 채색시키는 습하고 역한 기운들이 켜켜이 쌓여 침착해 있을 것임이 아무렴 틀림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만일 대지 위에 발 딛은 지 얼마 되잖은 아이들마저 심각하게 병들었다면 그건 좀 경우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상 속에 오래 머물지 않은 아이들을 거무튀튀하고 매캐한 이데올로기 속으로 포섭해 들이고 또 함입시킬 만큼이나, 눈앞에 드리운 부패의 온상이 심각함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할 테다.

  
▲ <노라를 노려보며 설거지를 거부함>, ▲ <여성운동에 앞장선 어머니를 둔 수치심에 등교를 거부> ▲
 
자기가 먹은 접시를 설거지하라는 노라의 요구 앞에서 그녀의 아이들은 굉장한 불쾌감을 표한다. 다른 이유란 없다. 불만어린 표정을 짓는 유일한 까닭이란 단지 자신들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반복해서 강조하자면, 아직까진 심성이 하분하분하고 몰랑한 아이들에게까지도 이미 짙은 어두움이 자기 내속적인 요인으로서 스며들어 합쳐졌다고 하리만치, 가부장제의 탁한 공기가 심각하게 만연해 있었다고 본다면 옳을 터이다.

더하여 여기에 당대의 대기 오염수준을 측정할만한 또 다른, 그리고 앞선 것에 비해 한결 더 강력한 검증의 도구가 하나 놓여 있다. 만약 부정적인 현실에 개입하여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이마저도 혹 작은 일들과 소소한 미동들에 의해 주춤하고, 이내 그 품은 의지를 제 스스로가 쉽사리 철회하게 돼버린다면, 개별자들의 은밀한 존재영역에까지 내면화된 관습적인 것의 힘이 너무나도 깊고 강하게 인 박혀있음을 쉬이 확인해 볼 수가 있을 터이다.

  
▲ <강한 신념을 머금고 있었던 노라>, ▲<자녀문제에 흔들리며 여성운동을 저울질함>
 
노라는 아이들이 엄마 때문에 학교에 가기를 싫어한다는 이유로 별안간 여성운동을 벌이기를 주저하고 망설인다. 애당초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할 수 없는 사회현실, 특별히 아이들까지 그 주장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심각할 만큼 문제적인 것이며, 자신이 바로 그러한 현실을 타개하여 아이들을 위시한 존재들 일반에게 박힌 케케묵은 가시를 뽑아내고자 첫 발을 내딛었단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처럼 혁명의 노정을 밟아나가는 자를 원점으로 뒷걸음치게 할 만큼이나 회귀를 촉구하는 부정의의 구심력은 정말 강력하다고 할 테다. 그렇담 그녀는 어떻게 자신을 덮쳐온 이 위기를 적절히 극복해낼 수가 있었는가?

“욕망을 자각하기, 욕망의 주체되기, 자기존재의 주재권한을 되찾기”
   
무엇보다도 도시의 경험이 그녀의 확신에 한층 깊이를 더해 주었다고 하겠다. 아니,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양식으로 옮아가도록 모종의 질적인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온당할 터이다. 허물벗기와 신생이라는 일련의 경험은, 젊은 청년들의 시위 대열에 합류하여 아울러 참정권 쟁취의 목소리를 높이다 우연치 않게 흘러들게 된, 아주 특별한 세미나에서 촉발되었다. 바로 열댓 평이 채 못돼 보이는 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성을 새로이 자각하며 비로소 스스로를 주체로서 정립하게 된다. 이에 혹자는 의문을 표할는지 모르겠다. 그렇담 이전엔 주체가 아니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마 불완전한 반쪽짜리였다고 보면 옳을 테다. 깊은 어둠이 존재의 본질을 많은 부분 가려 반거들충이의 삶을 살아가게끔 만들었다고나 할까? 허나, 이젠 다르다.
 
 
  
▲ <젊은 여성들의 시위를 지켜보는 노라>, ▲ <본격적으로 시위행렬에 참여하는 노라>
 
유비컨대 빛이 드리워 아득히 잠들어 있던 곳에 가닿게 되었다고 본다면 옳으리라. 그녀는 평생 단 한 번도 들여다 본 적 없었던 자신의 성기를 그리고 그 모양새를 확인하며, 스스로가 욕망하는 자임을 자각하고 긍정케 된다. 그건 그간 오로지 남성들에게만 허용되는 줄로 알았던 것이 자신의 밀실에서도 꿈틀거리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사실상 그 꿈틀거림은 대단히 자연스런 존재의 표현, 환언하자면 한 인간의 살아있음의 자기증명과 다름없었던 셈이다. 더불어 욕망의 집이 가진 모양과 구조를 아는 것은 어떻게 하면 최대치의 만족을 추구할 수 있는지 깨치는 과정과도 같다고 할 테다. 비로소 그녀는 제 안에서 넘실대는 욕망의 실재를 그저 자각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스스로를 적극적인 욕망의 주체로서 호명하고 승인하게 된 것이다. 욕망이 존재의 근본동력이라면,(2) 욕망의 주체되기란, 번역해보건대 자신을 자기존재의 진정한 주인으로 세우는 과정과도 같다고 할 터이다. 이제 더는 한 남편의 아내로서, 혹은 아이들의 어미로서, 다시 말해 어떤 부수적인 장치라든지 특정한 계기를 통해 명명됨으로써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 셈이다.
 
  
▲ <자신의 음부를 비추어 보는 노라>, ▲<자신의 주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경험>
 
“장애물들을 넘어, 뭉근하지만 쉴 새 없이 뻗어나가는 불길”

제 삶의 온전한 주재권자로서 노라는 여성 참정권 쟁취를 위한 혁명의 전선에 뛰어든다. 더 자세히 풀어쓰자면 도시에서 자길 비추어 어둠으로부터 건져내고 속량해준 진실의 빛을, 이제는 자신의 작은 고장에 옮겨와 아낙들의 가슴에 심는 전이자의 소명을 담당케 된 것이다. 그러나 어지간한 파도에는 요동도 않을 만큼 강력한 가름막을 두르고선 바깥세계와의 사상적 단절을 유지해왔던 이 작지만 완고한 마을의 외벽을 허물고, 그 속으로 혁명의 불씨를 당기는 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우여곡절을 경험하는 중에서도 그녀는 결코 포기할 줄을 모르며, 끈덕지게도 마을전체를 아궁이삼아, 시나브로 불길을 지피우기 시작한다.
  
▲ <외면과 멸시 앞에 내던져진 노라>, ▲<미온적인 여성들을 바라보는 노라의 시선>
 
처음엔 남성들에게 언어적 물리적 폭력을 당해 우스꽝스러운 처지에 내몰릴 뿐만 아니라, 나아가선 지나치게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여성들의 동참마저도 얻어내지 못했던 까닭에, 그녀는 적잖은 실망과 쓰라림을 경험케 된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서 선구자의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딛어간 그녀의 헌신은 결국 모짝모짝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마을의 불길이 점차로 뭉근하게 데워짐에 따라서 그 결실 역시 촉지 가능한 형태로 맺어져 감은 물론이다. 무엇보다도 소극적이던 여성들이 아울러 뜻을 하나로 모으게 된 것이 첫 번째 유의미한 변화일 테다. 특히 여성파업(die frauen streike)이라는 테제선언을 마을 여성들이 공동의 성명을 통해 내던지게 되었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 <여성 파업을 선언하다>, ▲<그녀들만의 즐거운 시간들>
 
대개 파업이란 ‘후험적으로 부여된 위치’를 의미하는 ‘무엇으로서의’ 파업을 지칭한다. 쉽게 말해 그건 소방관 파업, 운전수 파업 등 낱낱의 존재자들에겐 다분히 2차적-부차적인 속성과 함께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할 터이다. 말하자면 그러니 ‘인간 파업’ 등의 언어는 본디 사용될 수가 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여성’이란 표현을 굳이 파업이란 말 앞에 덧붙여 동원한다는 건, 사실상 여성이라는 고유한 불가침의 존재형식이 다분히 2차적인 것으로 격하되고 전락하여 남성들에 의해 부당하게 전유돼왔음을 인지하고, 이를 배격하겠다는, 그리고 바로잡겠다는 인식론적인 그리고 존재론적인 선언이 담긴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다. 
 
  
▲ <남성들에 의해 자행된 폭력의 무참함>, ▲<결국 폐하게 되어버린 여성파업>
 
설령 강압적으로 모임을 폐하게 될지언정 이미 합당한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획득하게 된 확고한 자기의식을 없이 할 수는 없다. 새로운 존재론적 지평에 벌써 발 딛게 된 이상, 더 이상 그들은 이전의 그녀들이 아닌 셈이다. 불안에 내몰린 남성들에 의해 자행된 오밤중의 테러에 의해 그녀들의 파업은 중단당하고, 노령의 몸으로 그 무자비한 탄압의 충격을 차마 견뎌내지 못한 동료 브로니를 잃게 (남성폭력에 의한 사실상의 타살이다) 되지만, 그럼에도 한 번 일깨워진 정신은 결코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도리어 브로니의 장례가 그녀들을 한 데 엮은 연결고리를 좀 더 촘촘하게 재조직하는 기폭제가 되었노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다. 여하간 노라에게서 옮겨 붙은 불씨는 깊어진 여성들의 연대를 통해 한층 힘을 얻어 뻗어나가고, 뭉근했지만 지속적인 열기는 마침내 마을 전체를 뒤덮어버리게 된다. 순식간에 불땀에 압력을 걸어 괄은 힘으로 표면만을 바짝 태워버리려 했던 가부장적 남성들의 얄팍한 획책으로는, 그 움직임을 결코 막아낼 수도 잠재울 수도 없었던 것이다. 
             
  
▲ <충격을 견디지 못해 쓰러진 브로니>, ▲<망자의 삶/죽음의 의미를 퇴색하는 것에 저항함>
 
“마침내 일군 쾌거, 존재지위의 정신적-물질적 상승을 경험하기”

여기에서 저기로, 일렁이는 불꾸러미에서 새나오는 빛이 그저 마을에서만 반짝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 기원이 어디로부터였는지를 떠올려본다면야 해답은 간단할 테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만 실상 취리히의 불씨 역시 우주적 진공상태로부터 탄생한 것만은 아닐 게다. 최초에 어디선가 반짝인 작은 빛이 작은 빛을 부르고 그 빛이 또 다른 빛들을 호명함으로써, 마침내 미광들이 끊이지 않고서 산발단속적인 연대의 움직임을 만들어내었다고 본다면 옳을 테다. 그처럼, 잠시잠간 사르고 사라질 지평의 빛과는 달리 계속해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스위스 전역을 데운 반딧불들의 변증법은, 마침내 바라마지 않던 쾌거를 거두어내기에 이른다.(3) 대통령이라는 작자의 다분히 악심 가득한 연설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절대다수의 표결로 여성 참정권을 쟁취해내고야 만 것이다.
  
▲ <여성참정권 투표결과가 송출되고 있는 라디오>, ▲<참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노라의 손>
 
영화의 말미에서 노라는 한스와 함께 투표장으로 향하는 기쁨을 누린다. 이것이 해방과 승리의 상대적으로 정신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이라면, 더불어 그에 상응하는바 다분히 물질적이고 질료적인 표현 역시 아울러 엮어지며 포개어진다. 이제 노라와 한스 곧 동등한 위격의 존재들이 침실에서 살을 섞는다. 검고 케케묵은 안개에 가리어 많은 부분을 망실했던 존재 본연의 가치가 되살아났으며, 노라는 확실한 욕망의 주체로서 복권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가 난생 처음 겪는 오르가즘의 표현을 통해 여실하게 현상된다. 정말로 ‘물심양면’으로 존재지위의 상승을 체현하게 된 형국이다.
 
  
▲ <한스와 동등한 입장에서 사랑을 나누는 노라>, ▲<처음 오르가즘의 순간을 경험하는 노라>
 
어떤 이들은 사실상 남성과의 베드신으로 종합되는 영화의 결말부를 꽤 탐탁지 않게 여길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온전하게 여성의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서, 몸의 결합을 통해 ‘완전한 화해’를 은유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기실은 과한 시기상조가 아니냐는 지적이다. 설령 궁극적으로는 남녀라는 구별된 도식 위로 얹힌 모든 무게 나가는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 나아가 오로지 인간의 인간다움만이 선언되는 게 혁명의 종극목적이라고 할지라도, 그건 여전히 너무나도 요원한 유토피아적인 열망일진대, 벌써부터 변증법의 종착점과도 같은 매끈한 아름다움을 선언하기보다는, 차라리 남성중심성에 대한 반명제의 위족(僞足)을(4) 티가 나게 붙들어 고수하고 있는 편이 좀 더 옳지 않겠느냐는 주장 말이다.

“새 시대의 궤적을 읊조리는 예술의 말하기, 지금여기 말을 걸어오는 예술의 목소리”

일견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긴 하겠으나, 그에 앞서 먼저 고려돼야만 할 지점이 하나 있다. 물론 여기서 반역사주의(anachronism)적인 태도를 문제 삼고자 하는 건 아니다. 모든 사유의 실천은 그 당면한 고유의 시대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최우선적이고 일차적인 의미를 가지며, 그것의 동시대적인 적용이란 모종의 맥락변형을 거쳐 이차적인 층위에서 가공된 함의를 갖게 된다는 고교 수준의 유치한 기본명제를, 구태여 다시금 언급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영화는 사회과학 교과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술은 결코 사회와 떨어져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지배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그와 반대로 사회에 순전하게 종속되지도 않는다. 예술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살과 언어를(5) 통해서 세계를 향해 말을 걸어온다. 스스로 전하고자 하는 바를 어떻게든 손실 없이 증언하기 위해서 말이다. 

확실히 예술의 기상은 진취적이다. 그러나 교과서를 읽는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해 오진 않는다. 바로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예술의 고유성을 부정하고, 그저 단순하고 범박하게, 다시 말해 진리를 교과서적인 방식으로 앵무새처럼 되뇔 것만을 강요한다면, 사실상 구태여 예술이 존재할 이유 그 자체가 사라져버리게 되는 셈이다. 영화 대신에 선전영상을 보면 되고, 소설 대신에 르포르타주를 읽으면 되는 상황이라면, 그리고 회화 작품의 역할을 포스터가 충분히 대신해 줄 수 있다면, 도대체 굳이 왜 예술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물론 악의를 품고 권력에 복무하며 기존의 담론지형과 그 지배소적 요소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데에 집중하려는 속류주의적인, 그리고 지극히 질 낮은 작업(예술이나 작품이라는 표현마저도 붙이기 부적절하다는 맥락에서)들은 멀리하여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재현 그 자체를 문제 삼는 건 조금 위험하다는 점을 동시에 생각하여야만 할 테다. 때론 어떻게 재현하느냐의 문제보다도, 왜 그렇게 재현하였느냐, 그리고 그렇게 재현함으로써 도대체 어떤 효과를 의도하였느냐를 문제 삼는 것이 보다 적절한 일일 수 있다. 가령 폭력을 드러냄으로 폭력을 거부하는 방식의 접근도 어느 정도는 가능한 것이다. 그 의도며 염두에 둔 효과의 진정성은 작품 전체의 조직을 유기적인 맥락에서 적절하게 읽어낼 수 있는 심미안과 감식안을 통해서 어느 정도 검증이 가능한 일이니 그리 문제되지만은 않을 터이다. 예를 들어,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은 잘만 사용하면 매우 좋은 도구이지만, 결코 제가 서 있어야 할 위치설정을 벗어나서 무소불휘의 판관이 될 수는 없다. 애당초 예술은 교과서가 아닌 까닭이다.

다시금 영화의 맨살로 내려와서 사유해보자면, 특별히 본 영화는 기존질서의 철저한 완고함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고, 또한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이 열리어가는 궤적을 그리는 데에 방점을 찍고 있다. 지금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의 눈엔 비록 모자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시대(era)로의 이행이라고 할 만큼 매우 혁신적인 세계의 변형을 다룬다. 나아가 그 혁신은 적어도 부정할 수 없이 남성들, 좀 더 정교하게 번역하자면, 돌처럼 굳은 과거의 심지를 내다버리고 진실을 대면하고 인정하게 된 새로운 남성들과의 연대 하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 된다. 한 가지 단적인 사례만 보아도 분명하다. 참정권의 통과가 여성들만의 선택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가? 절대다수의 표결이 있었다는 건 문자 그대로 절대다수의 남성들이 동의의 표를 던졌다는 말과도 꼭 같은 것이라고 할 테다. 그리고 이는 영화의 면면을 통해 보여주었던 케케묵은 스위스의 전경을 떠올려본다면, 전혀 가능하지 않음직한 기적 같은 일이 참말로 일어나게 된 형국이라고 할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혁명사적인 전환의 궤적 그 자체를 섬세하게, 그리고 체험적인 시각언어를 통해 촉지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정치적인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선 물론 매우 논쟁적인 것(뜨거운 감자)으로 지목된 어느 한 국면에만 바투 집중해보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때론 영화텍스트가 제안하듯, 놀라운 혁명사의 전범(canon)을 한 발 떨어져 멀찍이서 관조해보는 (나아가 침잠해보는) 것도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된다. 비록 역사적 사회문화적 맥락의 차이가 빚어낸 상황적 진실은 다르다 해도, 그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분명 유의미한 참조를 얻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하여 한 가지 질문해본다면, 1970년대 초엽의 스위스와 2010년대의 한국이 정말로 그렇게 ‘극단적으로까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특히 여성의 성기를 직접 지칭하고 언급하는 표현이 사용됐다는 이유로 인해, 만일 어떤 한 영화가 그것이 지닌 특별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심의의 지연을 겪어야만 하는 상황이 작금의 지금여기의 실제현실이라면, 매우 불편부당한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한 단계 더 위로의 도약과 비상을 이루어내기까지를 면면히 그려낸 이 영화는, 우리네의 삶과 사회적 실존에 충분한 도전과 영감을 안겨다주고도 남을 일이다-.     
 
 
글 : 남유랑
평론가. 201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 당선 및 2017년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현재 남병수라는 이름으로 연세대학교 일반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있다. 논문이나 에세이 등속의 영역들과 구별되는 지점에서 '과연 비평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엇을 감당해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려고 늘 고민하는 중에 있다. 이를테면 비평의 비평다움 내지는 비평의 고유한 위치에 대한 문제설정이 삶의 중요한 화두인 셈이다. 더불어서, 정치철학적 거대담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구원과 새로운 유형의 혁명을 호명해낼 가능조건으로서의 예술에 관하여 치열하게 사유하는 노정에 있다.
 

(1) 필자가 선호하는 이 ‘영화의 맨살’이란 표현은 하스미 시게이코 비평선집의 국역판 제목이기도 하다.
(2) 근본동력 또는 본질동력이란 바루흐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사용한 conatus에 조응하는 표현이다.
(3) 본문에 기술된 미광들의 산발단속적인 움직임, 지평의 빛, 반딧불의 변증법에 대해선 프랑스의 전방위 비평가 조르주 디디-위베르망의 저술 『반딧불의 잔존』을 참고하라. 국역본의 수준 역시 썩 괜찮다.
(4) 탈식민담론의 선구자인 프란츠 파농은 네그리튀드운동을 새로운 인간(뉴 휴머니즘)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나쳐가야 할 갈 중간 기착지의 차원에서 바라보았다. 그가 궁극적으로는 인류의 유토피아적 평화를 바라면서도 알제리혁명전선의 전방에서 부단히 활약한 까닭 역시 마찬가지 맥락에서 사유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위족’ 곧 가짜다리라는 말은 비록 사태에 본질적인 것은 아닐지언정, 역사적인 변증법의 도정에서 그 지향하는바 종극적인 목적지에 가닿기 위해 필연적으로 경유하여야만 할 것으로 (지나치게 범박한 도식으로 환원하는 걸 혹 용납한다면 정명제의 대극에 놓인 반명제로) 이해해 볼 수 있다.
(5) 당연하게도 여기에서의 언어란 표현은 글말이나 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리의 전달매체인 동시에 진리의 존재형식으로서의 예술의 언어라는 말이 과연 어떻게 성립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발터 벤야민의 논문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를 참조하는 편이 상당한 도움이 될 터이다.

* 글 출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시네마 크리티크

http://www.ilemonde.com/news/articleList.html?sc_sub_section_code=S2N40&view_type=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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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자서성희

등록일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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